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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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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끝 “우리가 옳았습니다”

노조의 근로자지위소송 제기 이후 4년, 1심 법원 “사내하청은 불법파견” 판결…

현대차는 ‘합의대로’ 신규채용 입장, 대법 판결 전까진 ‘정규직 전환’ 미룰 듯
등록 2014-09-23 14:30 수정 2020-05-03 04:27
법원의 조속한 판결을 요구하며 8일 동안 단식했던 박현제 전 현대차 울산비정규직지회 지회장(왼쪽 두 번째)이 지난 9월18일 서울중앙지법이 “현대차 (정규직) 근로자가 맞다”고 판결한 뒤 소감을 말하다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법원의 조속한 판결을 요구하며 8일 동안 단식했던 박현제 전 현대차 울산비정규직지회 지회장(왼쪽 두 번째)이 지난 9월18일 서울중앙지법이 “현대차 (정규직) 근로자가 맞다”고 판결한 뒤 소감을 말하다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

2014년 9월18일은 ‘현대자동차의 날’이었다. 운명의 날, 현대자동차의 표정은 극명하게 대비됐다. 현대차는 서울 강남 한국전력 부지를 10조5500억원이라는 ‘통 큰 베팅’으로 품에 안았다. 현대차는 ‘100년의 미래’를 준비하겠다며 환호했다. 이날 오후엔 10년 넘게 ‘불법파견’ 논란을 불러왔던 사내하청(비정규직) 노동자 수천 명이 사실은 “현대차 (정규직) 근로자”라는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현대차는 법원 판결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통 큰 계획’은 내놓지 않았다. 사내하청 노동자 5500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드는 추가 비용은 최대로 잡아도 연간 3천억원을 넘지 않는다.
현대차는 지금 시험대에 서 있다. 현대차의 표현대로 “100년 뒤 미래 가치”를 생각할 때다. 세계 5위 완성차업체에 걸맞은 통합사옥이나 자동차 테마공원도 물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준비일 수 있다. 하지만 법을 어기지 않고, 노동자를 부당하게 착취하지 않는 것이 글로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당연한 사실은 왜 애써 외면하는 걸까?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다가 ‘보이지 않는 것’을 놓치는 기업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지금 세상의 눈이 현대차를 향해 있다. _편집자


“650명쯤?” 천의봉 현대자동차 울산비정규직지회 법규부장이 조심스레 승소자 수를 예상했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현대차 노동자(정규직)’임을 인정해달라고 낸 집단소송의 1심 판결 선고를 5분여 앞둔 때였다. 650명은 “(조립라인에서 부품을 조립하는) 의장 전부와 도장 일부”에 해당하는 수다. 나머지 300여 명은 엔진변속기, 시트, 생산관리 등 외곽 업무라 승소 가능성이 낮다고 점친 것이다.

“다 이겼다.” 이로부터 30여 분 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안에는 200여 명의 들뜬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전부 승소다” “기다린 보람이 있어”. 판결 선고 뒤 법정을 빠져나온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서로 어깨를 두드려주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줬다. 재판부가 두 번이나 판결 선고를 미루는 바람에 ‘조속한 판결’을 요구하며 법원 앞에서 노동자 4명이 이날로 8일째 단식농성을 이어온 터였다. 막연한 희망을 품었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노동자들의 ‘완승’이었다. 천의봉 법규부장은 “판결 선고를 듣고 있는데 내 귀가 잘못됐는 줄 의심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승리를 얼떨떨해했다. 그는 2012~2013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철탑에 올라 296일 동안 농성을 벌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재판장 정창근)는 지난 9월18일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994명이 현대차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애초 소송을 냈다가 현대차에 정규직으로 ‘특별고용’되는 조건으로 소 취하를 했거나, 소를 취하하진 않았지만 ‘신규채용’된 60명을 제외하고 재판부는 모든 원고에 대해 “현대차 근로자 지위에 있다”고 인정해줬다. 현대차는 2015년까지 사내하청 노동자 4천 명을 ‘특별고용’하기로 지난 8월18일 노조와 합의한 바 있다. 하지만 경력, 체불임금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데다 ‘소 취하’를 채용 조건으로 내세워 법원 판결을 피해가려는 꼼수라는 비판을 받아왔다(제1026호 표지이야기, 제1028호 ‘보도 그 뒤’ 참조).

적게 준 임금 등 물어줄 돈 ‘고작’ 310억원

다음날인 9월19일 같은 법원 민사42부(재판장 마용주)도 현대차 비정규직 245명에 대해 “이미 현대차가 직접고용했다고 간주되는 노동자이거나 현대차가 직접고용할 의무가 있는 노동자”라고 판결했다. 2006년 개정된 파견근로자보호법이 적용된 시점(2007년 7월1일)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2년 넘게 일한 노동자는 ‘고용의제’(고용된 것으로 간주한다) 조항을, 이후 입사해 2년 넘게 일한 노동자는 ‘고용의무’(고용할 의무가 있다) 조항을 적용받는다. 어쨌든 현대차가 최소 1179명이나 되는 불법파견 노동자를 써왔다는 사실이 법원 판결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파견법은 제조업에 파견노동자를 쓰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현대차는 법원 판결에 따라 이들에 대한 경력을 인정해주는 건 물론이고 2007~2011년 이들에게 정규직보다 적게 줬던 임금, 해고를 이유로 지급하지 않은 임금 등 310억원가량을 물어줘야 한다.

