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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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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 우리 갈 데까지 가보자

공식 선거운동 첫날 인사 개편, 김장수·남재준 사표 수리했지만 김기춘 실장은 그대로…
‘국가개조론’ 기치 아래 인적 개편안에는 세월호가 준 교훈 없어
등록 2014-05-27 17:44 수정 2020-05-03 04:27
안대희 전 대법관(왼쪽)이 5월22일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뒤 정부서울청사 회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정치권에선 박 대통령이 김기춘 비서실장을 살리기 위해 남재준 국가정보원장(가운데)과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오른쪽)을 사퇴시켰다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사진공동취재단, 인수위사진기자단

안대희 전 대법관(왼쪽)이 5월22일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뒤 정부서울청사 회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정치권에선 박 대통령이 김기춘 비서실장을 살리기 위해 남재준 국가정보원장(가운데)과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오른쪽)을 사퇴시켰다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사진공동취재단, 인수위사진기자단

‘김기춘, 갈 데까지 가보자.’

구원파 신도들은 검찰이 세월호 실소유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을 잡으려 하자 이런 현수막으로 맞섰다. ‘유병언 수호’를 위한 격앙된 신도들의 인의 장막에까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이름이 등장한 것이 흥미롭다. 커튼 뒤 청와대 권력으로 불리는 그가 박근혜 정부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 풍경이다. 그는 야권에서 물러나야 할 ‘5적 중 핵심’으로 지목받아왔다. 박 대통령의 불통과 독선을 강화하는 인물이란 이유에서다.

대통령 언어로 응답한 총리 지명자

박근혜 대통령이 5월22일 발표한 일부 인적 개편은 검찰 출신 안대희 전 대법관의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과, 세월호 참사에서도 박 대통령이 끈질기게 놓지 않은 김기춘 실장의 건재로 요약된다. ‘안대희 총리’는 해경 해체라는 충격요법으로 상징되는 대통령 대국민 담화(5월19일)에 이은 세월호 참사 정국 수습 2차 카드다.


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일에 맞춰 인사 개편이 발표된 ‘시점의 공교로움’ 탓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핵심 전략참모는 “인적 쇄신을 통해 충격을 주고 대통령의 책임을 제외한 채 정국을 돌파하려는 흐름으로 읽힌다”고 말했다.


여권 내부에서 “세월호 참사가 아니었다면 이 시점에서 안대희 총리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듯, 박 대통령과 안 후보자의 ‘심적 거리’는 가깝지 않았다. 안 후보자는 대법관을 마친 직후인 2012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을 당시 박근혜 후보가 나라종금 비리 사건에 연루됐던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를 캠프에 영입하자 강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 당선 뒤엔 권력 바깥 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박 대통령이 이런 그를 2기 내각의 대표로 내세운 것은 우리 사회의 적폐를 끊겠다는 자신의 의지가 ‘정치인이 아닌 강직 검사 안대희’의 이미지와 접점을 이뤄 상승효과를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안 후보자는 2003년 대검 중수부장 시절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맡아 사법시험 동기인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측근과 당시 한나라당 의원 등을 구속해 팬클럽까지 생기는 대중적 지지를 받은 바 있다. ‘안대희 기용’은 박 대통령이 다급한 상황에 몰려 있음을 자인한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안 후보자는 대통령의 기대에 화답하듯 지명을 받자마자 “비정상적 관행의 제거와 부정부패 척결을 통해 공직사회를 혁신하겠다. 국가 개조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즐겨 쓰는 언어(비정상, 척결, 국가 개조)의 조각들을 문장으로 조합한 다짐이다. 청와대는 6·4 지방선거 이후 안 후보자의 청문회가 끝나면 총리의 제청을 받아 장관 교체 등 2기 내각 개편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안 후보자 지명과 함께, 정보·안보 분야의 핵심인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사표도 수리했다. 국정원의 지난 대선 개입 사건이 불거지자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을 무단 공개했고, 간첩 사건 증거를 조작하는 등 국정원의 초법적 국기 문란이 정국을 어지럽힐 때도 포기하지 않던 남재준 원장 카드를 김장수 실장과 한 묶음으로 내보냈다. 국가안보, 국민의 생명과 연결된 대형 참사를 당하고도, 국정원이 청와대의 기민한 판단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비판적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두고 여권의 한 인사는 “세월호 참사 이전에 남 원장의 해임을 야권과 시민사회가 숱하게 주장할 때 수용했더라면,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모양새라도 취하면서 야권에 정국 협조를 당부하는 카드로 활용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꼬집었다.

