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 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쇼맨십의 남자’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전에서 이긴 뒤 훈련장 가운데에서 사진기자들을 위해 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눈을 감는 동작을 취하는 식이다. 그 순간, ‘8강 승리 음미, 4강 승리를 기원하는 히딩크’로 해석될 모습이 카메라 렌즈에 잡힌다. 하지만 그가 당장의 승리, 단기적 쇼맨십만을 극대화하는 데 몰두했다면, 2001년 5월 프랑스에 0-5로 져 ‘오대영 감독’이란 비난이 쏟아진 이후 과감한 선수 실험, 체력 강화라는 장기적 훈련 프로그램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을지 모른다. 폴란드와의 월드컵 1차전 전날, 히딩크는 선수들을 한 명씩 방으로 불러 그간의 체력 상승 자료를 보여주며 “넌 지금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 선수보다 낫다”고 자신감을 심어줬다. 김남일이 상대 선수에게 포위되기 전에 박지성이 공을 받아줄 위치로 쉼없이 이동해 우리 선수의 고립을 풀어주던 희생과 체력은 히딩크의 근본적 체질 개선의 효과였다.
부정부패 척결 정도로 협소화하더니전관예우 논란으로 지명 엿새 만에 이뤄진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 사퇴’는 박근혜 대통령의 단기적 국면 전환의 승부수가 빚어낸 인사 참사였다는 비판이 많다. ‘법조인 안대희 지명’은 세월호 참사 이후 자본 탐욕사회에서 사람 중심, 공공성 중시 사회로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달리, 대통령이 우리 사회의 방향을 ‘부정부패 척결’ 정도로 협소화한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강직 검사 이미지를 가진 ‘안대희 카드’가 ‘관피아(관료 마피아) 적폐 해소’의 더없는 맞춤형으로 보였을 것이며, 그러다보니 청와대가 그의 대법관 퇴임 이후 전관예우성 고액 수입의 문제점에 둔감했을 거란 얘기다.
시중엔 안대희 낙마 사태로 박 대통령이 얻은 유일한 소득이라면 ‘뜬구름 잡는 개념’ 같던 ‘창조경제’의 활용 사례를 국민에게 알려준 점이라는 냉소까지 나온다. 어찌됐든 검사장·대법관 출신(안대희)이 전관예우로 얻어 곳간에 묵혀둔 이득 11억원을 사회에 추가 기부하도록 만들었으니, ‘이야말로 창조경제 성과의 본보기가 아니냐’는 조소 섞인 비판이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전관예우가 관피아의 핵심인데, 청와대는 인사 검증할 때 도대체 뭘 한 것이냐”고 개탄했다. 당내 다른 인사는 “개혁 총리 이미지가 아니라 지금은 국민을 감싸안는 화합형 총리로 가면 좋았을 텐데 대통령이 거꾸로 갔다. 국민과 싸우려 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최재천 새정치민주연합 전략홍보본부장은 청와대와 내각이 ‘법전 실증주의자’로 채워질 위험성을 우려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이미 사퇴 의사를 밝힌 정홍원 국무총리에 이어 낙마한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까지 모두 검찰 출신이기 때문이다.
“왕조시대의 과거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듯, 사법시험 출신들만이 한국 사회의 엘리트라 생각하는 인재 선발 방식의 대전환이 없으면 대통령 인사는 계속 질곡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를 형식적 법치주의에 맡겨선 안 되며, (국가 형벌 중심의) 형사법주의를 법치주의와 동일시하는 것도 위험하다.”
참여정부에서 고위 공직자 인사 검증에 관여한 관계자는 ‘안대희 낙마’를 박 대통령의 ‘수첩인사’로 상징되는 하달식 인사 관행의 필연적 결과로 보았다.
“참여정부에선 인사수석실이 인사를 추천하면 민정수석실에서 해당 인사를 검증했다. 그런 뒤 인사위원회를 열어 추천하는 이유와 검증한 내용이 맞는지 살폈고, 문제가 있으면 논쟁을 벌였다. 이렇게 해도 일부 펑크(문제)가 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위정자의 눈높이에 맞춰 뽑다보니 (실무진의) 검증도 대통령의 위세에 눌려 기능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지금처럼 세월호 참사 이후라면 상식적으로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사람을 추천하고 검증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1인 통치 위험성이 정면으로‘안대희 지명’이 효력을 잃으면서 박 대통령이 정부 출범 이후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개혁의 칼’로 내세운 안대희 총리 후보자가 ‘황제 전관예우’의 올가미에 걸리면서, 대통령이 강조한 ‘관피아 해결=국가 개조의 핵심’의 진정성마저 궁색해졌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승부수가 자충수가 된 셈이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국민 중심이 아닌 자기 중심적 국면 전환을 시도하다보니 문제가 도미노처럼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수도권 재선 의원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선 대통령 책임과 정부의 총체적 무능이 뒤섞여 있었다면, 안대희 총리 후보자 지명은 대통령이 직접 한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받는 정치적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재천 본부장은 “대통령의 1인 통치 위험성이 정면으로 드러나고 있다. 헌정사적으로 위험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안대희 전 대법관이 총리 후보자에서 사퇴한 직후, 박 대통령이 “안타깝다”는 반응을 청와대 대변인의 입을 통해 전한 것도 국민 정서와 괴리된 안일한 인식이란 지적이 적지 않다.
