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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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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빈민촌 찾는 ‘가난한 자의 벗’

교황 프란치스코의 청빈한 삶
등록 2014-08-13 15:25 수정 2020-05-03 04:27
프란치스코 교황이 6월14일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무개차를 탄 채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바티칸/EPA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6월14일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무개차를 탄 채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바티칸/EPA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리아 출신 교황(그레고리오 3세) 이후 1273년 만에 나온 비유럽권 교황이다. 그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가 다니던 양말공장에서 일하며 중학교를 다녔다. 그는 노동하며 성장했고, 노동의 가치를 체득했다고 한다. 스무 살 때 예수회에 입회했고, 1969년 33살 때 사제가 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제(베르골리오 신부)로서 장년기를 보낸 1973년부터 1992년까지 아르헨티나는 격변기였다.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이때 교황은 아르헨티나 예수회 소속의 모든 회원을 책임지는 관구장이었는데, 군사정권에 탄압받는 이들을 위한 인권운동을 남몰래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신학자인 스카노네 신부는 “베르골리오 신부가 예수회 관구장으로 있을 때 군사정권에 의해 단 한 명의 예수회원도 살해되지 않은 것을 기뻐합니다. 베르골리오 신부는 군사정권에 협조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선 1만3천~3만 명에 이르는 정치인·교수·학생·노동조합원 등이 군사정권에 의해 살해당했다.

교황은 주교와 추기경으로 있을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촌 사목에 힘썼다. 마약이 유통되고 폭력이 흔한 우범지대여도 교황은 개의치 않고 동행하는 사람 없이 빈민촌을 찾았다고 한다. 교황을 1994년부터 알고 지낸,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산마르틴 보좌 주교인 문한림 주교는 당시를 기억하며 “성당 등에서 미사집전을 위해 교황을 초청할 때 차를 보내드리려고 전화하면 ‘알아서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곤 시내버스를 타고 왔다. 빈민촌은 치안이 좋지 않아 위험하다고 하는데도 그분은 신부복을 입고 작은 가방 하나 들고 찾아다니곤 했다”고 말했다.

교황은 2005년 전임 교황 선출 때도 강력한 경쟁자 중 한 명이었다. 이탈리아 언론은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전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비슷하게 득표했지만, 동료 추기경에게는 베네딕토 16세에게 투표하라고 부탁했다고 전했다. 전임 교황과 신학적 견해를 공유한 베네딕토 16세가 교회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랬다고 한다. 8년 뒤인 2013년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자진 사퇴를 했고, 추기경 115명의 투표를 거쳐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마침내 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교황으로 선출된 뒤에도 그의 소박한 삶은 계속됐다. 선출된 다음날 그는 자동차 퍼레이드를 사양하고 바티칸에서 준비한 메르세데스벤츠 차량 대신 작은 폴크스바겐 차량을 타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즉위 이후 아침 미사에 가장 먼저 초청한 이는 바티칸의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이었다. 인터넷 매체 는 지난해 교황청을 경비하는 스위스 근위대 관계자의 말을 빌려 “교황 프란치스코는 가끔 밤에 평사제복으로 갈아입고 외출할 때가 있다. 로마 시내의 노숙인들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보도했다.

■ 참고 문헌 (김근수·메디치미디어·2014), (주원준·궁리·2014), ‘올해의 세계인 교황 프란치스코’(정인환, 2013년 12월24일치), ‘20년 지기 문한림 주교가 본 프란치스코 교황’(조현, 2014년 2월19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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