대선날 투표하지 않고 단식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5명의 노동자를 만났다. 취재시 기자 신분을 밝히는 게 원칙이지만, 지난 두 차례에 걸친 타 언론사 취재에 대한 경찰의 제지 사례와 보도의 공익적 가치 등을 고려한 끝에 위장 취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_편집자
기자는 잠시 의료진이 되었다. 약품 상자를 넣은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다. 경찰 안내에 따라 1층 현관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10층에 내려 한 층을 계단으로 올라가니 옥상이었다. 옥상 바닥에 무릎 높이보다 두꺼운 매트 넉 장이 깔려 있었다. 복잡한 철골구조물이 옥상 가장자리를 따라 높게 세워져 있었다. 족히 10m는 돼 보였다. 구조물 한쪽 높이 5m 지점에 반투명 비닐이 길게 씌워져 있었다. 비닐 사이로 누군가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먼저 밧줄로 연결된 고리에 가방을 걸고, 도르래로 가방을 올렸다. 그러곤 철제 수직 사다리를 타고 5m를 올라갔다. 디딤판 간격이 무릎 높이보다 커서 한 발 뗄 때마다 양손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비닐 사이로 기어 들어가 잠시 뒤뚱거려야 했다.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폭 80cm가량의 좁고 기다란 철판이 그들의 거처였다. 약 2m마다 세워져 있는 ×자 모양의 철골이 개인 공간을 구획하는 벽이자 문이었다. 그렇게 아래층에 3명, 위층에 2명이 자리를 잡고 단식농성 중이었다. 아래층은 천장이 앉은키 위로 50cm는 되었지만, 위층은 앉으면 위로 20~30cm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눕지 않으면 허리를 제대로 펼 수 없는 공간이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허리를 구부린 채 오른쪽 끝 천막 쪽으로 가야 했다.
하청 노동자가 대선날 산불 뉴스만 찾아본 이유
마름모꼴 구멍이 벌집처럼 뚫린 철판 위에 침낭과 담요가 깔려 있었다. 출입구 반대쪽 벽으로 위장약, 혈당측정계, 모기향이 흩어져 있었고 빈 생수통이 나뒹굴었다. 한 사람마다 옆에 검정 비닐봉지를 걸어 쓰레기통으로 썼다. 감정치료 요법을 정리한 출력물, 농성하는 6명(1명은 5월5일 병원에 후송됐다)의 이름을 적은 피켓이 벽에 붙어 있었고, 베이지색 계기판에는 연필로 4~5월 달력을 그리고 어제 날짜까지 ×표를 쳐놓았다.
출입구 쪽과 천장 쪽은 비닐과 천막을 듬성듬성 씌웠다. 며칠 전 찢어진 천장 쪽 비닐을 노란 테이프로 덕지덕지 보수해놓았다. 오후부터 내리는 빗방울이 비닐을 때렸다. 빗방울이 굵어지자 옥상에서 보초를 서던 경찰도 옥상 출입구 처마 밑으로 모습을 감췄다.
위층 오른쪽 방엔 김경래(49)씨가 산다. 까맣게 탄 그의 얼굴에 콧수염과 턱수염이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은 그가 강원도 사투리로 말했다. “매일 유세하는 소리 시끄러워 죽겠어요.” 그는 대선 소식에 관심이 없다. 대선날 아침 유일하게 찾아본 뉴스가 ‘삼척 산불’ 기사다. 그도 강원도 삼척 사람이다. “삼척은 2000년에도 대형 산불이 나서 주민들 아픔이 있어요. 아침에 그 뉴스만 봤어요. 대선엔 관심 없습니다.”
