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제주올레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걸어서 여행하는 길 26개 코스를 제주 땅 위에 냈다. 제주올레가 내려 했던 길은 경치 좋은 관광 코스가 아니라 삶이 이뤄지고 정신이 깃든 현장이다. 걷는 사람에게는 치유의 행복을, 길 위에 사는 지역민에게는 자부심과 경제적 혜택을, 그리고 이 길이 가능하게 해준 자연에는 지속 가능함을 선물하는 길을 내고자 했다. 그래서 길은 원시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마을 안으로 향한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이 길에 반하여 해마다 수많은 이가 제주를 찾는다.
길을 내준 마을, 여행객을 반갑게 품어준 제주와 함께 이 길을 더 오래 지켜나가기 위해 제주올레는 제주의 마을들과 함께 ‘제주올레길 주민행복사업’을 시도하고 있다. 점처럼 흩어져 있던 자연과 문화 자원을 선으로 엮어 제주의 속살을 보여준 것이 제주올레길. 제주올레는 선으로 연결된 이 길을 더 튼튼한 면으로 잇는 작업을 올레길 위 마을과 시작했다.
마을마다 품은 자원을 활용해 고유의 콘텐츠를 개발하고, 마을 살림과 공동체 회복에 도움이 될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선은 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예로부터 있어왔기에 무감한 것들, 좋은 줄은 알지만 상품화 방법을 몰라 방치해온 마을 자원에 고유의 색깔과 표정을 담아내는 작업에 각 분야 전문가들이 힘을 보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선으로 연결된 길을 튼튼한 면으로</font></font>선을 면으로 만드는 이 프로젝트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을 사람들의 열정과 의지였다. 제주올레는 107개 올레 마을 가운데 자발적 의지와 열정을 가진 곳부터 시작했다. 매년 한두 마을씩 면으로 만들어가다보면 100년이 되기 전에 올레길은 선이 아닌 면으로 확장될 것이다. 그러면 올레길을 운영·관리하는 제주올레 사무국이 있을 필요도 없다. 마을마다 알아서 올레길을 운영·관리하게 될 터이니.
서귀포시 표선면 세화3리는 주민이 200명 남짓 되는 작은 마을이다. 8년 전, 마을 주민들은 길가에 버려지는 쓰레기가 마을 분위기를 해친다며 머리를 모았다. ‘길가를 아름다운 꽃들로 채운다면,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없겠지’ 하며 마을 거리마다 다양한 허브를 심기 시작했다.
쓰레기를 없애기 위해 심은 허브는 기대 이상으로 잘 자랐다. 마을 전체가 허브 향기로 뒤덮일 만큼 허브가 풍성해지자 주민들은 ‘허브마을 세화3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마을 홍보를 시작했다. 그러나 중산간 작은 마을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제주올레와 만났다. ‘허브로 당장 돈을 만드는 것보다 세화3리를 허브마을로 홍보해 우리의 감귤이 더 나은 가격으로 팔리면 좋겠다’는 세화3리 청년 회원들과 제주올레길 주민행복사업을 시작한 제주올레가 의기투합했다.
제주올레는 제주도의 대표적 기념품으로 떠오른 ‘간세인형’에 세화3리 허브를 넣어 ‘향기 나는 허브 간세’를 신상품으로 내기로 했다. 세화3리 청년들은 허브 간세를 위해 허브오일 추출 기법을 틈틈이 연구했다. 낮엔 농사를 짓고 밤에는 학생이 되어 전문가를 초청하거나 찾아가 좋은 오일을 뽑는 법이나 허브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주민들이 추출한 오일의 양은 생각보다 많았다. 간세인형에 쓰고 남은 오일을 더 활용할 곳이 필요했다. 전문가들과 의논하던 중 올레길에서 쓰레기를 줍는 캠페인 ‘클린올레’ 때마다 수거되는 소주병이나 맥주병을 활용해 ‘공병 아로마 캔들’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나왔다. 제주올레는 세화3리에 예술가를 보내 마을의 콘텐츠를 보강하고, 허브 전문가와 캔들 전문가를 보내 상품 제작 기술을 주민들이 전수받을 수 있게 했다.
