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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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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취재했던 홍석재 기자, 방사능 피해로 거주가 제한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지역을 5년 만에 다시 찾다
등록 2016-03-10 05:57 수정 2020-05-02 19:28



‘핵무덤’  후쿠시마  5년,  희망은  어디에


①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5년 전, 대지진과 뒤이은 핵 누출 사태로 수만 명이 죽음을 맞이하던 때, 홍석재 기자는 일본에 급파되어 취재에 나섰다. 지난해 그는 정기 건강검진에서 갑상선 기능 저하증 진단을 받았다. 그때의 피폭과 관련 있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홍 기자는 ‘유령마을’을 보고 돌아왔다. 미국을 겨냥하는 북한의 핵미사일을 두려워하면서도 이 땅 곳곳의 원전에 대해선 무감하게 지내는 한국 사람들에게 그 현장을 전한다.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현지 르포와 한국 원전 문제를 짚는 기사를 연재한다.
취재 홍석재 기자, 편집 정은주 기자, 디자인 장광석
거리는 말끔했다. 지난 2월 28일,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5년 만에 찾은 후쿠시마현 도미오카정은 제염 작업과 건물 복구 작업을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한때 번화가였던 도미오카 중앙 상점가에서 인기척은 찾을 수 없었다. 폐허보다 비현실적인 곳, 원전 참사가 만든 ‘유령마을’이었다.

거리는 말끔했다. 지난 2월 28일,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5년 만에 찾은 후쿠시마현 도미오카정은 제염 작업과 건물 복구 작업을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한때 번화가였던 도미오카 중앙 상점가에서 인기척은 찾을 수 없었다. 폐허보다 비현실적인 곳, 원전 참사가 만든 ‘유령마을’이었다.

그날 ‘불의 고리’가 춤을 췄다. 2011년 3월11일 환태평양을 감싼 지진판이 흔들렸고, 진도 9.0의 대지진이 일본 전 지역을 초토화했다. 진원지는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오시카반도에서 동남동쪽으로 불과 130km 떨어진 산리쿠 앞바다였다. 도쿄에서도 300km밖에 되지 않는 곳이다.

물을 담고 있던 해저 땅이 흔들리자, 바다도 따라서 요동쳤다. 7층 빌딩 높이의 거대한 쓰나미가 게걸스럽게 동북부 해안가를 삼켰다. 일본 전역에서 이틀 만에 행방불명자가 4만 명을 넘었다. 1년 뒤 집계된 자료에는 사망 1만5844명, 행방불명 3469명으로 확인됐다. 피난자는 47만 명, 완파 주택 12만 채, 반파된 집이 23만 채였다.

사고 하루 만에 당시 특파원으로 후쿠시마를 찾았다. 국제운전면허증도 만들지 못한 채, 도쿄에서 지인의 차량을 빌렸다. 자위대와 소방·구급 차량의 이동을 위해 정부가 도쿄와 후쿠시마를 잇는 고속도로를 막았다. 후쿠시마 안팎에서 사방으로 뻗어나오는 차량으로 국도는 ‘아나콘다급 장사진’을 친 상태였다. 국도를 따라 20여 시간을 갔다.

현장은 참혹했다. 망가진 해안가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주유소도 바리케이드를 쳤다. 정부 방침으로 특수·긴급 차량 외에 기름을 나눠주지 않았다. 거북이걸음을 하던 피난민 차량 가운데 일부가 기름이 떨어지자 도로에 주저앉았다. 길은 아수라장이 됐다.

아파트는 부러질 듯 흔들리면서도 형태를 유지했지만, 내진 설계가 불가능한 내부 가스 파이프와 상하수도관은 수수깡처럼 잘려나갔다. 사람들은 구립 체육관으로 대피했다. 그래도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 내일이면 슬픔을 이기고, 다시 재건에 나설 것”이라고 서로 다짐했다.

남은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 것은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원전)였다. 쓰나미의 여파로 원자로 냉각시설이 파괴되자, 핵연료가 녹아내렸다. 대규모 방사성물질이 유출되고, 주민 16만 명이 강제 대피했다. 10만 명이 아직 고향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방사능의 공포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의 다른 방사능 기준
지난 2월27일 일본 동북부 센다이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고정식 방사선량 측정기가 ‘시간당4.4μSv(마이크로시버트)’를 가리키고 있다. 연간 노출량으로 38mSv(밀리시버트),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수준이다.