충청권의 한 의원은 “안대희 후보자 사퇴를 보고 ‘안타깝다’고 말한 것에 (대통령의 소통력) 문제의 본질이 있다.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도 하지 못하고 중도사퇴하면 대통령이 ‘내 잘못이다, 죄송하다, 책임지겠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이게 왜 대통령이 안타까워할 일인가? 국민이 안타까워할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국민의 심경을 헤아리는 대통령의 언어로는 부적절했다는 얘기다.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다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향해 조준선을 정렬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직후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물러나는 판국에도 김 실장만은 책상을 빼지 않았다. 하지만 김 실장이 안대희 후보자 지명에 깊숙이 관여한 청와대 인사추천위원회 위원장이란 점에서 그의 책임론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불거지고 있다. 여권에서도 정권의 부담을 터는 차원에서 박 대통령이 김 실장의 손을 놓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국회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특별위원회 여당 간사인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은 “총리 후보자가 스스로 사퇴할 정도가 됐는데 인사위원장(김기춘 실장)이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6·4 선거 뒤 부실 내각 개편 이루어지면국회부의장 출신인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김기춘 비서실장의 책임이 결정적”이라고 했다. 문 의원은 참여정부에서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박근혜 대통령이 관피아 등을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 문제로 얘기했고, 그 고리를 끓을 사람으로 안대희 후보자를 내세웠다. 그런데 그 의도에 맞지 않게 후보자의 전관예우 문제가 드러났다. 이건 인사위원장인 비서실장이 (관피아 해결이라는) 대통령의 의도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김기춘 비서실장의 책임이 크다.”
그는 “대통령이 율사, 육사 출신을 선호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통치술에 가깝다. 대통령이 김기춘 실장을 계속 붙잡는 것은 박 대통령의 몸에 유신적 통치술이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교수는 김 실장의 결단이 대통령의 권력 누수(레임덕)를 조금이라도 줄여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 “대통령이 임기 중반을 잘 넘겨서 레임덕을 최대한 임기 말로 연장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시점이다. 대통령이 청와대 조직 등 여론의 비판이 가장 많았던 부분부터 정비해야 한다. 김기춘 실장은 본인으로선 (야권의 비판 등이) 억울할지 몰라도 정치를 하다보면 책임져야 할 시점도 있는 것이다.” ‘김기춘 책임론’을 거론하는 여론이 비등점을 넘어 뜨겁게 끓는 분위기를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권에선 박근혜 정부가 ① 세월호 참사 정부 무능론 대두 → ② 안대희 후보자 임명·조기 사퇴 → ③ 6·4 지방선거 여권 패배→ ④ 부실한 수준의 청와대·내각 개편→ ⑤ 또 다른 부적격 인물 인사 → ⑥ 국정 기조 불변 등의 수순을 밟는다면 국정 운영의 동력을 상당 부분 잃을 것이라고 점친다. 따라서 박 대통령이 최소 ‘④~⑥번’의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국민과의 소통 부재, 야당 무시, 기업 이익을 위한 규제 철폐 강화, 안전·안보를 담보로 한 공안 분위기 공고화의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를 ‘반대파들이 짖는 아우성’으로 치부하면 안 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는 “지금 국민의 관심사는 대통령이 어떻게 바뀌느냐다. 통치 스타일의 변화 없이 총리만 바뀐다면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 입는 이상이 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국정 운영 방식을 전면적으로 전환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정치 흐름을 잘 짚는다는 평을 받는 야권의 한 의원과의 문답이다.
-바로 김기춘 실장을 문책할까?=“지금 대통령은 허허벌판에 있는 느낌일 것이다. 안대희 후보자까지 낙마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일 수 있다. 김기춘 실장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아졌을 것이다. 김 실장을 바꾸더라도, (청와대·내각) 인사를 어느 정도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지 않겠나.”
-대통령은 국정 운영 기조를 바꿀까?=“5월19일 대국민 담화를 하면서 국가 개조 등 국정 운영 기조를 발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과연 바꿀까? 국정 운영 기조를 바꾸는 게 아니라 국정 운영 기조를 잘 대변할 인물을 찾는 데 집중할 것이다. 다시 ‘칼잡이’(관피아 척결 등)를 찾고 싶겠지만 안대희만 한 사람이 없어서 고민할 것이다.”
‘요때’가 제일 좋은 시점그의 전망은 대통령의 변화를 바라는 이들에게 암울한 얘기로 들린다. 그래서 5선 의원인 문희상 의원은 이런 당부를 박 대통령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 그는 옛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 시절이던 2013년 4월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박 대통령에게 부실 인사를 지적하면서도 안보·민생 분야 등에서 야당의 협조를 약속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 문 위원장의 생일을 만찬 자리에서 챙겨주기도 했다.
“대통령의 통치 방향 전환, 근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요때’(이때)가 제일 좋은 시점이다. 지금을 놓치면 바로 레임덕이 올 수 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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