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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진보 배후는 보수 대법관

보수 대법관 동성결혼·오바마케어 등 ‘진보적 판결’ 내린 미 연방대법원 대법관들… 동성결혼 판결에선 결혼의 신성함을 지키고, 낙태 합법화 판결에선 이전의 판례를 뒤집지 않는 ‘진짜 보수’들
등록 2015-07-09 10:40 수정 2020-05-03 04:28
지난 6월26일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보수 대법관’으로 분류되는 앤서니 케네디가 진보 편에 서면서 5 대 4, 한 표 차이로 미국 전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됐다. 그의 선택은 우연한 일탈이 아니다. 미국 보수 대법관들은 역사적인 판결을 놓고 대법관 의견이 팽팽히 갈릴 때 ‘스윙보트’로서 종종 진보 편에 서왔다. 이런 그들의 선택에는 더 보수적인 목적이 있다. _편집자
‘동성결혼 합헌’에 찬성한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5인 (전체 9인)

‘동성결혼 합헌’에 찬성한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5인 (전체 9인)

앤서니 케네디(79) 대법관은 보수주의자다. 그는 공화당에서 변호사 겸 담배세 로비스트로 활동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미국 하버드대학 로스쿨을 졸업하고 1961년부터 변호사 생활을 하며 아버지 뒤를 따랐다. 그는 고향인 미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를 사랑했다. 대법관으로 지명된 51살에도 그는 생가에 살았다. 고향에 있는 퍼시픽 맥조지 법과대학에서 헌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매주 일요일 미사에 나가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그의 품성과 자질을 먼저 알아본 이는 미 공화당 출신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었다. 포드 대통령은 1975년 당시 39살이던 케네디를 제9연방순회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했다. 그는 최연소 항소법원 판사가 됐다. 이어 1987년 같은 공화당 출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그를 호출했다. 레이건이 애초 대법관으로 지명했던 로버트 보크 항소법원 판사가 극우적 인종관 때문에 미 상원 인준을 통과하지 못한 터였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보수였던 케네디는 루이스 파월 대법관이 사임한 자리에 앉았다. 케네디는 이미 레이건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1973년 감세정책 총투표안 초안을 작성할 때 케네디는 자원봉사를 했다.

케네디 대법관은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지난 6월26일(현지시각) 미 연방대법원 판결문을 직접 썼다.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 등 ‘보수 대법관’ 4명은 동성결혼 합헌에 반대했지만 그는 달랐다. 엄연한 보수 대법관이지만 ‘진보 대법관’들의 편에 서서 스윙보트(결정권자) 역할을 했다. 5 대 4 판결을 이끈 그 덕분에 미 전역에서 동성결혼 합법화의 길이 열렸다. 하지만 그가 집필한 판결문의 다수의견은 급진적이지 않다. 그는 동성결혼 합헌 결론에 이르는 근거를 보수적인 가치들로 빼곡히 채웠다.

“(동성애자라는) 변할 수 없는 본성으로 인해, 동성혼은 이들이 이 중대한 헌신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다수의견 p.4)

“결혼이 선사하는 인정, 안정감, 그리고 예측 가능성 없이 그들의 아이들은 그들의 가족이 어찌됐든 간에 결핍돼 있다는 낙인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들은 또 아무 잘못도 없이 더 어렵고 불확실한 가정생활을 한다며 천대당하고 결혼하지 않은 부모한테 양육되면서 중대한 물질적 비용을 치르게 된다.”(다수의견 p.15)

“결혼하지 않은 부모… 물질적 비용”

‘동성결혼 합헌’에 반대한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4인 (전체 9인)

‘동성결혼 합헌’에 반대한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4인 (전체 9인)

케네디 대법관은 결혼제도의 열렬한 신봉자인 듯하다. 그에게 동성결혼 합헌 판결은 동성애자 차별을 없애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결혼제도의 완전무결함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부인 매리 데이비스 사이에 세 자녀를 둔 이른바 ‘정상 가족’의 남편이자 아버지다. 일부 기독계 단체와 언론을 제외하면, 그가 동성결혼 합헌 판결에 동참한 것에 특별히 배신감을 드러낸 이가 많지 않았다. 그의 동성결혼 합헌 판단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그는 동성 커플들의 사회보장 혜택을 금지한 연방법인 결혼보호법 조항에 대해 2013년 6월 연방대법원이 5 대 4로 위헌 결정을 내릴 때도 스윙보트로서 동성애자 편에 섰다. 이미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12개 주와 워싱턴DC에서 결혼한 동성 커플들이 이 조항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것이 위헌 선언의 근거였다.

