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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없다, 그러나 만든다

후쿠시마에서 만난 세 사람, ‘삶’을 앗아가고도 무책임하고 적반하장인 정부에 분노
등록 2016-03-15 21:33 수정 2020-05-03 04:28



‘핵무덤’  후쿠시마  5년,  희망은  어디에


①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② 희망은 없다, 그러나 만든다
* 링크를 클릭하시면 해당 글을 볼 수 있습니다.


후쿠시마 곳곳에서 높은 방사선량 때문에 접근이 통제된 지역을 찾을 수 있다. 한 경비원이 ‘귀환곤란구역’을 지키고 있다.

후쿠시마 곳곳에서 높은 방사선량 때문에 접근이 통제된 지역을 찾을 수 있다. 한 경비원이 ‘귀환곤란구역’을 지키고 있다.

3·11 동일본 대지진과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방사능이 후쿠시마를 덮쳤다. 5년이 지났지만 이곳은 여전히 ‘죽음의 도시’처럼 비치고 있다. 주민들은 정부가 ‘기민 정책’을 펴고 있다며, 스스로를 ‘버려진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삶은 지속되고 있다. 떠날 수 없었던 이들이 있다. 떠났지만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피폭 위험을 안고 생계를 이어가는 일용직 제염 노동자도 있다. 누군가는 동물과의 숙명 같은 인연을 끊지 못했다. 후쿠시마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세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❶ 아버지는 히로시마, 나는 후쿠시마

내 이름은 고와타 마쓰미. 아버지는 ‘히로시마 입시(入市) 피폭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이었던 아버지는 히로시마시(市) 원폭 투하 직후, 도시에 진입해 구조·복구 작업을 했다. 히로시마 주민이 아니면서, 원폭 지역에서 심각한 피폭을 당한 아버지 같은 이들을 ‘입시 피폭자’라고 불렀다. 인류 역사상 첫 ‘원폭의 도시’에서 주검을 치우고, 피폭 환자를 돕는 게 그의 일이었다. 사람과 건물, 도로가 모두 방사능 덩어리였다. 후쿠시마 고리야마 출신인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입시 피폭자였다는 얘기를 들은 것은 돌아가시기 불과 이틀 전이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힘을 짜냈다. “피폭자의 자식, 그로 인한 유전병을 앓는다는 차별을 당할까봐 평생 말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고….

피폭 대물림, 기막힌 세월

이와키 출신의 엄마는 내가 태어나던 해부터 아팠다. 엄마는 전쟁 때 폭탄 제조 공장에서 일했다. 어려운 형편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졌다. 과학에 소질이 있는 학생들은 폭탄 만드는 일에 동원됐다. 맹독성 물질을 다뤄야 했다. 나이 든 엄마는 친구가 없었다. 비슷한 일을 했던 동급생들이 대개 일찍 죽었다. 평생 아픈 몸을 이끌고 살던 엄마는 지난해 돌아가셨다.

‘기막힌 인생 유전’이란 게 이런 것일까. 나는 후쿠시마에서 보습학원을 운영하며 평생을 살았다. 앞뜰에선 쌀과 표고버섯도 키웠다. 3·11 대지진이 모든 걸 바꿨다. 달아나야 했다. 3월12일 새벽 5시 피난 명령이 났다. 우리처럼 산간 지역 주민들은 뒤늦게 피난 행렬에 합류했다. 물, 식량, 기저귀, 돈도 챙기지 못했다. 비상약도 없었다. 대피소에서 이틀째, 한밤중에 눈앞에서 추위와 분노 때문에 일어서는 순간 그대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봤다. 아기들이 울자 한 중년 남자가 “아기 입이라도 틀어막으라”고 했다. 오키나와 출신의 한 할머니는 “전쟁 때와 다름없다. 당시는 적군을 피해 숨어 있으면서 살기 위해 아기들 입을 틀어막았는데 그때와 다를 게 없다”고 했다.