반년이 넘는 훈련을 통해 공병을 자르고 다듬어 세화3리 허브오일을 활용한 공병 캔들을 완성했다. 길에서 주운 빈 병을 재사용한 세화3리 공병 캔들은 ‘제주의 향기를 기억하다’란 제품 브랜드를 달고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갔다. 공병을 자르고 다듬는 과정이 힘들어 처음에는 ‘캔들 용기를 사서 쓸까’도 했지만, 세화3리 청년들은 ‘스토리가 없는 제품은 차별화할 수 없다’며 기꺼이 병을 줍고 씻고 자르고 다듬는 과정을 받아들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올레꾼들의 외가, 무릉2리</font></font>제주올레 11코스 종점 마을에는 마을기업 ‘무릉외갓집’이 있다. 올레길에 있는 마을과 기업을 짝지어주는 ‘1사 1올레 마을 결연’ 사업으로 시작된 마을기업이다. 7년 전, 제주올레 친구기업인 벤타코리아 김대현 대표는 ‘마을 스스로 돈 벌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마을에 선물하고 싶다’며 무릉외갓집을 제안했다.
무릉외갓집은 연회원 직거래 서비스로, 회원이 되면 매달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리에서 농사지은 싱싱한 농산물 5~6가지를 택배로 받는 꾸러미 서비스다. 김 대표는 8개월 동안 마을 주민과 머리를 맞대며 무릉외갓집 시스템을 구축했다. 기획부터 판매 시스템까지 자기 회사 일처럼 챙겼다. 벤타코리아의 지원과 열정적인 주민들 덕에 무릉외갓집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출시 1년여 만에 한계에 부딪혔다. 생산자로만 구성된 영농조합이다보니 소비자보다는 공급자 마인드가 앞섰고, 전담자가 없으니 회원 관리도 잘되지 않았다. 소가족 도시의 소비자 특성을 무시하고, 조합원 대다수가 마늘 농가라는 이유로 통마늘만 두 달 연속 보내는 식이었다. 회원 확장 못지않게 전략적인 운영·관리가 필요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무릉외갓집은 전담 인력을 채용할 형편이 아니었다. 급여가 아닌 무릉외갓집의 비전만 보고 재능과 열정을 투자할 재능기부자를 물색해야 했다.
‘제주 이민자’ 홍창욱씨가 재능기부를 자처했고, 벤타코리아가 그의 열정을 지원했다. 홍씨는 소비자와 조합원들의 ‘다리’가 되어 상품 구성부터 회원 관리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그의 열정에 조합원들도 감동해, 힘을 더 보태기 시작했다. 마을에 오프라인 판매장을 만들어 현장 판매를 병행하고, 체험 프로그램 운영 등으로 수익원을 다각화했다. 1년 뒤 재가입률이 70%를 넘어설 정도로 고객 만족도가 높아졌다. 그때부터 무릉외갓집은 연회원 500여 명에 4억원 넘는 매출을 보이며 성장하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녹차의 달콤함을 맛보는 신산리</font></font>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는 제주올레 3-B코스가 지나는 마을이다. 제주의 고온다습한 기후와 양질의 화산회토, 천연 암반수, 신산리의 볕 좋은 독자봉 자락은 최고급 녹차를 생산하기에 완벽한 조건이다. 신산리 주민들은 질 좋은 마을 녹차를 이용해 마을 이름을 알리고 싶어 했다.
전문가들에게 자문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쇼콜라티에 1세대 ‘카카오봄’ 고영주 대표와 인연이 닿았다. 큰돈을 주겠다는 대기업들의 협업 제안도 거절했던 고 대표는 제주올레가 마을을 돕기 위한 사업이라 했더니 선뜻 재능기부에 나섰다. 그녀는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운동이 걷기여서 힘들 때마다 제주올레를 걸었고, 그 길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올레길에서 받은 위로를 언젠가 제주와 올레길에 갚을 날이 오면 좋겠다 생각하던 차여서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했다”고 말했다.