지난 2월27일 일본 동북부 센다이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고정식 방사선량 측정기가 ‘시간당4.4μSv(마이크로시버트)’를 가리키고 있다. 연간 노출량으로 38mSv(밀리시버트),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수준이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아직 노심이 녹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 가는 후쿠시마 도미오카초는 제1원전에서 남쪽으로 9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거주제한구역과 피난곤란지역이 뒤섞인 곳이어서, 높은 방사능 수치 때문에 피로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3km 밑에는 대지진 당시 폭발 직전까지 갔던 제2원전도 있습니다. 3·11 이후 도미오카에 오는 것은 저도 처음이어서 조금 긴장되네요.”

지난 2월28일, 가오리 스즈키 이와키방사능시민측정실(시민측정실) 사무국장의 말에 버스에는 옅은 긴장감이 돌았다. 오전 9시부터 7시간가량 후쿠시마현 도미오카 지역 인근에서 방사능 측정 시찰이 있는 날이었다. 일본에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이런 민간 방사능 측정 단체가 100곳 이상 생겼다.

하루 전, 다른 취재를 위해 고속도로를 타고 센다이로 이동하던 중 지자체가 도로 곁에 설치한 ‘방사능 측정기’에서 ‘4.4μSv(마이크로시버트)’짜리 선량을 본 터라 긴장감은 더 높았다. 시간당 4.4μSv를 연간 피폭량으로 계산하면 38.5mSv(밀리시버트·4.4μSv×365일×24시간=3만8544μSv)에 해당한다. 일본 정부가 주민들이 거주할 수 없는 지역(거주제한구역)으로 삼는 기준이 연간 20~50mSv다. 후쿠시마 사고 이전, 일반인의 연간 피폭 한도 선량이던 1mSv와 견주면 40배 가까운 수치다. 여러 연구 결과들은 방사선 관련 직종자들의 연간 허용 피폭량이 50mSv, 향후 암발병률이 0.5%가량 높아질 가능성이 있는 수치를 100mSv 정도로 보고 있다.


“오늘은 차량 통행이 가능한 거주제한구역을 중심으로 이동할 겁니다. 바리케이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만 뻗으면 귀환곤란구역이 있는 곳인 만큼 주의해야 합니다.”
-가오리 사무국장

후쿠시마 원전 반경 20km 인근 일부 지역에 지금도 주민들이 사는 만큼, 방사능 위험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일상적으로 통행하는 고속도로에서 나온 선량으로 4.4μSv는 지나치게 높은 수치다. 이날 베타선 연구의 권위자인 베타선연구소 아마노 히카루 박사와 스즈키 유즈루 도쿄대학명예교수(농학생명과학) 같은 전문가 그룹이 함께했다. 아마노 박사는 “일부에선 ‘거주제한구역’ 지정 기준인 연간 20mSv를 넘지 않으면 괜찮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체르노빌의 경우 시간당 0.23μSv가 나오면 출입금지구역으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늘은 차량 통행이 가능한 거주제한구역을 중심으로 이동할 겁니다. 바리케이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만 뻗으면 귀환곤란구역이 있는 곳인 만큼 주의해야 합니다. 주위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걱정이 되면 마스크를 써도 괜찮습니다.”

가오리 사무국장의 안내와 함께 도미오카 초입에 들어섰다.(지도 ❶) 인근 ‘제이(J)빌리지’ 잔디경기장에서 뜻밖에 어린 여성 축구선수들이 훈련하고 있었다. 애초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훈련장으로 계획된 곳이었다. 이와키시 의원을 지냈던 사토 가즈요시의 설명이다. “2020년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어린 축구선수들을 희생양 삼아 방사능 문제가 해소됐다는 식의 전시효과를 노리는 것 같다. 일본 정부의 프로파간다(선전 전략)다.”