김씨는 삼척 광산 노동자였다. 석회석과 고령토를 채광해 시멘트를 제조하는 동양시멘트(현 삼표시멘트) 사업장에서 일했다. 동양시멘트는 2004년 ‘다물제이호’라는 자회사를 두고, 다시 하청업체와 도급계약을 맺었다. 그가 2007년 12월26일부터 일한 곳은 ‘동일’이란 이름의 하청업체였다. 추후 고용노동부 판정으로 다물제이호와 동일 모두 독자성 있는 사업주가 아니란 사실이 밝혀졌다. 다물제이호의 대표이사와 임원은 동양시멘트 대표이사와 임직원이 맡았고, 동일은 노무대행기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경래_50억원 소송당한 전직 하청 노동자
그가 노동조합 없는 하청 노동자의 설움을 알게 되는 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음껏 쓰는 귀마개, 마스크, 장갑을 하청 노동자에겐 사용 가능한 수를 제한했다. 귀마개 1개, 마스크 4개, 장갑 10개였다. 노동절 같은 기념일 선물도 하청 노동자에겐 품목 제한이 있었다. “현장에서 정규직이랑 같이 생활하는데 얼마나 박탈감이 있겠어요.” 그가 회상에 잠겼다. 그가 노조를 만든 결정적 계기는 회사가 임금 인상분 반년치와 상여금 2회분을 지급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노조 없이 노동자들이 때때로 항의하자 작업반장들의 대우는 오히려 거칠어졌다.
김씨는 동료들과 2014년 5월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동양시멘트 지부를 설립했다. 노동조합은 동양시멘트의 위장도급 또는 불법파견 소지를 조사해달라고 고용노동부 중부지방고용노동청 태백지청에 진정을 냈다. 태백지청은 2015년 2월13일 동양시멘트에 직접고용 책임이 있다고 판정하고 이를 동양시멘트에 통보했다. 나흘 뒤인 2월17일 하청업체 동일은 소속 노동자 101명에게 2월28일자 해고를 통보했다. 동양시멘트가 도급계약을 해지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노조는 광산 출입이 가로막히자 회사에 맞서 집회를 열고 싸웠다. 노조 부지부장이던 그는 업무방해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2016년 4월14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출소한 지 딱 1년째 2017년 4월14일, 그는 다시 ‘하늘 감옥’으로 올라왔다. 방도 밥도 없는 ‘감옥’이다. 중앙노동위원회가 동양시멘트와의 ‘직접고용 관계’를 인정했고, 서울중앙지법이 2016년 12월20일 ‘파견법에 따른 동양시멘트의 고용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지만, 회사는 “끄덕도 없었”다. 오히려 수십억원대 손해배상청구소송으로 노조원들을 압박했다. 동양시멘트 자회사 다물제이호는 2016년 3월 하청업체 동일과 조합원들을 상대로 15억여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가, 9월 동일에 대한 소를 취하하면서 소가를 50억여원으로 올렸다.
김씨는 옥살이도, 단식도, 고공농성도 모두 처음이었다. 그는 당장 자신들의 처지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말했다. “우리 문제가 잘 해결돼서 현장에 들어간다고 칩시다. 다른 하청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어떻게 하죠? 우리가 현장에 들어갔는데 다시 또 해고하면요? 우리는 잘못된 법을 바꾸고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지키라고 여기에 올라온 겁니다.”
국내에서 간접고용과 기간제 고용은 2000년대 들어 확산됐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근로자파견제’와 ‘정리해고제’ 도입을 관철했다. 같은 달 시행된 파견법(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간접고용 확산에 촉매가 됐다. 이는 근로기준법에 명시한 ‘중간 착취 배제’의 예외를 둔 것이다. 파견법은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6년 12월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의 주도로 개정됐다. 애초 파견노동 2년 초과시 직접 고용된 걸로 간주하도록 한 규제를 ‘직접 고용해야 한다’는 규제로 완화했다. 이듬해 7월엔 시행령을 바꿔 파견 허용 업종을 한국표준직업분류상 26개 범위에서 32개로 넓혔다. 파견법상 규제 완화와 함께, 기간제법(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기간제라는 고용 형태를 법률로 공식화하기도 했다.