일시 귀택 기회를 얻어 집에 갔다. 피난을 떠날 때,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포치’뿐 아니라 함께 키우던 유기 고양이 ‘냐냐’도 데려갈 수 없었다. 3개월 뒤 집에 돌아오자 포치가 방호복 바짓가랑이를 이빨로 물고 어딘가로 안내했다. 냐냐가 죽어 있었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개나 고양이가 죽으면 산짐승들이 와서 사체를 뜯어먹는 법이다. 냐냐는 상처가 전혀 없었다. 포치의 온몸에 난 커다란 상처가 “엄마, 내가 우리 가족, 냐냐를 끝까지 지켰어요”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포치는 지난해 9월에 죽었다. 동물병원에서 암과 심장병 진단을 받고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다가 떠나야 했다.

말라버린 우물에서 물이 역류했다. 제1원전으로부터 3km 떨어진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쓰나미가 닥쳤으니 물이 역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간이 선량계를 물에 가까이 대자 엄청난 경고음을 냈다. 핵발전소가 폭발하면서 방사성물질이 지하수와 이어진 게 틀림없었다.

마른 우물에서 오염수 역류

5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어린아이들의 갑상선 결절, 갑상선암 빈도가 많아지고 있다. 한 부모 밑에 아이 둘이 모두 갑상선암에 걸린 경우도 봤다. 한 고등학생은 두 차례 갑상선 수술을 하고 다시 폐암이 발병됐다.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와 인과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들을 치료해준다. 이상한 일이다. 지역사회가 망가지고 있다. 정부는 방사능 지역에 돌아가지 않는 이들에게 “이제 떼를 그만 쓰라”고 적반하장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해법은 정해져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방사능 위험 지역에 강제 이주를 철회하고,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야 한다. ‘돌아가지 않을 권리’를 주면 된다.

❷ 돈이 필요해 ‘죽음의 재’ 닦는다

내 이름은 오카자키 히사시. 후쿠시마에 일하러 온 사람치고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 나도 한때 요코하마에서 가정을 꾸렸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혼을 했다. 오랫동안 기계와 관련한 시스템엔지니어로 일하다가 부동산 쪽으로 전업을 했다. 이도 저도 신통치 않았다. 그즈음 부모님이 계신 후쿠시마에서 3·11 사고가 터졌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돈이 필요했다. 어디에 가도 제염 노동자를 찾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아름다운 후쿠시마로 되돌려놓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다.” 53살에 은퇴한 이혼남이 할 만한 일자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루 일당이 6천엔(약 6만5천원)이다. 최저시급(시간당 798엔)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다. 여기에 방사능을 다루는 일이라고 위험수당 6600엔이 추가로 지급된다. 정부가 대기업에 일을 주면, 다중하청 시스템을 거쳐 우리 같은 일용직 노동자가 쥐는 돈은 하루 1만3천엔(약 13만9천원) 수준이다. 내가 소속된 인력회사 같은 곳에서 노동자 한 명당 하루 2천~3천엔 정도 떼간다고 들었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불로 돈을 주기도 하기 때문에 손이 달리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아침 8시부터 식사 시간을 포함해서 오후 4시까지만 일하면 된다. 회사가 마련해준 숙소에서 지내며 제염 작업 장소로 출퇴근을 했다. 조금 쓸쓸하지만, 회사에서 아침·저녁 식사를 챙겨주기 때문에 편리하다. 방사능 트라우마가 있는 주민들의 편견도 피할 수 있다. 얼마 전에는 작업복 차림으로 편의점에 들어갔다가 점원한테 “화장실을 쓰지 말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적어도 후쿠시마 주민들은 작업원들이 조끼와 모자만 벗으면, 심한 차별 같은 걸 보인 적이 없다. 일요일과 비 오는 날에만 쉰다. 비바람이 불면, 어차피 제염 작업은 다시 시작이다. 숲에 있던 방사능이 고스란히 날아온다.

최저임금에 다중하청 다반사
원전 사고 피난민들의 임시 거처인 가설주택에는 주로 경제적 여유가 없는 노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이 살던 고향집은 언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방사능의 땅’이 됐다.

원전 사고 피난민들의 임시 거처인 가설주택에는 주로 경제적 여유가 없는 노인들이 살고 있다. 이들이 살던 고향집은 언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방사능의 땅’이 됐다.