이정현 홍보수석, 문고리 권력 그리고

김장수 실장의 사표 수리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청와대 무능론이 일자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발언한 데 대한 문책으로 풀이된다.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 수백 명의 목숨을 죽였다’는 정부의 ‘부작위 살인론’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김 실장이 겸허한 태도를 취하기는커녕 여론을 격앙시킨 데 대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일성으로 국가 개조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 같다. 유신 시절 헌법에 나오는 통치권의 개념을 되살리고 있다. 이번 참사는 이윤 추구의 결과가 참극을 빚어낸 것인데, 대통령은 자본의 문제를 전혀 얘기하지 않는다.” -권영숙 서울대 교수


이번 조처는 정부를 일신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 표출로 볼 수 있지만, 정치권에선 6·4 지방선거를 앞둔 정국 전환 시도라는 정무적 판단도 깔려 있다고 본다. 지방선거 공식 선거운동일에 맞춰 인사 개편이 발표된 ‘시점의 공교로움’ 탓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핵심 전략참모는 “인적 쇄신을 통해 충격을 주고 대통령의 책임을 제외한 채 정국을 돌파하려는 흐름으로 읽힌다”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선 무당층으로 빠져나와 관망하던 유권자들이 ‘그 정도면 수습의 노력이 보인다’며 다시 새누리당 지지로 결집할 가능성을 우려한다. 당장 공식 선거운동일 첫날 “이제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드릴 때”(최경환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라는 발언이 공개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대희 지명, 남재준·김장수 교체’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란 지적도 많다. 왕실장, 부통령, 기춘대원군으로까지 불리는 ‘김기춘 유임’의 무게 때문이다. 여기에 KBS 보도통제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받는 이정현 홍보수석, 박 대통령의 의원 시절부터 청와대까지 함께해온 측근 보좌관들의 ‘문고리 권력’이 교체되지 않는 한 대통령의 불통은 여전할 것이란 얘기다. 여권 내부 다른 인사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보고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면 비서실장의 책임도 크다. 지금 공영방송 기자·PD들이 저 난리인데 이정현 수석을 그대로 놔두나? 김기춘 실장, 이정현 수석, 문고리 3인방이 그대로 있다면, 대통령한테 직언하겠다는 안대희라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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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이 김 실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에 대한 신뢰와 의존도 모두 높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김 실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박근혜 대통령까지 박 대통령 집안과 긴 인연을 맺어왔다. 그는 서울대 법대 대학원 시절에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 장학금을 받았고, 1971년 검사 시절 민주주의 후퇴의 상징인 유신헌법 기초 작업에 참여했으며, 1974년 박근혜 대통령의 모친 ‘육영수 피격 사건’의 범인 문세광 수사 등을 맡았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국민의 눈물을 닦아야 할 시점인데, 오히려 양손(내각·청와대)에 칼(검찰 출신)을 들고 통치하겠다는 의미다. 김기춘 실장의 교체가 없는 개각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검사 출신의 비서실장과 국무총리 지명자를 두고 하는 얘기다.