오수일_하청 노동자는 조끼로 벌을 받았다
아래층 가운데 방에 있던 오수일(45)씨는 단식 고공농성 이후 몸무게가 10kg 정도 줄었다. 핏기 없이 비쩍 마른 얼굴인 그가 온화한 경상도 사투리로 말했다. “2년 넘게 싸우는데 누구 하나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라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서 여기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도 노조를 만들어 싸우다 쫓겨난 하청 노동자다. 그는 2013년 5월부터 경북 구미 공단에 있는 일본계 유리 제조업체 아사히글라스화인테크노코리아 공장에서 일했다. 그가 속한 하청업체는 지티에스(GTS)라는 곳이었다. 그는 가로·세로 2m 유리 원판 절단 작업 뒤 유리를 적재하는 일을 했다. 하루 24시간 동안 3개 조가 8시간씩 3교대로 일했다. 한 주에 하루, 2개 조가 12시간씩 교대하면 나머지 한 조가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근무조 중 누군가 경조사가 있으면 대체인력으로 투입될 때가 많았다. “한 달에 하루 쉬거나, 못 쉬거나였어요. 1년에 열 번 정도 쉬었을까요.” 고된 근무환경만 문제는 아니었다. 하청 노동자는 ‘실수’를 하면 징벌 차원에서 야광띠가 반짝이는 조끼를 착용해야 했다. “근무하면서 실수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유리 기포를 잘 제거하지 못하거나, 간부의 지시대로 안 하거나 간부 맘에 안 들면 조끼를 입죠. 하청업체 노동자들만 입습니다.”
결국 하청 노동자들은 2015년 5월29일 노조를 만들었다. 노조 결성 한 달 만에 원청 업체 ‘아사히글라스’는 6월30일 전기공사를 이유로 노조에 가입한 하청 노동자들에게 하루 휴무를 줬다. 설 명절 연휴에도 없었던 희귀한 휴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170명이 문자메시지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하청업체 지티에스는 원청과 도급계약이 해지됐으며 폐업할 계획이라고 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2016년 3월25일, 원청인 아사히글라스가 하청 노동자를 상대로 부당노동 행위를 했다고 판정했다. ‘하청 노동자들의 노조 확대와 파견 문제 제기를 축소할 목적으로 도급계약 해지 등의 방법으로 조합활동을 침해하는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부는 해고의 주체는 원청이 아니라고 봤다.
그는 민주노총과 차기 정부에 간절히 바란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조직된 노동자들이 전체 비정규직 문제, 정리해고 문제, 노동3권 문제를 전면적으로 받아안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기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그건 실패한 것 같습니다. (새 정부는) 자식들이 비정규직이 되지 않을 그런 세상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내 자식에게 비정규직을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꼭 좀 해주십시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대학교 1학년인 두 아들이 있다.
장재영_2차 하청 노동자는 버려졌다
위층 가운데 방에 있던 장재영(42)씨는 2차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10여 년을 일했다. 최근까지 소속돼 있던 회사는 진우JIS라는 현대차의 2차 하청업체다. 그는 공장에서 타이어를 내려 옮기는 하차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가 2016년 4월, 노조에 가입한 2차 하청 노동자들의 울산공장 출입증 반납을 요구했다. 노조는 현대차가 1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특별채용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미 노조에 가입한 2차 하청 노동자들이 향후 불법파견 소지에 대해 문제제기할 것을 내다보고 출입 정지 카드를 꺼낸 것으로 봤다.
처음엔 거부했지만 결국 출입증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진우JIS는 장씨 등 노조원들에게 현대차 울산공장 밖에 있는 자사 공장으로 출근하라고 지시했다. 그 공장은 지게차로 자재를 실어 대형 차량에 옮기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지게차 면허증이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노조원들은 무급 자택대기 발령을 받았다.