케네디 대법관은 이번 동성결혼 합헌 판결에서도 비슷한 논리를 댔다. (다른 주와 달리) 미시간, 켄터키, 오하이오, 테네시 주가 동성결혼을 금지해 이곳에 사는 동성 커플 14쌍과 동성 반려자가 사망한 남성 2명 등이 미 수정헌법 제14조에서 보장하는 평등권을 침해당했다는 것이다. 케네디 대법관의 재판연구원이던 남캘리포니아 로스쿨 교수 샘 에르먼은 <cnn> 인터뷰를 통해 “동성애 이슈에서는 헌법이 동성애자들의 영역을 보호한다는 게 케네디의 입장이었다. 나는 이번 케네디의 결정에 많은 이들이 크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바마케어, 보수적 판단? 정치적 판단?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1월20일(현지시각)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모습을 정면에서 보고 있는 미 대법관들(오른쪽 첫 줄). REUTERS

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1월20일(현지시각)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모습을 정면에서 보고 있는 미 대법관들(오른쪽 첫 줄). REUTERS


그가 항상 ‘튀는’ 보수 대법관은 아니었다. 그는 2012년 6월 ‘오바마 개혁’의 상징인 의료보험 개혁법(일명 오바마케어)에 대한 위헌 소송에서 위헌 입장을 개진했다. 보수 대법관들의 편에 선 것이다. 미 26개 주정부는 2014년까지 의료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벌금을 부과하도록 규정한 의료보험 개혁법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연방대법원이 판결을 내리기 직전까지도 보수 대법관과 진보 대법관의 수가 5 대 4로 나뉘는 터라 스윙보트 역할을 해온 케네디의 결정에 이목이 집중됐다. 결국 케네디는 보수의 자리를 지키기로 했지만 뜻밖에도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스윙보트 역할을 하며 진보 쪽으로 이탈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판결문에서 “의료보험 개혁법의 벌금 조항은 세금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헌법은 세금을 허용하기 때문에 그것을 금지하거나 그에 대해 공정성 등을 판단하는 건 연방대법원의 역할이 아니”라고 했다. 로버츠의 이탈에 놀란 보수주의자들은 그가 의회의 결정에 혼란을 주지 않으려고 합리적이고 보수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해석했다. 일부에선 그가 사법적 판단 대신 정치적 판단을 내렸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미 연방대법원은 미 연방과 주의 입법과 공권력 행사에 대해 위헌 여부를 최종적으로 판단한다. 미국 사회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연방대법원이 떠받치고 있다고 믿으며 그 권위를 존중한다. 종신 임기가 보장되는 미 대법관들은 ‘현자’나 ‘법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들은 사망, 질병 등 피치 못할 사정으로 사임할 때까지 대법관직을 유지한다. 오로지 하원의 탄핵소추와 상원의 탄핵의결을 통해서만 그들을 파면할 수 있지만 현재까지 파면된 대법관은 없다. 현 대법관 9명 가운데 5명이 20년 넘게 재직 중이다.
미 연방대법원의 사법적 권위는 역설적으로 ‘정치’의 관심과 개입을 부른다. 사법적 판단에 기대어 정치적 정당성을 얻는 ‘정치의 사법화’ 추세는 미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연방대법원 심사 대상에는 낙태, 사형제, 소수인종 우대 정책, 국가·종교의 분리 문제와 같은 미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오른다. 대법관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대법관 후보의 성향을 꼼꼼히 따져보고 지명하는 이유다. 마찬가지로 미 상원 의원들도 인사청문회에서 주요 의제에 대한 각 후보의 관점을 철저히 검증한 뒤 인준하거나 부결한다.
1969년 취임한 공화당 출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연방대법원의 ‘진보주의’를 다잡겠다는 선거 공약을 내걸기도 했다. 이는 1953년부터 1969년까지 얼 워런 대법원장이 이끈 연방대법원이 진보적 판결을 내놓은 데 반대하는 보수 세력들을 결집하려는 의도였다. 그때까지 워런 대법원장의 연방대법원은 공교육에서 인종 분리를 금지한 ‘브라운 판결’(1954년), 수사 과정에서 피의자 인권을 적극 보장하는 ‘미란다 판결’(1963년), 기혼자들의 피임 도구 구입 권리를 인정한 ‘그리스월드 판결’(1965년) 등을 내놓았다. 그러나 워런 버거 대법원장 등이 이끈 연방대법원은 이후에도 닉슨 대통령의 ‘정치적 바람’에 휘둘리지 않았다.