이번 판결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일단 그동안 계속돼온 ‘불법파견’ 논란에 쐐기를 박았다. 현대차의 모든 제작 공정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를 쓰는 게 불법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이미 2010년 사내하청 노동자인 최병승씨에 대한 판결에서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자동차 조립·생산 작업에서 정규직과 혼재해 일했다”는 이유 등을 들어 현대차 정규직임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현대차는 그 뒤에도 “최병승씨 개인에 대한 판결”이라거나,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하는 조립 공정이나 정규직과 혼재돼 있던 일부 공정만의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일주일 일한 노동자도 직접고용 해야

그런데 이번 판결은 2010년 대법원 판결보다 오히려 한 걸음 나아갔다. ‘프레스(철판 가공하기)→차체(뼈대 만들기)→도장(도료 칠하기)→의장(부품 조립하기)’ 등의 생산공정은 물론이고 엔진·변속기와 시트 제작, 생산라인에 부품을 정리·공급하는 생산관리, 차량 상태를 점검하는 출고, 반조립부품(CKD) 포장 등의 업무까지 모두 불법파견으로 판단했다. 현대차는 “적법한 도급”(사내 하청업체에 특정한 업무를 통째로 맡긴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대차의 필요에 따라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업무 범위나 담당 공정 등이 수시로 바뀌고, 현대차가 직접 작업 지시를 내렸다는 등의 이유 때문이다.

특히 민사41부는 2차 협력업체에서 일한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해서까지도 사실상 정규직임을 인정했다. 형식상으로는 현대차가 현대글로비스에 생산관리·출고 업무 일부를 맡기고, 현대글로비스가 다시 사내하청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하더라도, 현대차 공장에서 현대차의 지휘·명령을 받아 일한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묵시적인 근로자파견계약 관계가 성립했다”고 봐야 하므로 내용상으로는 현대차 노동자라는 뜻이다. 또 민사42부는 사내하청 노동자로 9일 동안 일하다가 촉탁직으로 옮겨간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서도 “현대차가 고용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2012년 8월 개정된 파견법에 따라, 불법파견일 경우엔 단 하루를 일했더라도 직접고용 의무가 생기기 때문이다.

원고 쪽 법률대리인을 맡은 김태욱 변호사는 “결론은 명확하다. 판결의 핵심은 모두 불법파견이라는 사실이 인정됐다는 거다. 사내하청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는 걸 인정한 판결이다”라고 말했다. 이같은 판결은 기아자동차, 삼성전자서비스 등 다른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인정 소송(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9월25일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 수백 명이 기아차를 상대로 낸 소송이 1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정몽구 구속’ 목소리에 힘 실릴 듯

“우리가 옳았습니다.” 9월18일 판결 선고 직후 김성욱 울산비정규직지회 지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정규직으로 인정받았으니 현대차에 직접 교섭을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대차는 “판결문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뒤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만 밝힌 상태다. 현대차 쪽은 “1심 판결과 별개로 지난 8월 노조와 합의한 사내하도급 특별고용을 성실히 이행해나가겠다”고 한다. 현대차에서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는 현재 5500여 명이다. 이들을 ‘법대로’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는 대신, ‘합의대로’ 정규직으로 채용해주겠다는 뜻이다. 합의안에는 근속연수 인정, 정규직과 차별받은 체불임금 지급 등 핵심적인 내용이 빠져 있다. 현재로선 현대차가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정규직 전환’을 미룰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울산비정규직지회와 금속노조 등은 ‘정몽구 구속’을 주장하는 목소리에 한층 힘을 실을 계획이다. 2004년 노동부가 현대차 9234개 공정에 대해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한 뒤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지만, 2006년 검찰은 현대차 쪽을 무혐의 처리한 바 있다. 그 뒤 2010년과 2012년 금속노조와 전국 법학 전공교수들이 각각 정몽구 회장 등을 파견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지만, 검찰은 몇 년째 수사를 미룬 채 만지작거리고만 있다. 파견법상 불법파견 행위를 한 사업주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데이비드 닉 라일리 전 GM대우 대표이사에 대해 불법파견 노동자를 쓴 혐의(파견법 위반)로 벌금 7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대선 당시 불법파견 사업장에 대해서는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하겠다고 공약했다. 정기호 변호사는 “법원의 판결 취지를 존중해서 노동부 특별근로감독이나 검찰 수사가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

기다림의 시간은 이미 충분했다. 노조 설립 이후 11년, 근로자지위소송 제기 이후 4년을 기다렸다. 9월18일 법원 앞에서 만난 배동원(59)씨는 2003년부터 충남 아산공장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다가 2011년 징계해고됐다. 진작 정규직으로 전환됐더라면 그는 현대차 공장에서 내년까지 일할 수 있었을 게다. 이날 배씨의 주름진 얼굴에도 오랜만에 웃음꽃이 폈다. 하지만 배씨도, 김성욱 지회장도, 그 자리에 있던 사내하청 노동자 누구도 활짝 웃진 못했다.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어쩌면 다시 시작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글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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