노조원들은 울산공장 출입이 정지되자, 울산공장 정문 앞에서 노숙농성에 돌입했다. 대선날은 노숙농성 1주년 되는 날이었다. 장씨는 농성 1주기를 서울 광화문 고공농성장에서 보냈다. 그는 “파견노동이 김대중 정부에서 만들어졌고, 노무현 정부에서 불법파견이 확대됐잖은가. 새 정부에서 더 확대되지 않을까 우려스러운데, 무엇보다 노동문제를 가장 시급히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의 온상이었다. 노동부는 2004년 12월 울산공장 101개 업체 소속 8300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가 모두 불법으로 파견됐다고 판정했다. 대법원은 2010년 7월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정규직과 혼재돼 일하고 원청의 직접 관리를 받는다는 점에서 불법파견을 인정했다. 불법파견은 현행법상 징역 3년 이하에 처할 수 있는 범죄다. 하지만 검찰 무혐의 처분 등에 따라 현대차 처벌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고진수_단체교섭권을 잃어버린 노조 지부장
아래층 오른쪽 방을 쓰는 고진수(44)씨는 정규직 노동자다. 고씨는 2001년 11월 세종호텔에 입사했다. 호텔 뷔페 코너에서 일식 요리사였던 그는 “지난 10년간 노동조합이 깨지면서 노동조건이 어떻게 나빠졌는지 다 봤다”고 말했다. 2010년 1월1일 노동조합법(노동조합 및 노조관계조정법) 개정은 세종호텔노조의 상황 변화를 이끈 결정적 계기 중 하나였다.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 조항 신설이 특히 그랬다. 당시 민주당 소속 추미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은 2009년 마지막 날 환노위에서 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의 출입을 봉쇄하고 한나라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노조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했다. 2011년 7월부터 복수노조를 허용하되 교섭창구를 단일화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교섭대표 노동조합을 사업장 내에서 자율적으로 정하지 못하면, 총조합원 중 과반수가 되는 노동조합이 대표교섭권을 갖도록 했다. 법 시행일에 세종호텔에는 새 노조가 설립됐다. 교섭권은 자연스레 새 노조로 넘어갔다. 고씨가 말했다. “중소사업장에서 연봉·진급·업무 전환배치 등으로 회사가 압박하면 노조를 유지하기 어려워요. (새 노조가 설립되고 나서) 세종호텔노조가 아무리 집회를 해도 회사에선 (교섭이 아니라) 간담회를 하자고 말하죠.”
세종호텔노조에 따르면, 새 노조 설립 뒤 2012년부터 시작해 2016년까지 전 사원을 상대로 호봉제가 연봉제로 바뀌었다. 특히 2014년 연봉에 연장·휴일·야간 수당을 포함하는 포괄연봉제와, 대표이사가 연봉을 최대 30%까지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조항이 협약에 들어갔다. 고씨는 “조리지원파트에서 일하는 과장 한 명은 지난 4년간 연봉이 64% 정도로 떨어졌다. 4500만원에서 2900만원으로”라고 설명했다.
같은 해 ‘2년 이상 근속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단체협약 조항도 삭제됐다. 기존 세종호텔노조 조합원들에 대한 강제 전보도 수시로 이뤄졌다. 10여 년 경력의 일식 요리사인 고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2015년 1월12일 신설된 ‘조리지원파트’로 전보됐다. 출장 뷔페에 쓸 기물을 준비하고 세척하는 일을 하는 곳이다. 고씨는 정규직 노동자이지만 그가 예전 지부장으로서 이끌던 노조는 단체교섭권을 잃었다. “누가 자기 몸을 축내면서 하늘로 올라가 농성하고 싶겠어요. 노동 현장에서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이 제대로 보장됐으면 이렇게까지 안 했을 거예요.”
이인근·김혜진_경영상 위기에 유령이 된 노동자들
위층 왼쪽 방은 비어 있었다. 이인근(51) 금속노조 콜텍 지회장이 쓰던 방이다. 그는 지난 5월5일 어깨, 목, 복부의 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단식 고공농성 22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병원으로 이송됐다. 국내 대표적 기타 제조업체 콜트 악기는 1995년 인도네시아에 이어 1999년 중국에 공장을 설립했다. 2000년대 들어 국내 공장 폐쇄에 착수했다. 2007년 4월 자회사 콜텍 대전공장 폐업, 2008년 8월 콜트 인천공장 폐업이 이어졌다. 정리해고가 뒤따랐다. 대전 콜텍 공장에서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이 기나긴 싸움 끝에 2009년 11월 항소심에서 해고 무효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2012년 2월 대법원이 이를 파기 환송했다. ‘일부 사업부문이 쉽게 개선될 가능성이 없는 구조적 경영 악화를 겪는 경우’엔 ‘기업 전체 실적이 흑자더라도’ ‘장래 위기에 대처할 필요가 있다’며 정리해고가 정당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년 뒤, 대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1998년 근로기준법 해고 요건인 ‘경영상 긴박한 필요’에 ‘경영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사업 양도·인수·합병’이 법률상 추가됐고, 2010년대에는 ‘장래 위기’까지 대법원 판결에서 추가한 꼴이다.