※이미지를 누르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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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축구선수, 방사능 수치 높은 곳에서 훈련

제이빌리지는 원전 사고 뒤 방사선량이 높아지자 도쿄전력 직원이나 제염노동자(방사성물질을 닦아내 선량을 줄이는 이들), 건설노동자, 경찰 등이 주로 머무는 지역이 됐다. 높은 방사선량 때문에 통제가 제한됐다가 최근에야 차량 통행이 허가된 곳이기도 하다. 도쿄전력은 지난 2월 후쿠시마 원전으로 출근하는 도쿄전력 직원과 제염노동자 등 8천여 명이 제이빌리지 시설을 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뒤이어 국립 나라하원자력융합기술개발센터가 보였다. 제1원전 내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투입되는 로봇을 실험하는 곳이다. 대당 2억~3억엔짜리 로봇으로 알려졌다. 막대한 돈이 투입되지만, 사토 가즈요시는 큰 기대를 거는 눈치가 아니었다. “센터 안에 실제 원전 설계도를 축소 모형으로 만들어놓고, 실전에 가깝게 로봇을 투입하는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녹아내린 원전 내부에 투입된 로봇을 아직 한 번도 회수한 적이 없습니다.”

곧바로 방사능 측정이 시작됐다. 도미오카 지자체가 고정식 선량계를 설치한 ‘도미오카 백조가 보이는 호수’에서 시민측정실의 선량계는 시간당 0.16μSv로 집계됐다. 고정식 선량계도 0.1μSv를 가리켰다. 하지만 시민측정실 관계자가 고정식 선량계에서 조금 벗어나 구석진 공간을 측정하자 선량계 수치는 ‘0.67’까지 올라갔다. 연간 5.9mSv에 해당한다. 최악의 핵발전소 사고가 있었던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는 연간 5mSv 이상 지역에서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아마노 박사는 “고정식 선량계는 정부나 지자체가 주변을 완전히 청소한 뒤, 시멘트 바닥을 깔고 그 위에 다시 철판을 놓고 설치한 것이어서 제대로 된 수치가 나올 수 없다. 정부가 저렇게 엉터리로 측정한 선량을 바탕으로 주민들에게 ‘귀환해도 좋다’고 설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민 의사 상관없이 귀환 정책 추진”
방사능 청소 쓰레기는 ‘플레콘백’에 담는데, 후쿠시마 전역에서 거대한 ‘플레콘백 들판’을 볼 수 있다.

방사능 청소 쓰레기는 ‘플레콘백’에 담는데, 후쿠시마 전역에서 거대한 ‘플레콘백 들판’을 볼 수 있다.

측정실은 선량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공인하는 측정기 ‘아로카’를 포함해 ‘호리바테니’ ‘핫스팟파인더’ 등 세 가지 선량계를 이용해 측정했다. 아마노 박사는 “오늘 가져가는 선량계는 최대 30mSv까지 측정이 가능한데, 사고 직후 100mSv까지 가는 지역이 워낙 많아서 무용지물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주변 곳곳에선 비즈니스호텔이 신축되고 있었다. 가오리 사무국장은 “주민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는데 외지 사람들이 먼저 지역 부흥에 나서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가 지역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피난지시해제준비구역으로 귀환 정책을 강행하겠다는 뜻이다”라며 어이없어했다.

멀지 않은 곳에 ‘고농도 방사성폐기물 최종처분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후쿠시마를 청소하면서 나오는 방사능 쓰레기를 저장하는 곳이다. 최종처분장에는 방사성폐기물을 담은 ‘플레콘백’이 후쿠시마 전역에서 쏟아져 들어온다. ‘딱딱하지 않은 컨테이너’(flexible container)라는 뜻의 플레콘백은 대형 검은색 포대 형태로 돼 있다. 일종의 ‘방사능 쓰레기 종량제 봉투’다. ‘톤백’으로도 불린다.


후쿠시마 해안에서는 방사능 쓰레기 봉투가 수평선까지 이어졌다는 착각이 들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폐기물이 나오고 있다.

후쿠시마 해안과 가까운 임시 저장소에는 검은 플레콘백이 수평선까지 이어졌다는 착각이 들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폐기물이 나오고 있다. 일본 산업기술종합연구소가 후쿠시마현의 제염 작업에만 5조1300억엔(약 54조9천억원)이 들어갈 것이라고 추정한 연구 결과가 있다.

