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이 선명해졌다. 대통령이 ‘비선’ 최순실(61·개명 뒤 최서원)씨와 공모해 삼성으로부터 뇌물 433억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뇌물을 준 피의자로 이재용(49) 삼성전자 부회장을 지목했다. 이 부회장은 대통령에게 뇌물을 주고, 대가로 2015년 7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청와대로부터 결정적 도움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두 회사의 합병은 ‘이재용 삼성 승계’ 과정의 핵심이다. ‘박근혜 - 최순실 게이트’가 미스터리를 풀었다. 특검 수사에 따르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연금공단(당시 삼성물산 지분 10.2%)이 청와대 지시를 받고 주주 이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찬성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 삼성은 최씨와 딸 정유라씨 등에게 수백억원을 지원했다.
‘사적 연금’ 된 국민연금 문제 본질은
재벌닷컴은 당시 국민연금공단이 5900억원 손실을 봤다고 분석했다. ‘대통령과 비선 실세의 사적 연금’이 된 셈이다. 이 합병에 대해, 당시 국내 기관투자기관 가운데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낸 보고서가 있다. 한화투자증권 기업분석 보고서다. 이를 작성한 김철범 전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을 지난 2월13일 만났다.
김 센터장은 “본질은 삼성이 경영권 3대 세습을 위해 청와대와 수백억원대 거래를 했다는 소름 끼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면서도 “대통령과 비선 실세가 배경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국민연금공단의 피해액이 5900억원인데, “피해자는 국민연금에 돈을 낸 국민이고, 수혜자는 삼성 총수 일가와 대통령인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는 이번 사건이 ‘나쁜 권력자’의 문제일 뿐 아니라, 한국 사회가 ‘삼성 왕국 체제’로 운영되는 탓이라고 지적했다.
김 전 센터장은 미국 뉴욕대학, 뉴저지주립대학에서 각각 경제학과 회계학을 전공한 뒤 공인회계사로 일했고, 국내로 돌아와 BNP파리바 주식리서치 상무, 한국투자신탁운용 주식운용본부 리서치담당 본부장, KB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우리자산운용 자산운용 총괄 전무 등을 거쳤다. 2014년부터 2년간 한화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으로 일했다.
“정치권력 넘는 ‘삼성 왕국 체제’의 문제” 합병 때 무슨 일이 있었나.삼성물산 주가는 확실히 저평가, 제일모직은 고평가 돼 있었다. 중간 가격으로 합병하면 결국 삼성물산은 가격이 떨어져 주주들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합병법인 주가가 6개월 안에 20% 빠진 것도 같은 이유다. 너무나 간단한 산수다.
그런데 10%대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이 손실이 뻔한 상황에서 합병에 찬성했다. 연기금(연금을 지급하는 원천이 되는 기금)이 일반적으로 지켜오던 프로세스도 무너졌다. 연기금은 투자 문제와 관련해 항상 외부 전문가를 활용한다. 국민연금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적 의결권 자문사 ISS와 글라스루이스 등이 ‘삼성물산 합병 반대’ 의견을 낸 데다, 국민연금이 의결권 자문을 의뢰한 서스틴베스트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도 ‘반대’ 쪽으로 기운 상황이었다. 주위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국민연금 내부 실무 담당자들도 반대했다고 하더라. 국민연금이 연금에 목을 매야 하는 국민은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삼성은 ‘기업 합병 시너지’(상승효과)가 30조원을 넘을 것이라고 홍보했다.합병 시너지란 게 뭔가. ‘1+1=2’라는 공식 이상의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삼성 쪽은 삼성물산·제일모직 매출액을 더하면 34조원인데, 합병 뒤 2020년까지 60조원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두 회사가 합병해 매출액으로 상승효과를 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개 관리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익을 만든다.
게다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생산 분야에서 공통분모가 거의 없다. 이런 회사끼리 합병해서 5년 만에 매출액을 두 배로 만드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없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삼성물산 합병 뒤, 최근 자료를 보면 연간 매출액이 30조원이 안 된다.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그런데도 국민연금공단은 합병을 찬성했다.연기금이란 건, 보수주의가 정말 중요하다. 투자 수익을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원금을 안 까먹는 게 더 중요하다. 수익 대비 위험이 말도 안 되게 큰 결정을 했다는 건, 정말 능력이 없거나 뭔가 이상한 짓을 했거나 둘 중 하나다.
실제로 우리는 삼성물산 합병에 긍정적 효과는 거의 안 보이는데, 부정적 효과(다운사이드)는 10% 정도 하향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별히 어려운 자료를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국민연금이 삼성의 주장을 그대로 믿었을까? 그랬다면 앞으로도 투자를 해선 안 된다. 어딘가 켕기는 구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으로 삼성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의결권 전문기관에서 모두 반대했는데 총수 일가 이익을 위해 합병을 관철했다. 조각 정보를 모아 종합 결론을 내리는 걸 우리는 ‘모자이크’라고 한다. 뒤늦게 박근혜 - 최순실 게이트 사건이 불거지면서, 문제는 후자 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청와대를 동원한 것만이 아니다. ‘100원짜리 물건을 40원에 주세요. 그게 애국하는 길입니다’라는 식으로 여론까지 이용했다.
“‘애국심 마케팅’ 아닌 여론 호도한 것”이 부회장은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안이 통과되면서, 삼성물산 지분 16.5%를 확보해 계열사를 장악했다. 합병 전에는 제일모직 지분만 있고 삼성물산 지분은 0%였다. 합병 캐스팅보트를 쥔 게 국민연금(삼성물산 지분 10.2%)이었다.