아래층 왼쪽 방에 있는 김혜진(48)씨는 목소리가 작았다. 오랜 단식으로 기력이 떨어진 탓이었다. 그는 이번이 일곱 번째 단식농성이다. 20년째 노조 탄압, 공장 폐쇄 및 이전에 맞서 싸우고 있다. 그는 1997년 3월 태광하이텍에 입사해 서울 구로공장에서 품질관리부 검사 업무를 맡았다. 하이텍은 무선조종기 제조업체다. 1996년 필리핀에 공장을 설립한 회사는 노조를 감시하고 탄압했다. 조합원 사무실 근처, 교섭 장소, 생산라인 등에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설치했다. 회사에 항의하는 조합원 5명을 2003년 2월 징계 해고했다. 2005~2008년 1·2·3심에서 모두 해고자 전원 원직 복직 판결을 받았다. 그 사이 회사는 2005년 12월 본사와 연구소를 충북 오송으로 옮겼다. 2007년 11월엔 자본금 5천만원짜리 신설법인 에이치엔드엠프로덕션을 만들고, 생산직 60명의 소속을 새 법인으로 옮기도록 요구했다. 김씨를 비롯한 조합원 13명은 거부했다. 회사가 적자 운영을 통해 정리해고와 폐업을 꾀하는 것이라고 봤다. 회사는 2008년 12월 신설 법인을 폐업하고 그곳에서 일한 비조합원들을 정리해고했다. 회사는 2014년 2월엔 구로공장 이전 계획을 통보했다. 구로공장 2060평을 매각하고, 새 부지 56평을 3억5천만원에 사들인다는 계획이었다. 김씨는 이 또한 결국 공장 폐쇄와 정리해고 수순으로 본다. 김씨는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민주노조 사수 투쟁위원회(추)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촛불집회에서도, 대선에서도 노동자들은 유령처럼 취급됐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야만 그나마 한 번이라도 우리를 쳐다볼 거라 생각했다. 함께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이러니가 노동자의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대선 후보 누구도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대선 다음날인 5월10일 오후 1시. 문재인 대통령이 카퍼레이드를 마치고 청와대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단식 고공농성을 27일째 이어온 노동자 5명은 그만 내려올 준비를 했다. 12시58분 고공농성장 위로 헬기 한 대가 배회하기 시작했다.
고공농성장 건물 앞에선 기자회견이 열렸다. 오후 1시 100여 명이 몰려들었다. 차헌호 투쟁사업장 공동투쟁위원회 공동대표(아사히비정규직지회 지회장)는 “고공농성 27일간 대선 유력 후보 누구도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조직 노동자들은 함께 전선을 세우지 못했다. 힘을 다시 모으기 위해 아쉬움을 안고 5명의 노동자들이 내려오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오후 2시. 처음으로 김혜진 대표가 구급대 들것에 실려 내려왔다. 10~15분 간격으로 한 명씩 내려올 때마다 공동투쟁위 소속 노동자들과 지지자들이 박수를 치며 외쳤다. “○○○ 동지, ○○○ 동지, 고생 많았습니다! 우리가 함께 투쟁하겠습니다!” 실려 내려오는 농성자들을 보며 눈물을 훔치던 김영아 희망연대노조 다산콜센터지부 조합원은 “정리해고로, 비정규직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길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자기 살과 뼈를 태우면서 전체 비정규직 문제와 정리해고, 노동권 보장을 걸고 싸웠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안타깝고 속상했다”고 말했다. 40m 위 전광판엔 아직 노란 현수막이 나부꼈다. 겹겹이 접힌 현수막은 5가지 요구사항을 품고 흔들렸다. ‘정리해고·비정규직 노동악법 철폐! 노동법 전면 제·개정! 노동3권 완전 쟁취!’
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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