후쿠시마 인근 지역에서 방사능이 묻은 나뭇잎을 버리거나, 주택 제염 과정에서 나온 방사능 쓰레기 가운데 kg당 8천~10만Bq(베크렐)을 넘는 폐기물을 이곳에 저장하게 된다. 산을 깎아 만든 이곳을 정부와 지자체는 ‘에코텍 클린센터’라고 부른다. 환경과학기술을 동원해 깨끗하게 방사성폐기물 처리가 가능하다는 뜻일 터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 이전에는 kg당 100Bq이 넘으면 정부가 직접 방사성폐기물로 처리했지만, 기준치를 80배나 높였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안전’이 아닌, 처리 가능한 ‘용량’에 기준을 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종처분장 옆에는 ‘방사성폐기물 반입 절대 반대’라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가오리 사무국장은 “도미오카 주민들의 걱정은 10만Bq 이하 폐기물 처분장뿐이 아니다. 이걸 시작으로 중간처분장으로 가야 할 10만Bq 이상 초고농도 폐기물이 여기서 처리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고 설명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2017년 3월부터 주민 귀환을 사실상 강제할 방침이다. 후쿠시마현 도미오카에서 제염이 끝난 들녘 위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7년 3월부터 주민 귀환을 사실상 강제할 방침이다. 후쿠시마현 도미오카에서 제염이 끝난 들녘 위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도미오카 중앙 상점가는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도로를 따라 자그마한 시장이 형성돼 상점, 아이들이 깔깔거렸을 학원, 쌀가게 같은 것들이 늘어선 마을이었다.(지도 ❻) 지금은 유령도시가 됐다. 거리엔 주황색 점멸등만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개나 고양이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을의 시간은 3·11 당시에 멈춰 있었다.

엔도가 운영하던 도장가게도 그랬다. 굳게 닫힌 유리문 안으로 엔도에게 이름을 맡긴 손님들의 ‘네이밍 카드’가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3평 남짓한 가게의 작업 책상 위에 라이터와 볼펜이 놓여 있었다. 도장 기술이 꽤 좋았는지, 어딘가에서 받은 ‘입선’ 상장이 그의 작업대 위에 떨어져 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은 ‘2011년 3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5년째 4월을 맞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엔도의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음식점 ‘아톰 스시’도 그랬다. 테이블 하나에 찻잔 셋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벼운 쟁반과 플라스틱 컵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켠에서 손걸레가 빈 맥주잔 10여 개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 항구 직송점’이라고 적힌 커다란 간판 아래에는 ‘신선도 최고, 즐거움까지 만족한다’는 홍보 문구가 그럴듯했다. 벽시계는 9시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11 이후 어느 시점까지 똑딱거렸을 시계는 5년째 찾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다 지쳐서 그 자리에 주저앉은 것 같았다.

나카야마 히로코의 집도 그랬다.(지도 ❸)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나카야마는 가족과 함께 4대째 살아왔다. 그는 집에 딸린 건물에서 ‘나카야마 공부방’을 운영했다. 이곳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부모들의 퇴근이 미뤄지면, 늦게까지 아이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작은 정원이 일본 특유의 작정(作庭) 방식으로 정갈하게 꾸며진 곳이었다. 시골마을의 정겨움이란 게 대개 그런 것이다. 부모님은 ‘나카야마 시계방’을 운영했다.

대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밀려오자 가족들은 도망쳤다. 시계방의 값비싼 상품들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며칠만 지나면 집과 가게를 치우고 다시 생활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워낙 큰 재해였으니, 그만큼 각오도 더 단단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전이 터졌고, 방사능 탓에 도미오카에도 소개령이 내려졌다.

몇 달 뒤, 정부가 ‘일시 귀택’을 허용했을 때 시계방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할머니의 몸뻬에 달린 비상금 주머니 속 돈도 사라졌다. 예쁜 신랑·신부 목각인형의 얼굴은 생쥐가 쪼아먹어 사라지고 없었다. 집에 남은 것은 무거워서 들고 갈 수 없었던 마사지 기계, 그리고 방사능이었다.

겉으로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이와키방사능시민측정실 회원이 도미오카 주민 나카야마 히로코의 집에서 선량을 측정하고 있다.

이와키방사능시민측정실 회원이 도미오카 주민 나카야마 히로코의 집에서 선량을 측정하고 있다.

