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의 국민이 동의하는지 계량화가 힘든 ‘국민 검사’란 비과학적 칭호는 위험한 유혹을 키웠다. 지지층 확대를 위해 잘 포장된 이미지를 활용하고 싶은 정권의 속성. 국민 검사를 넘어 더 큰 권력에 다가서려는 개인적 욕망.
‘2012년 8월27일’은 그 속성과 욕망이 한 그릇에 뒤섞인 날이다. 대법원을 나온 지 48일밖에 되지 않은 전직 대법관이 사법부 독립의 가치를 헌법 조항에만 묶어놓은 채 정치권력의 손짓에 달려간 순간으로 기록된 날이다. 새누리당은 대통령 선거를 4개월 앞둔 이날 박근혜 대선캠프 정치쇄신특별위원장으로 안대희 전 대법관을 영입했다. 영입 발표 직후 안 전 대법관은 전화를 건 취재진에게 “당사로 가서 (결심 배경을) 설명하려 한다. 그런데 내가 당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라며 웃음을 짓기도 했다. 차를 타고 낯선 여의도 공간으로 향한 그때부터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 낙마 사태’의 징후가 움트고 있었다는 걸 그는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2012년 8월27일, 그 징후박근혜 대통령이 5월22일 발표한 ‘안대희 국무총리 지명’은 세월호 참사를 수습하려는 일종의 승부수였다. 검사·대법관 출신인 그에게 개혁의 칼을 쥐어주며 난국을 돌파하려 한 것이다. 그를 잘 아는 법조계에선 “안대희가 대권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것”이라 평하기까지 했다. 대법관 시절 사석에서 “대법관이 공직의 마지막이 돼야 한다”고 했다던 소신까지 허문 데 대한 비판을 감수하겠다는 것은, 그만한 반대급부를 얻기 위한 목표지향성이 뚜렷하기 때문이라는 시각이었다. 이 모든 평들은 ‘황제 전관예우성 고액 변호사 수입’ ‘안대희=슈퍼 법피아(법조계+모피아)’ 논란이 불거진 뒤엔 밥 먹은 배나 꺼뜨리는 공허한 소리처럼 부질없는 말들이 됐다.
그가 주저앉기 시작한 건, 변호사 개업을 한 2013년 7월부터 5개월간 16억원을 번 수입 규모가 알려지면서다. 당장 일당 1천만원이 넘는다는 셈법이 튀어나오면서 시민들의 감정에 불을 지폈다. ‘안대희도 검사·대법관이란 공직 경력을 결국 자신의 수익 창출에 활용하는 별수 없는 인물’이란 실망감이 퍼졌다. 특히 전관예우 논란의 당사자는 ‘관피아(퇴직관료 부정부패) 척결’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비판론이 덩치를 키워갔다. 안 전 대법관의 검사 시절을 비교적 좋게 평가하는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도 “(안 전 대법관의) 전관예우는 참으로 실망스럽다”고 지적했다. 새누리당 당직자는 안대희를 밀어올린 ‘국민 검사’란 강직·청렴성 상징의 칭호가 그를 순식간에 끌어내린 덫이 됐다고 말한다.
“안대희 같은 사람은 조금만 얼룩이 있어도 더 크게 보이는 법이다. (더군다나) 연간 1천만원도 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하루 1천만원 수입이 (국민 정서에) 어떻게 비치겠나?”
공직 수행에 걸림돌이 될 요소들을 얼씬 못하게 할 이미지의 그가 전관예우성 고액 수임을 방치한 이유는 뭘까. 안 전 대법관의 처신을 최대한 이해하려는 법조계 쪽 인사의 생각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총리 등 고위 공직 제의가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을 것이다. 제의가 오더라도 박근혜 정부 후반기에 오지 않을까 생각했을 수 있다. 그 전에 가족 등을 위해 변호 업무로 돈을 좀 번 뒤, 이후에 공직 수행 준비를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대법관 임기 중반에 예금 크게 늘어하지만 안 전 대법관이 5월26일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11억원 기부’는 수습은커녕 퇴로 없는 궁지로 자신을 가두는 꼴이 됐다. 그는 회견에서 “국민 정서에 비춰봐도 변호사 활동을 한 이후 약 1년 동안(정확히는 10개월) 늘어난 재산 11억여원도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것까지 사회에 모두 환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개혁은 나부터 하겠다”는 의지도 비쳤다.