정부가 제염 작업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주민 귀환’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게 별게 아니다. 지붕은 대개 물로 씻어내는 수준이다. 벽은 대부분 선량이 높지 않아 거의 제염 작업을 하지 않는다. 주택에서 눈에 띄게 선량이 높은 곳은 걸레로 닦아내기도 한다. ‘신치레이션’이라는 계측기로 1m 높이에서 0.23마이크로시버트(μSv)보다 높은 곳은 제염 대상이다. 회사 쪽에서 “되도록 선량을 떨어뜨려라. 다만 바닥을 너무 긁어내면 선량이 올라갈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하라”고 말한 적도 있다.


<i>“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위험수당으로 생명값 받고 하는 것뿐이라고 한다.”</i>

문제는 야산 인근의 주택지들이다. 나무와 낙엽에 쌓인 선량이 엄청나게 높다. 집 주변 작은 나무는 베어낼 수 있지만, 조금 큰 나무는 거의 손을 못 댄다고 보면 된다. 낙엽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다. 낙엽을 모두 버리면, 낙엽 밑 땅에 내려앉은 방사능 으로 인해 오히려 선량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흙까지 긁어내면 또 선량이 높아진다. 우리가 가진 매뉴얼에는 제염 작업 뒤 반드시 선량이 낮아져야 한다고 돼 있다. 제염 작업으로 선량을 어느 수준까지 낮춰야 한다는 정확한 수치도 없다.

실제 제염 작업이란 건, 선량계로 측정해서 작업 전보다 조금이라도 낮아지는 수준에서 그냥 겉보기에 깨끗해질 정도로 한다. 주택 내부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다. 내부에도 선량이 상당히 높은 곳이 있겠지만, 그건 집주인들이 책임질 부분이다. 이런 식으로 후쿠시마시 제염 작업 대상 99만 채 가운데 90%가량이 작업을 완료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도로와 생활권 제염을 시작할 거다.

집 안은 방치, 주인들한테 떠넘겨

그래도 오래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주로 거주제한·귀환곤란 구역에서 작업을 하는데,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한 공간에서 하루 8시간씩 일하는 것이다. 보호장비라고 해봐야 긴소매 옷, 긴바지, 장화, 방진 마스크, 헬멧 정도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에 “여기서 일해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험수당을 받았으니까 일하는 거야. 생명값이잖아”라고 말한다. 피폭으로 심각하게 건강을 해친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하면 회사가 먼저 업무에서 빼기 때문이다. 일용직 노동자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시내에 있는 우리 집은 신축했다. 지난해 아버지가 간질성 폐염 진단을 받고 돌아가셨다. 여러 병원을 가봤지만, 방사능과의 인과관계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런 집에서 살 수는 없다고 해서 어려운 결정을 했다. 원래 건물을 철거하고, 바닥에서 깨끗한 흙을 집 주변에 뿌려서 방사선량을 낮췄다. 제염 노동자로 일하다가 지금은 제염 감리자로 업무도 바꿨다. 제염 대상인 집주인과 협상하는 일을 주로 한다. 더는 귀환곤란구역에 투입되지 않는다. 방사능으로부터 도망갈 수는 없지만, 조금은 피할 수 있게 됐다.

❸ 피폭 소 가득한 ‘희망의 목장’

요시자와 마사미. 내 나이 62살, 마지막 소와 함께 수명을 다할 수도 있다. 지난해부터 소들이 더는 새끼를 치지 못하게 했다. 앞으로 5년, 혹은 10년쯤 남았을까.

3·11 원전 사고 때, 이곳 후쿠시마현 나미에마치에도 피난 명령이 내려졌다. 불과 14km 거리에서 후쿠시마 제1원전이 폭발했고, 방사능이 이곳을 덮었다. 사고 당시 원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볼 수 있었다. 한때 방사능 수치가 시간당 100μSv를 넘던 지역이다. 사람들은 도망갔지만, 내가 키우던 소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곳 축산법인의 무라타 사장이 “당신도 도망가라”고 했지만, 소들처럼 나도 떠나지 못했다. 소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하는 게 내 일이다. 무라타 사장도 사고 이전에는 “소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여기는 ‘희망의 목장-후쿠시마’다. 여기서 소 300마리가 살고 있다. 지금은 희망의 목장 대표라고 불리지만, 이전부터 나는 ‘소치기’였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졌을 때, 주민들이 떠나면서 다른 농장에서 소 1500마리 정도가 굶어죽었다. 멀쩡한 소를 살처분한 경우도 많았다. 사고 이후 5년이 지났다. 그사이 우리 목장에서도 200마리 정도가 죽었다. 하지만 송아지가 새로 태어나기도 했고, 인근 지역에서 살아남은 피폭 소들을 키워달라고 해 맡은 경우도 있다. 다시 300마리가 됐다. 사고 1년6개월 만에 몸통에 흰 반점을 가진 돌연변이가 20여 마리 나타났다. 수의사들은 “털의 색소가 빠지는 것이다. 병은 아니다. 소들은 건강하다”며 놀랐다. 방사능 영향 외에 다른 원인을 생각할 수 없었다.