고 대표는 신산리 녹차에 카카오를 가미해 녹차초콜릿과 녹차아이스크림을 개발, 마을 주민들에게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그 사이 마을 주민들은 활용되지 않던 마을 건물을 마을카페로 리모델링하고, 신산리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팔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2015년 8월 문을 연 신산리 마을카페는 탁월한 맛과 신산리 주민들의 열정적인 운영으로 빠르게 자리잡았다. 문 연 지 몇 달 만에 마을카페는 흑자로 돌아섰고, 카페에서 낸 수익은 마을 주민 전체를 위한 사업에 재투자되고 있다.
지난 7월20일 제주올레 여행자센터가 문을 열던 날, 신산리장과 사무장이 사무국을 방문했다. 신산리장은 “제주올레 덕분에 신산리가 돈도 벌고 유명해졌으니 제주올레길 유지·관리에 우리 마을도 힘을 보태고 싶다”며 두둑한 후원금 봉투를 내밀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배짱 두둑한 ‘추자삼춘네’ </font></font>추자도에도 올레길이 있다. 먹거리와 풍광이 뛰어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제주올레 으뜸 코스로 꼽는 곳이지만, 제주 본섬에서 1시간 이상 떨어져 있어 일상적인 유지·관리가 쉽지 않은 코스다. 코스 개척 당시부터 올레지기를 자청한 자원봉사자 김정일씨가 있어 유지되는 코스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자기 생업도 제쳐두고 코스 관리에 힘써주는 김정일씨와 마을 사람들이 고마워 추자마을 지원사업을 고민했다. 양식이라고는 ‘사람과 멍게뿐’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사철 내내 조기, 삼치, 쥐치, 멸치, 갈치, 고등어, 방어가 줄줄이 올라오는 추자 수산물만 잘 활용해도 마을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추자마을 사업을 도와줄 전문가를 물색하던 중, 종합광고대행사 ‘오리콤’이 손을 잡아주었다. 오리콤은 추자 수산물 직거래의 브랜딩 작업과 초기 마케팅 시스템 구축을 맡아주었다. 그 덕에 추자 토박이들이 건져올린 싱싱한 수산물을 판매하는 ‘추자삼춘네’가 지난해 말 오픈했다. 온·오프라인 매장을 동시에 열어, 품질 좋고 싱싱한 수산물을 전국에 보내기 시작했다. 생산자와 판매자가 같아 가격 거품이 없는 참조기와 추자삼춘네 멜젓(멸치젓)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높다.
제주올레 10코스가 시작되는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는 바다와 오름, 곶자왈 등 자연 자원을 고루 갖춘 마을이다. 다양한 마을 건물과 공공 인프라도 갖춰놓은 마을이다. 딱 하나, 그 하드웨어를 채워줄 프로그램과 콘텐츠가 부족하다며 제주올레에 도움을 요청해왔다.
제주올레는 화순리를 가족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마을로 만들기로 했다. 생태놀이 전문가와 문화예술 교육자들의 도움을 받아 숲 한가운데서 펼쳐지는 어린이 자연놀이 체험 ‘놀이숲 곶자왈’을 기획했다. 아이는 거미가 되어 먹잇감을 사냥하고 열매와 씨앗으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한다. 흙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숲밧줄놀이도 한다. 매주 토요일 오후, 6~13살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다. 아이가 놀이숲에 빠진 동안 부모는 인근 관광지에 다녀오거나 무료 숲 해설을 들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지역민과 함께 승마를</font></font>제주올레길 주민행복사업은 올해도 이어진다. 지난해 첫 삽을 뜬 세화2리와는 감귤을 이용한 상품과 콘텐츠를 올해 하반기부터 본격 마케팅할 계획이다. 광활한 승마장을 가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마을과는 말을 테마로 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었던 승마’를 지역민과 여행자 모두 쉽게 배우고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올가을에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
안은주 사단법인 제주올레 사무국장<font size="4"><font color="#00847C">이 기사를 포함한 제주에 관한 모든 기사를 만나볼 수 있는 낱권 구매하기!</font></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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