연방대법원 ‘진보’ 잡겠다던 닉슨
미 연방대법원 올해 회기 마지막 날인 지난 6월29일(현지시각) 여행객들과 취재진들이 워싱턴 연방대법원 건물 앞에 모여 있다. 다음 회기는 오는 10월 열린다. REUTERS

미 연방대법원 올해 회기 마지막 날인 지난 6월29일(현지시각) 여행객들과 취재진들이 워싱턴 연방대법원 건물 앞에 모여 있다. 다음 회기는 오는 10월 열린다. REUTERS


닉슨 대통령의 기대는 3년 만에 산산조각 났다. 그 중심엔 해리 블랙먼 대법관이 있었다. 그는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1970년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는 1973년 낙태 합법화의 물꼬를 튼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주도했다. 미국 사회에서 낙태는 보수(금지)와 진보(합법화) 양쪽 사이의 첨예한 이슈다. 미국 연방대법원을 다룬 책 의 저자이자 <cnn> 법조 담당 해설자 제프리 투빈은 “미국 연방대법원에는 ‘낙태 사건’과 ‘그 밖의 사건’이라는 두 개의 사건이 있다”고 했다.
기념비적인 ‘낙태 합법화’ 판결을 이끈 블랙먼은 보수적인 임명권자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로 대 웨이드 사건은 셋째를 임신한 뒤 낙태하기를 원한 21살 비혼모 제인 로(본명 노마 매코비)가 산모 건강이 위험할 때에 한정해 낙태를 허가하는 텍사스주 법이 위헌이라며 댈러스 형벌책임자 헨리 웨이드 지방검사를 상대로 낸 소송이다. 블랙먼의 주도 아래 미 연방대법원은 낙태를 사실상 전면 금지한 텍사스주 법을 대법관 7 대 2 의견으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블랙먼은 이 소송에서 임신과 출산에 관한 학술 자료들을 섭렵한 뒤 낙태 제한의 가이드라인을 정립했다. 그는 임신 기간을 석 달마다 나누는 방식으로 사실상 임신 6개월까지 낙태를 합법화하는 길을 열었다. 그는 판결문에 “프라이버시에 대한 기본적 권리는 임신 상태를 종료할지 말지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을 포괄할 정도로 충분히 폭넓은 권리”라고 선언했다. 다만 그는 “낙태권이 절대적 권리는 아니며 해당 주에서 낙태를 제한해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주의 이익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경우에 낙태 금지가 인정된다”고 단서를 달아 보수 대법관으로서의 면모도 잃지 않았다. 여성의 자율성과 태아의 생명 사이에서 나름의 기준을 세워 타협을 꾀한 셈이다.
미 공화당과 보수·개신교계 사이엔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깨야 한다는 강한 공감대가 있었다. 그들의 무기는 오직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권이었다. 연임에 성공한 레이건에 이어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공화당은 1981~93년 12년간 집권에 성공했다. 자연스레 연방대법원 대법관도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임명한 이들로 채워졌다. 1992년 보수 대 진보 대법관이 8 대 1에 달했다.
이 때문에 미 보수 세력들이 1992년 또 다른 낙태 위헌 소송인 ‘케이시 사건’ 판결에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본 것이다. 케이시 사건은 1989년 낙태규제법을 제정한 펜실베이니아주의 주지사 로버트 케이시를 상대로 미 가족계획협회가 낸 위헌 소송이다. 당시 펜실베이니아주 법은 낙태 요건을 까다롭게 정했다. ‘의사와 상담한 뒤 24시간 대기할 것’ ‘태아 성장 및 낙태 대안에 관한 강의를 들을 것’ ‘미성년자는 부모나 판사의 허락을 받을 것’ ‘기혼 여성은 남편에게 낙태 의사를 알릴 것’ 등이 그 요건이었다.
그런데 케이시 사건 판결에선 3명의 보수 대법관이 의기투합해 연방대법원의 보수적인 논의 흐름을 뒤집었다. 대법관 평의 초반까지만 해도 7 대 2로 펜실베이니아주의 낙태 규제가 합헌이라는 의견으로 기울어 있었다. 닉슨 대통령이 1972년 임명한 윌리엄 렌퀴스트 당시 대법원장은 케이시 판결을 통해 앞선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용도폐기할 참이었다.