나카야마의 집을 중심으로 다시 방사능 측정이 시작됐다. 0.614, 0.655, 0.690…. 기계를 움직일 때마다 수치가 올라갔다. 작은 연못 앞에서는 시간당 최대 1.244μSv가 측정됐다. “예전에는 반딧불이가 나오던 곳이에요. 깨끗한 환경에서만 산다는 반딧불이인데, 방사능이 있는 곳에 반딧불이가 나올까요. 지자체가 이곳을 깨끗이 치웠지만, 사람은 살 수 없는 곳이 된 거잖아요.” 나카야마의 말에는 원망보다 절망에 가까운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의 집 앞 도로에서는 선량계가 최대 1.4μSv를 가리켰다.

이 지역은 이미 제염 작업이 완료됐다고 지자체가 보고한 곳이다. 실제로 거리는 깨끗했다. 겉으로는 3·11 대지진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논밭도 마치 가을걷이를 한 듯했다. 일본 정부가 2014년부터 주민들의 ‘귀환 정책’을 추진하면서 방사능 수치를 낮추는 제염 작업과 복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염 작업은 주택과 도로, 논밭에서 방사성물질을 털어내고 닦아내 방사능 수치를 낮추는 일이다. 일본 정부는 2017년 3월까지 주요 피난지시해제준비구역과 거주제한구역의 해제를 추진하고 있다. 이미 2014년 다무라시 미야고지 동부 등 일부 지역에 피난지시 해제가 이뤄졌고, 지난해에는 모든 주민이 마을을 떠났던 나라하정(町)에 같은 조처가 취해졌다.

제염 작업 등 일정 절차를 거쳐 방사능 수치가 낮아지면 도미오카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제염 작업은 주로 지붕과 벽을 물로 씻어내고, 주택이나 도로 주위에 떨어진 풀 같은 것들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제염 작업 뒤, 바람이 불면 산에서 다시 방사성물질이 집 주위로 내려앉는다.

도로에서 이따금 마주치는 제염노동자들이 이런 일을 한다. 이들은 일급 6천엔을 받는 일용직 노동자다. 따로 받는 위험수당 6천엔가량을 더해도, 한국돈 하루 10만원을 조금 넘게 받는 저임금 일용직 노동자다. 점심 식사를 대신할 도시락을 사기 위해 ‘콘비니’(편의점)에 들렀다. 유리문에 붙은 환경성 ‘매너업 캠페인’ 포스터에는 한 제염노동자가 걸레로 철망을 닦고 있었다. 포스터는 ‘아름다운 후쿠시마로 되돌려놓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같이 살 수 없는 피난민 가족들
이어진 원전 사고는 이 마을의 자랑거리인 벚꽃길 ‘요노모리’를 유령의 거리로 만들었다(위쪽). 주인도, 손님도 돌아오지 않은 인근 음식점 ‘아톰 스시’도 3·11 사고 이후 시간이 멈췄다.

이어진 원전 사고는 이 마을의 자랑거리인 벚꽃길 ‘요노모리’를 유령의 거리로 만들었다(위쪽). 주인도, 손님도 돌아오지 않은 인근 음식점 ‘아톰 스시’도 3·11 사고 이후 시간이 멈췄다.

“상상해볼래요? 200년 넘은 벚꽃들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 있어요. 무성하게 자란 가지를 따라서 매년 봄마다 벚꽃이 하늘을 덮어요. 우리가 그 사이를 지나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에요.”

원래 도미오카는 벚꽃으로 유명한 동네(지도 ❹)였다. 시내 한복판에 벚꽃 2천여 그루가 꽃길을 이루고 있다. 해마다 4월이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벚꽃길을 보기 위해 몰려들던 곳이다.

나카야마는 100m가량 벚꽃이 좌우로 늘어선 길 초입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여기는 길이 시작하는 곳에 불과해요. 저 앞에 바리케이드를 넘어서면 진짜 벚꽃길이 있어요. 사고 이후 5년 동안 이곳을 찾아오지 못했지만, 벚꽃은 우리를 잊지 않고 피고 있었을 거예요.”

불과 30여m 앞에 마스크와 경광등을 든 경비원 뒤로 귀환곤란지역이 있다. 도로 오른쪽 가드레일을 따라 귀환곤란구역으로 설정돼 있다. 손만 뻗으면 귀환곤란구역이 되는 것이다. 현재는 누적 방사선량이 50mSv를 넘는 지역이다. 정부는 사고 뒤 6년이 경과해도 연간 누적 방사선량이 20mSv 이하로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주민이라도 접근이 강제로 차단된다. 단단한 바리케이드가 길을 막고 있다. 마스크와 경광등을 든 경비원이 진입을 막고 있다. 바리케이드로는 방사능을 막을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는 땅이 돼버린 셈이다.