국민연금은 앞서 비슷한 SK그룹 합병 건에 반대했고, 삼성물산 쪽 주가가 떨어질 가능성이 있어 막대한 손실도 예상됐다. 외국계 투자자들마저 ‘주주 이익을 침해하는 결정’이라며 소송했지만, 국내 여론은 이와 달랐다. 결과는 삼성의 승리였다.
본질과 달리 삼성의 ‘애국심 마케팅’이 통했다는 지적도 있다.이건 애국심 마케팅이 아니다. 완전히 여론을 호도한 것이다. 당시 삼성물산의 외국인 지분이 27%였다. 국내 주주(73%)가 두 배 이상 많았다. 국내 투자자 손해가 두 배 이상 많은 것이다. 삼성이 한국에 있는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을 이용한 것 같다.
나는 금융기관에 20년 있었다. 국외 재무투자기관들은 자신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으면 경영권에 아무 관심 없다. 삼성 쪽과 맞붙었던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도 마찬가지다. 삼성 경영 문제에 대해 지금 삼성 내부인들이 가장 잘 아는데, 엘리엇이 무슨 삼성 경영을 하겠다고 나서겠나. 결과적으로 엘리엇도 국내 주주들과 똑같은 처지에서 손실이 두려워 저항한 것뿐이다.
국내 투자기관 대부분이 삼성 합병에 유리한 방향으로 보고서를 썼다.우리(한화투자증권)는 당시 ‘합병 반대’ 보고서를 2~3일 만에 썼다. 분석은 하루 만에 끝났다. 너무나 쉬운 분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23개 증권사 가운데 22곳이 합병 찬성 쪽에 손을 들었다는 점이 제일 놀랍다. 삼성이 하니까 찬성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삼성이 증권사나 운용사를 통제하는 게 손쉽다는 이유도 있다. 국내에는 금산분리가 제대로 안 됐다. 삼성화재, 삼성생명 등 대부분 금융사 1위 기업이 삼성 소유다. 이들이 투자운용사에 아웃소싱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줄 기회가 엄청 많다. 삼성이 겁 안 줘도 알아서 편을 든다. 고객보다 자사 비즈니스를 위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대한민국 운용사들의 펀드를 안 사는 이유다.
전반적인 여론도 삼성에 우호적이었다.종합 일간지와 경제지 가운데 ‘삼성물산 합병 비율이 이상하다’고 쓴 곳이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삼성은 ‘왕국’이다. 정치·언론·경제·금융계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처음 ‘삼성 합병 반대’ 보고서를 썼을 때 주위 반응이 ‘너 미쳤냐’ ‘바보냐’는 것이었다. ‘합병 비율이 한쪽에 너무 불리하니까 조심하라’고 얘기한 것뿐인데 이렇게 난리 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잘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불이익을 우려하더라.
법조계도 마찬가지다. 합병 뒤 삼성이 (합병을 도운) KCC에 자사주 5.8%를 주자 엘리엇이 소송을 했는데 법원이 기각했다. 누가 봐도 우호 세력한테 지분을 넘긴 것인데 기절할 일이었다. 또 ‘삼성의 경영권 3대 세습’이란 말을 들었을 땐 소름 끼치더라. 이 상태라면 삼성은 4~6대 세습도 가능할 것이다.
‘삼성 합병이 이뤄지면 안 된다’는 보고서가 정확했는데, 청와대 개입으로 완전히 다른 결과가 됐다.그때 미스터리가 이제야 풀렸다. 국민연금이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했다. 피해자와 피해 금액, 수혜자가 확실하고, 가해자도 예상 가능한데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막연하게 ‘야로’가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까지 포함된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비슷한 일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국민연금에서만 무려 5900억원 손실이 났다. ‘투자에는 손실이 날 수도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실수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 게다가 청와대 지시를 받았다는 지금 정황을 보면, 국민연금은 고의성이 다분하다. 특정인을 돕기 위해 정상적인 절차를 안 지켰다. 전문가가 하지 말라는 것을 했다. 누가 책임을 졌나. 더구나 사과 한마디 없다. 더 놀라운 건, 책임을 져야 할 문형표씨가 구속 상태에서 아직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 개혁도 필요해 보인다.첫걸음이 금산분리다. 금융산업은 돈이 효율적으로 배분되는 게 기본이다. 재벌이 금융기관을 소유하면 자본을 배분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같아진다. 이번 박근혜 - 최순실 게이트에 이재용 부회장이 얽힌 것처럼 사고 날 확률이 100%다. 소액 주주에게 너무 불리하게 돼 있는 법도 고쳐야 한다.
4대 세습 과정, 정경유착 막으려면김 전 센터장은 ‘디브리핑’(결과 보고 뒤 평가·분석하는 일)을 말했다. 문제가 된 부분에 대해 엄격히 책임을 묻고,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구조를 샅샅이 파헤쳐야 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일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삼성이 4대 세습을 하고, 그 과정에서 다시 정경유착이 일어나고, 대통령 탄핵이란 혼란이 빚어질 수도 있다. 이걸 막으려면 경제권력의 잘못을 엄격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미국의 경우, 심각한 경제사범에 종신형, 두 종신형, 세 종신형까지 주는데, 우리는 2~3년 만에 다 풀어준다. 언제까지 이런 잘못을 반복해야 하나.”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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