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시절 더 강력한 통제 방안이 담긴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 행보를 봐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태도다. 이 때문에 정치권 안팎에서는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담긴 정치적 속내에 대한 여러 해석이 나온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정부의 국정 운영에 사사건건 ‘토’를 달고 나서는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체제를 흔들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국회법 개정안을 통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이 야당과 유가족의 주장대로 수정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주류 경제학자로 출발해 부자 증세와 복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보수 정치인.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원조 친박’이면서 대통령을 향해 쓴소리를 쏟아놓는 TK(대구·경북) 국회의원. 하고 싶은 말을 누구보다 거칠게 하다가도 때가 되면 칩거에 들어가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경제통’으로 불리는 정책가이면서 선거에서는 ‘전략통’으로 불렸던 정무가. 야당에서는 극찬을, 여당에서는 비판을 받는 여당 원내대표.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스타일의 정치인이 바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다. 지난 2월 그가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되기 전까지는 정치권 밖에서 그 이름조차 낯설어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다 지난 4월 야당으로부터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 명연설”이라는 극찬을 받은 파격적인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통해 ‘대중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5월29일 그가 주도한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청와대가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당내 친박 세력들로부터 원내대표직 사퇴 압박을 받으며 정치적 기로에 서게 된 유승민. 그의 정치를 뜯어봤다.
1958년 경북 영주 출생
1982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87년 미국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
1987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2000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2004년 17대 국회의원 당선(비례대표)
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비서실장
2005년 10월 재보선 당선(대구 동구을)
2008년 18대 국회의원 당선(대구 동구을)
2011년 한나라당 최고위원
2012년 19대 국회의원 당선(대구 동구을)
2015년 새누리당 원내대표
내년 총선,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정치적 위기를 직접적으로 안겨준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6월2일 “이번 국회법 개정안은 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강하게 시사했다. 거부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지만 여당 원내대표가 주체가 돼 여야 합의를 이끌어낸 뒤 본회의 의결까지 마친 사안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제동을 걸고 나왔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도’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 정치적 의도에는 대통령 자신의 국정 운영 방향과는 다른 노선을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김무성·유승민 지도부 체제에 대한 ‘선전포고’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 정치권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세월호와 정윤회 사태로 국정 동력을 상실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집권 3년차부터라도 국정 운영의 추진력을 되찾아야 하는 대통령의 입장에서 여당 지도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니 이에 대한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거부권 카드’로 정치적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공학적으로 보자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의 문제도 달려 있다. 특히 당내 골수 친박 세력들이 사퇴까지 거론하며 유 원내대표를 압박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최창열 용인대 교수는 “대통령으로서는 당과 청와대의 관계에서 이대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태를 벗어나기 위해 국회법 개정안을 ‘고리’로 건 것이다. 또한 총선이 1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대로 당을 김무성·유승민 체제에 맡겼다가 공천에서 친박 그룹이 불리할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도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유승민 원내대표의 입지는 상당히 좁아질 수밖에 없다. 헌법 제53조 2항에 따른 거부권으로 국회법 개정안이 국회로 되돌아오면 여야 합의를 거쳐 이를 본회의에 다시 상정시키는 절차를 밟는다. 본회의에서 재적 의원 과반수 출석,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 가결되면 개정안은 애초 국회의 결정대로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 반면 개정안이 본회의에서 부결되거나 여야가 합의를 이루지 못해 본회의에 상정되지 않으면 법안은 자동 폐기된다.
이 과정에서 유 원내대표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달린 국회법 개정안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두 개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 첫 번째는 개정안을 본회의에 다시 상정하는 것에 대해 당내 의원들의 찬성을 얻어내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 본회의에 상정된 뒤 앞서 개정안이 통과될 때의 찬성표를 그대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두 문턱 모두 쉽게 넘어서기 힘들어 보인다. 유 원내대표 쪽 관계자는 “재의결 여부나 결과에 대해 새누리당 의원들의 의견을 섣불리 짐작할 수가 없다. 친박 세력은 본회의 상정 자체를 반대할 것이다. 반대를 뚫고 본회의에 상정한다고 해도 많은 의원들이 (본회의 가결이) 대통령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면 반대로 돌아설 수 있다”고 말했다. 개정안이 상정되지 않거나 부결될 경우 유 원내대표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게 된다.
유일하게 쓴소리하는 친박박근혜 대통령과의 정면 승부라는 운명을 맞이한 유승민 원내대표의 속마음은 무척이나 복잡해 보인다. 그는 ‘원조 친박’ 출신이다. 판사 출신 유수호 전 국회의원(13대 민주정의당·14대 민주자유당)의 아들인 유 원내대표는 2000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이던 시절 이회창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총재에게 발탁돼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단 그는 2005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비서실장을 맡으며 ‘원조 친박’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의 정책메시지 총괄단장으로 활동하며 이명박 당시 후보를 향해 혹독한 검증을 펼치기도 했다.