피난민들 가운데 상당수의 노인이 가설주택에 살고 있다. 수입이 있는 중년의 가정은 어떻게 해서든 가설주택을 벗어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이들 교육 문제도 걸려 있다. 그러나 노인들은 여전히 가설주택에 살고 있다.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단절은 일상이 되고 있다. 나카야마는 이렇게 설명했다. “손주들이 가설주택에 놀러가는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집에 놀러와’라고 하면서도 ‘같이 살자’고는 안 해요. 가족이 돈 문제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아예 그런 얘기를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거죠.”

후쿠시마 인근 이와키 쪽으로 이주한 피난민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이와키 주민들은 “도미오카 피난민들은 정부에서 10만엔씩 보상금을 받아 살림이 넉넉하겠다”며 시샘 어린 시선을 보낸다고 한다. 정작 도미오카 주민들은 생활비로 터무니없는 돈을 받고 고향을 떠나, 텃세에 시달리는 생활이 5년째 계속되고 있다.

“도미오카초에서 알리는 방송입니다. 이곳은 거주제한구역입니다. 모든 구역의 정례 출입은 오후 3시로 제한됐습니다. 이 시간까지는 전원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곧 바리케이드가 설치됩니다.” 건조한 목소리가 도시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마지막 행선지는 다키가와댐(지도 ❺)으로 정해졌다. 3·11 당시 피난민들이 죽음의 공포에 떨며 지났던 하야마터널을 지나야 했다. 이곳과 맞닿은 가와구치 마을의 인구가 3천여 명인데, 이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만 5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후쿠시마 제1원전과는 9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통행가능지역에서 눈으로 제1원전을 관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 주민 3천 명 터널에 5시간 갇혀
일본의 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동일본 대지진 희생자와 당시 구조 활동에 나섰다가 숨진 동료를 추모하기 위해 도미오카역을 찾았다.

일본의 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동일본 대지진 희생자와 당시 구조 활동에 나섰다가 숨진 동료를 추모하기 위해 도미오카역을 찾았다.

카메라 줌렌즈를 당겨본 제1원전에는 하얀색 건물이 듬성듬성 들어차 있었다. 제1원전을 여러 차례 관찰했던 사토 가즈요시는 “과거에는 엄청난 수의 크레인들이 움직였는데, 이제는 다소 안정된 것 같다. 오염수 저장탱크로 보이는 파란색 시설물 주위도 과거보다 안정된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버스는 6번 국도를 탔다. 일본 동북부 해안가로 펼쳐진 이 길을 따라 후쿠시마 제1원전, 제2원전이 있다. 도로 양쪽으로 제염된 논밭이 잘 정리돼 있다. 지자체뿐 아니라 주민들도 ‘제초작업조합’을 만들어 관리한다고 한다. 일부는 여러 작물을 재배하는 실험을 한다. 또 다른 이들은 태양관 패널 설치 장소로 땅을 빌려주려고 한다. 희망은 있을까? 길 옆에 펼침막이 말을 걸었다. ‘지지 마라, 도미오카!’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공포스럽다

나카야마는 “선량이 아주 높지 않지만, 피폭이 걱정되면 우선 오늘 입은 옷을 모두 깨끗이 빨라”고 했다. 첫 후쿠시마 취재를 떠났던 5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해 건강검진에서 갑상선 기능 저하증 판단을 받았다. 2년 전 검진 때와 견줘, 갑상선자극호르몬이 20배가량 올라가 있었다. 담당의는 “이 상태 그대로면, 1년 뒤에는 걸어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의사가 겁을 준 것일 수도 있지만, 진짜일 수도 있다. 원인은 후쿠시마였을까?

체르노빌 지역 어린이들의 갑상선암 발병률이 5~8배 증가한 시기가 사고 뒤 4~5년께라는 보고서가 있다. 내 처지를 과장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진짜일 수도 있다. 아이는 괜찮을까. 큰아이는 후쿠시마 취재 뒤 열한 달 만에 태어났다. 예쁘게,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그런데 감기가 잦다. 내 탓은 아닐까? 원전의 진짜 공포가 여기에 있다. 누구에게, 어떤 일이,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후쿠시마(일본)=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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