돌연변이 나오고, 교배도 중단해
요시자와 마사미가 운영하는 ‘희망의 목장-후쿠시마’에는 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피폭을 당한 소 300여 마리가 살고 있다. 요시자와는 “이곳이 절망의 공간으로 보이겠지만, 희망은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요시자와 마사미가 운영하는 ‘희망의 목장-후쿠시마’에는 3·11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피폭을 당한 소 300여 마리가 살고 있다. 요시자와는 “이곳이 절망의 공간으로 보이겠지만, 희망은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는 소들끼리 교배를 했다. 하지만 그마저 중단했다. 이 소들을 왜 키우는지 나도 잘 모른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팔리지도 않는 송아지가 태어나서 뭐하겠냐”고 얘기했다. 그래, ‘먹을 수 없는 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살처분을 할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으면서 그저 살아가는 소를 살처분하는 건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미친 짓을 하는 건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정리됐다. 소를 키우는 것은 무책임한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보고 있다. 일종의 카우보이, 레지스탕스 같은 것이다. 사룟값과 농장 운영비는 전국의 시민들이 모금해주고 있다. 이들은 이곳에서 ‘희망’을 봤다고 했다. 죽어버린 줄 알았던 마을에 300여 마리의 생명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이 생명을 어떻게 다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장소가 됐으면 좋겠다. 대지진이 일어나자 모두가 생명을 놓고 도망갔다. 원전이 폭발하려고 하자, 자위대와 구급대원들에게도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위험한 순간이 오자, 생명을 귀찮은 걸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물며 소는 말할 게 없었다. 피난하면서 수백 마리의 소를 저렇게 버려뒀다. 엄청나게 상처를 받았다. 정부는 이런 방식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생명을 이야기하자면, 이 목장은 모순투성이에 한심한 장소이다. 생명을 그렇게 심하게 다룰 수는 없는 것이다.

주민 버린 정부와 싸워야 한다

나는 정면으로 국가 정책을 거스른다. 살처분을 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부는 제1원전의 방사능 유출과 피폭 피해자들의 인과관계를 대부분 부인하고 있다. 신문을 보면, 후쿠시마에서 19살 이하 아동·청소년의 갑상선암 발병 환자가 38만 명 가운데 166명이라고 했다. 전국 평균(100만 명 가운데 3명)과 따져보면, 100배 이상 높다. 사람으로는 실험할 수 없지만, 이곳에 사는 소들이 인과관계를 증명해줄 것이다. 2014년에는 반점소를 데리고 도쿄 도심까지 나갔었다. 당시 농수산 장관을 상대로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소들의 살처분을 종용하는 것은 방사능 피해의 증거를 인멸하려는 것이다. 국가는 원전 재가동, 원자로 수출에 혈안이 됐다. 반점소가 반갑지 않다. 소와의 인과관계를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원전 방사능 누출 사고와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조사해야 한다.”

‘그래도 희망은 있는 것이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그때마다 “희망의 농장은 역설의 이름”이라고 답을 한다. 여기는 절망의 땅이다. 지역 주민들은 정부가 사실상 ‘기민 정책’을 취하면서 버려진 주민 취급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절망한 상태로 쓰러질 수 없다. 그래서 농장 이름도 ‘희망의 농장’이라고 지었다. “희망은 누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 희망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여기는 원전 사고와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다. 여러 사람들의 눈과 가슴을 찌르는 장소이다. 행동하고 싸워야 한다. 희망의 길이 그 안에 있다.

후쿠시마(일본)=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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