이는 곧 “돈으로 공직을 사려 한다”는 매관매직론, “기부금으로 총리가 되려 한다”는 기부총리제 따위의 비아냥과, “전관예우 문제를 면죄부 받으려는 정치적 기부”라는 더 큰 비판에 부닥쳤다. ‘(세금 등을 빼고) 변호사 활동으로 늘어난 재산이 11억원’이라고 그가 회견에서 밝힌 내용은, 오히려 10개월간 번 총수입이 최소 27억원이라는 사실을 언론이 찾아내는 단초가 됐다. 그가 이미 기부했다는 4억7천만원 중 3억원은 정홍원 총리가 사의 표명을 한 뒤 이뤄졌다는 점에서 기부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눈도 많아졌다. 야권에선 그가 대법관 임기 중반을 넘어선 2009년 말부터 2년간 급여에 비해 예금이 크게 늘어난 점을 지목하며, “대법관의 특정업무경비를 유용해 개인 재산 축적에 쓴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국세청 세무조사감독위원장을 하면서 기업 법인세 소송을 맡는 등 기존 이미지를 허무는 사실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따라나왔다. 생태계를 훼손하는 4대강 공사와, 이 사업을 이윤 추구로 활용한 기업을 향한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4대강 공사 입찰 담합 비리에 개입한 기업 간부까지 변론한 것도 정서적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5월28일 오후 4시39분께 기자회견을 자청하는 문자메시지를 언론에 돌릴 때만 해도, “여러 논란을 해명하려는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오후 5시 마이크 앞에 선 그는 “저는 오늘 국무총리 후보직에서 사퇴한다”며 회견문을 읽어갔다. 지명 엿새 만에 후보직에서 내려오는 순간이었다. 이날 아침까지만 해도 “우리가 도와줄 테니 잘 버티라”는 새누리당 인사들의 격려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오후 4시30분께 그는 참모진을 불러 “가족들, 사건 의뢰인들, 지인들이 너무 괴로워한다”며 사퇴 결심을 밝혔다. 청와대에는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연락해 결심을 전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치권과 법조계에선 국민의 눈높이가 자신을 둘러싼 논란을 양해해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총리직에 대한 미련을 놓은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도 명예를 중시해온 그의 인생 전반이 거부당하는 듯한 현 상황을 지켜볼 수 없다는 자존심의 발현, 가족의 고통을 묵과할 수 없다는 생각도 결심의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직언하겠다”에서 “심려 끼쳐 죄송하다”박근혜 2기 내각의 구원투수로 올랐다가 공도 뿌리기 전에 국민적 정서를 넘지 못하고 강판당한 그는 내놓겠다던 11억원의 기부는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혹여 이런 그의 처지를 딱히 여긴 보수 지지층들이 그의 정치적 재기를 도울 수 있을까?
야권의 전략통으로 불리는 한 의원은 이렇게 전망했다. “국무총리에서 낙마한 사람이 정치적으로 재기한 것을 보지 못했다. 안 전 대법관의 성격도 대쪽 같은 면이 있지 않나. 글쎄, 그가 정치 쪽에 다시 기웃거릴까? 미안하지만, 정치적 수명은 다한 듯 보인다.”
총리로 지명된 직후 “대통령에게 직언하겠다”던 그였지만, 사퇴 기자회견에선 “대통령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만 남기고 퇴장했다. 2012년 8월27일, ‘안대희 전 대법관’이 위치조차 몰랐다던 새누리당 당사로 향하며 머릿속에 그린 자신의 미래는 이게 아니었을 테지만.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달 그림자” 윤 궤변에…국힘서도 “손바닥에 ‘왕’ 써도 하늘 못 가려”
[단독] ‘체포 시도’ 여인형 메모에 ‘디올백 최재영’ 있었다
중국의 보복관세는 왜 하필 석유·석탄일까
국내 첫 ‘철도 위 콤팩트시티’…남양주 다산 새도시에 건설
특전사, 내란 9개월 전 ‘국회 헬기 착륙 장소’ 점검했다
[단독] 대답하라고 ‘악쓴’ 윤석열…“총 쏴서라도 끌어낼 수 있나? 어? 어?”
2월 6일 한겨레 그림판
‘부정선거 주장’ 황교안 전 총리, 윤석열 변호인단 합류
15억 인조잔디 5분 만에 쑥대밭 만든 드리프트…돈은 준비됐겠지
“급한 일 해결” 이진숙, 방송장악 재개?…MBC 등 재허가 앞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