그랬던 그와 박 대통령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은 2009년부터로 알려져 있다. 이명박 정권 시절 당내 친이명박계가 친박근혜계와의 화합을 위해 친박 좌장 격인 김무성 의원을 원내대표로 추대하려 하자, 박 대통령은 이를 이유 없이 무산시켰다. 대신 친박계에 ‘황우여 원내대표-최경환 정책위의장’을 도우라고 지시했다. 당시 유 원내대표는 이러한 박 대통령의 결정에 ‘대체 기준이 뭐냐’며 반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탈박’을 선언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달리 유 원내대표는 이후에도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서 손을 놓지는 않았다. 2011년 당 최고위원이던 그는 당시 ‘선관위 디도스 사태’로 당이 위기에 몰리자 최고위원직을 먼저 사퇴하며 홍준표 당시 새누리당 대표를 압박해 지도부 총사퇴를 불러일으켰다. 유 원내대표의 사퇴는 당의 구원투수로 나서느냐 마느냐 사이에서 고민하던 박 대통령의 ‘조기 등판’을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결국 박 대통령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복귀하며 2012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고, 여세를 몰아 대선에서도 승리를 거머쥐었다.
유 원내대표는 박 대통령을 도우면서도 의견이 다를 경우 이를 숨기지 않아왔다. 친박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온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2011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출마 당시 처음으로 △추가 감세 철회 △무상급식 수용 △비정규직 차별 철폐 등 기존의 보수 경제 논리와는 전혀 다른 노선을 내세웠다. 2007년 대선 경선 때 박근혜 후보가 내세운 줄푸세(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와의 차별화를 선언한 것이다. 그는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노선과 정책 변화에 대해서 박 전 대표가 어떻게 생각할지 저도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가 경제 분야에서 민생·복지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2008년 금융위기 사태와 심화되는 양극화를 겪으면서 보수의 경제정책 방향에 대해 스스로의 고민을 거쳐 나온 결론이었다. 대통령과 사전 교감은 없었다.
TK 지역구, 한계와 가능성이후에도 유 원내대표의 소신 행보는 계속됐다. 2012년 그는 박 대통령을 당시 비대위원장으로 이끈 주역이었지만 박 비대위원장의 주도로 한나라당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꾼 것에는 반대 의견을 분명히 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정부의 수서발 고속열차(KTX) 신규 업체 설립 방침 반대,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재연기 비판 등 사안마다 쓴소리를 해왔고 원내대표가 된 뒤에도 이를 멈추지 않았다. 쓴소리를 싫어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성향으로 봤을 때 유 원내대표를 옆에 두기 힘들었고 이것이 박근혜와 유승민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게 정치권 안팎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유 원내대표 본인은 현재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을까. 여러 언론이 그를 ‘탈박’ ‘비박’ 등으로 표현하는 것과 달리 그는 한 번도 스스로 ‘탈박’을 선언한 적이 없다. 물론 지난 4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내용을 보면 그가 이루려는 정책 방향은 박근혜 정부의 것과 매우 다르다. 또한 박 대통령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부 ‘골수 친박’들도 그의 정책 방향과 소신 행보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이 때문에 그는 대외적으로 ‘비박’으로 분류되지만 그 스스로는 대놓고 ‘탈박’을 선언할 수 없는 정치적 딜레마가 있다. 그에게는 박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사람으로서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한 일정 부분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청와대와 교감을 이뤄내야 하는 여당 원내대표라는 지위를 갖고 있다는 점, 박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이라는 점에서 그는 박근혜 대통령과의 전면전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처지다.
특히 대구에서 내리 3선을 한 TK 지역구 의원이라는 조건은 그의 한계와 가능성을 모두 드러낸다. 보수 세력의 총본산 격인 TK 지역 출신이라는 점은 차기에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대권 주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잠재력으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지역적 한계로 인해 정치력을 제한당하는 측면이 있다. 유 원내대표가 경제 분야에서는 진보를 표방하는 것과 달리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의 한반도 배치를 강하게 주장하고 수시로 ‘종북 세력’ 운운하는 등 안보에서는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TK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분석될 수 있다.
소신 굽히지 않는 ‘까칠남’소신을 굽히지 않는 다소 ‘까칠한’ 성격 역시 유 원내대표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꼽힌다. 2007년 대선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강도 높게 비판했던 그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치러진 2008년 총선에서 친박을 향한 ‘공천 학살’이 벌어지는 서슬 퍼런 상황에서도 공천 심사위원에게 제출하는 ‘의정활동 계획서’에 “18대 의원이 돼서도 계속 운하 반대운동을 열심히 펼치겠다”고 썼다. 그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새누리당을 출입하는 한 기자는 “이완구 전 원내대표는 기자들에게 상당히 친절했지만 무언가 숨기고 연기하는 느낌이었다면, 유승민 원내대표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면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다는 신뢰를 준다. 기자로서는 상당히 좋은 취재원이지만 정치적으로 유연성이 부족한 원칙주의자라는 점에서 우려스러워 보이기도 한다”고 평가했다. 원칙과 소신을 지키기 어려운 한국의 정치적 토양 아래 ‘정치인 유승민’은 ‘박근혜’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의 꿈을 펼쳐낼 수 있을까.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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