정치권에는 사건을 파헤치던 검찰 출신 안대희 후보자가 과연 서민들까지 아우르는 사회 통합형 행보를 보여줄 수 있느냐는 의문도 있다. 법조계에선 “표현의 자유·권리, 국가 질서라는 두 사안이 충돌하는 사건에서 법조인 안대희는 국가 질서를 중요시했던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도 내놓는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이 바뀌지 않는 한, 몇 사람 교체는 통증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하는 진통제 투여식 단기 처방에 그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책임 규명과 광범위한 원인 조사가 선행되지 않은 채 해경 해체, 국가안전처 신설, 공무원 채용 방식 변화, 관피아(관료+마피아) 척결 등을 내놓고, ‘이것이 국가 개조’라고 강변하는 대통령의 인식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이번 사고를 계기로 안전 대한민국을 만든다면 새로운 역사로 기록될 수 있다. 그 막중한 책임이 국민 모두에게 주어져 있다”며 국민의 동참도 당부했다.

정우영 시인은 국가 개조가 ‘국민 개조’라는 통치적 언사로 들렸다고 말했다. “말문이 막힌다는 말이 있는데 문인들은 이번 참사를 겪으며 ‘글문이 막혔다’는 사람이 많았다. 글을 쓰려고 하면 수장당한 아이들의 모습과 소리 때문에 손이 떨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담화에선 본질적 성찰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 참사는 국가라는 조직이 재난에 대처하지 못한 것이다. 책임의 주체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말하지 않고, 객체인 국민에게 ‘책임이 모두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말로는 국가 개조이지만, 난 그것이 국민 개조로 들렸다.”

세월호 외에도 방치된 죽음들

권영숙 서울대 교수는 “국가 개조는 국가 안전을 담보로 이 정부가 공안적으로 사회를 재구조화하고, 권력과 체제를 더욱 공고화하려는 발상이 엿보인다”고 했다. 그는 이윤을 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 탐욕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박 대통령이 국가 개조라고 내놓은 대책은 ‘앙상한 형식주의’에 불과하다고 짚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일성으로 국가 개조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 같다. 유신 시절 헌법에 나오는 통치권의 개념을 되살리고 있다. 국가 개조는 우리(시민)에게 (위험한) 덫이다. 이번 참사는 이윤 추구의 결과가 참극을 빚어낸 것인데, 대통령은 자본의 문제를 전혀 얘기하지 않는다. 규제 등을 푸는 신자유주의적 국가정책, 국가가 담당해야 할 공공의 영역까지 민영화한 것, 노동 불안정의 문제 등을 말하지 않는다.”

권 교수는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우리 사회에 방치된 다른 죽음들로 확장하지 않으면 비극적 참사는 멈추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월호 참상을 보면서 어처구니없이 죽음이 방치되는 것에 우리가 분노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구조되지 못하는 다른 방치된 죽음이 많다. 1년에 2천 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고, 장애인이 화재가 나도 (피하지 못하고) 불에 타죽고 있다. 세월호의 참상과 그들의 죽음과의 거리를 좁혀 (원인의) 일치성을 이해할 때만이 또 다른 세월호의 참극을 막을 수 있다.”

문짝만 바꾸고 집을 개조했다

이도흠 한양대 교수는 박 대통령의 조처들이 ‘문짝만 바꾸고는 집을 개조했다’며 말하는 과장과 같다고 지적했다.

“자, 사람 몇 바꾸고 해경 해체하는 등 집의 문고리, 문짝 하나 바꾸고 집을 개조했다고 하면 개조한 것이냐. 돈과 효율성이 생명·인권을 능가한 문제에 대해선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생색내기일 뿐이다. 적어도 국가 개조란 말을 쓰려면 검찰 등 권력기관 독립, 공영방송 문제 등 언론 자유 보장이 이뤄져야 한다.”

유경근 세월호 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 대변인도 최근 한 토론회에서 대통령의 인식 전환을 요구했다. 그는 수많은 말들로 채워진 대국민 담화가 오히려 국정철학의 빈곤함을 드러냈다고 보았다.

“대국민 담화에 이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가겠다는 정도의 철학이 담길 줄 알았다. 그런데 담화엔 (지금까지) 다 드러난 현상에 대한 개선만 있고, 근본적인 진단이 없었다. 우리가 누차 발표했지만 생명보다 돈과 이윤을 항상 첫 번째로 두는 자본주의가 이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에 이런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근본 처방이 없으면 앞으로도 더 큰 사고가 필연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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