하지만 샌드라 데이 오코너, 데이비드 수터, 케네디 3명의 대법관은 로 데 웨이드 판결을 유지하고 펜실베이니아주 낙태 규제를 위헌으로 결정하기로 뜻을 모았다. 레이건 대통령이 1981년 임명한 오코너는 미국의 첫 여성 대법관이자 유일한 선출직 출신 대법관이었다. 스탠퍼드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애리조나주 법무차관보를 거쳐 상원의원으로 활동한 공화당 정치인이다. 하지만 그는 공화당이 오랫동안 기원한 로 대 웨이드 판결 파기를 앞장서 가로막았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이 1990년 임명한 수터 대법관과 케네디 대법관도 마찬가지였다. 케네디 대법관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이 판결에선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잠시 내려놓았다. 이들의 합세에 따라 연방대법원은 결국 5 대 4로 펜실베이니아주 낙태 규제를 위헌으로 선언했다.
이들은 판결문에서 “여성이 자신의 임신 상태를 종료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의 기본 전제를 유지하면서 “(낙태 금지 요건으로서) 여성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면 안 된다”고 썼다. 이는 오코너가 제안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여성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 경우’를 ‘생존 가능성이 없는 태아를 낙태하려는 여성에게 실질적 장애를 주려는 효과나 목적이 있는 경우’라고 추상적으로 규정하면서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오코너는 케이시 사건을 비롯해 2003년 6월 미시건대 로스쿨 소수인종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 합헌 결정 등 대법관을 지낸 20여 년 동안 스윙보트 역할을 통해 연방대법원을 지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윙보트로서 종종 진보 편에 섰던 케네디와 오코너 대법관에게 ‘진보 대법관’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단지 그들의 임명권자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스윙보트를 통해 보수적 가치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동성결혼 합헌 판결 다수의견에 동참한 케네디는 ‘신성한’ 결혼제도를 동성 커플에게까지 널리 퍼뜨리고 과거 동성결혼 관련 판례 흐름의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케이시 판결에서 낙태 합법화 유지에 앞장선 오코너는 여성의 자율성을 일부 보장한 19년 전 판례를 거꾸로 되돌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은 이전의 의미 있는 제도와 판례를 보수적 관점에서 지켰다.
이는 1960년대 전후 민권운동과 여성운동을 통해 쌓아온 미국 민주주의의 전통을 ‘보수적으로’ 지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조너선 H. 애들러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학 헌법학 교수는 지난 6월25일 에 기고한 ‘이번 회기에 연방대법원은 정말 왼쪽으로 움직인 걸까’라는 제목의 글에서 “연방대법원이 한 가지 점에서 진보적 입장을 채택하고 이후 그 입장을 훨씬 더 확장하지 않는다면 상대적으로 진보적 판결을 유지하는 결정은 보수적 입장으로 읽힐 것이다. 비록 연방대법원이 과거에 한 모든 일이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었지만 말이다”라고 말했다.

종신이라 임명권자 눈치 볼 필요 없어
미 보수 대법관들의 목적이 ‘현상 유지’를 꾀하는 것이라도, 이들이 스윙보트로서 진보 쪽 손을 들어주는 풍경은 국내 헌법재판소나 대법원과는 사뭇 다르다. 국내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성향 분석을 해온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 연방대법원은 임기가 종신이라 임명권자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고 소신과 철학에 따라 판결할 수 있다. 반면 국내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여야를 불문하고 임명권자의 성향을 많이 따라간다. 재판관 6년 임기를 마치고 연임할 수 있지만 연임하지 않는 추세가 굳어졌다”고 말했다. 서울 지역에 근무하는 한 부장판사는 “미 연방대법원은 대법관 각자의 관심 주제를 바탕으로 서로 지지받기 위해 설득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우리 법원은 특정 분야의 최고를 뽑지 않고 대법관이 승진하는 자리처럼 개념화돼 있어 관심사를 가질 시간도, 그럴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cnn></c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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