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오스트레일리아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 국회 청문회에서는 투자자-국가 소송제(ISD)가 주요 쟁점으로 다뤄질 예정이다.”
지난 5월2일 시드니에서 과 만난 ‘오스트레일리아 공정무역·투자 네트워크’(AFTINET)의 퍼트리샤 래널드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2004년 미국과 FTA를 맺으면서 ISD를 협정문에서 제외했다. 미국 기업이 부당한 권력을 갖게 된다는 이유를 들어 의회가 반대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10년 만에 ISD를 포함한 FTA를 한국과 체결했다. 노동당이 다수당인 상원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불붙을 것이다.” ISD는 상대국이 투자협정상 의무를 위반해 외국 투자자가 손실을 입었을 경우 그 투자자가 상대국을 상대로 국제중재를 청구하는 제도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0년 전부터 ISD에 부정적이었다. 2003년 11월 상원 외교안보통상 자문위원회가 내놓은 미-오스트레일리아 FTA 보고서를 보자.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란 기본적으로 ‘상업적 분쟁 조정’을 모델로 한 것이어서 절차의 투명성이라는 기본 원칙을 갖추지 못했다. 정부의 규제에 도전할 수 있을 만한 부당한 권력을 미국 투자자(기업)에 넘겨주게 될 것으로 우려된다.” 오스트레일리아가 과거 다른 나라들과 ISD가 포함된 투자보장협정(BIT)을 맺은 적이 있지만, 이는 개발도상국에 국한된 협정이었다. ISD 분야의 ‘최고 우등생’인 미국 투자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2014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보고서를 보면, 568건의 ISD 사건 가운데 미국 투자자가 청구한 것이 127건(22%)에 달한다.
개발도상국에 국한된 협정이었는데2004년 1월 미국 워싱턴에서 벌인 최종 협상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대표단은 ISD를 제외한 채 FTA 협상을 마무리했다. 이후 2010년 4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신통상 정책’을 발표하면서 앞으로도 ISD를 채택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이러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정책 기조는 지난 4월8월 공식 서명한 한국과의 FTA에서 깨졌다.
4월29일 캔버라에서 열린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한-오스트레일리아 언론 교류 프로그램에서 만난 잰 애덤스 외교통상부 차관보의 배경 설명은 이렇다. “한국과의 FTA에서도 ISD 도입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반대했다. 환경·보건 규제를 강화할 때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서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ISD를 강력히 요구했다. 타결점을 찾지 못해 2011년 5월 이후 협상이 잠정 중단됐다. 지난해 오스트레일리아의 집권당이 노동당에서 자유당으로 바뀌면서 극적 변화가 생겼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원칙적으로 ISD에 반대하지만 ‘개별적으로’(case by case) 다르게 접근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과의 FTA에는 ISD가 들어갔지만 일본과의 FTA에는 ISD가 없도록 체결됐다.” 애덤스 차관보는 오스트레일리아 FTA 협상단을 이끌어왔다. 그는 “보건 분야만큼은 양국 정부가 자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금연 정책, 필립모리스 ISD 소송에 제동보건 정책의 자율성을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오스트레일리아가 뼈아픈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담배회사 필립모리스가 2011년 6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를 상대로 ISD 소송을 제기해서다. 강력한 금연 정책인 ‘담배단순포장법’을 추진한다는 이유에서다. 미국과의 FTA에는 ISD가 빠져 있지만, 1993년 홍콩과 맺은 BIT를 근거로 필립모리스 홍콩 지사를 통해 ISD를 청구했다.
담배단순포장법이란 담뱃갑에 상표와 회사 로고, 광고 문구를 빼고 회사 이름만 쓰도록 한 법안이다. 회사 이름도 글씨와 색깔을 통일했다. 필립모리스는 지적재산권 침해라고 반발했다. 특히 담배 단순포장이 흡연율 감소 등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의회의 연구 보고서에서는 18살 이하의 청소년은 담뱃갑의 상표나 로고의 영향을 받아 흡연자가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담뱃갑 경고 그림 등은 세계보건기구(WHO)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이 권고하는 정책이기도 하다. 여론은 정부 편이었다. 2011년 설문조사에서 국민 59%가 법안 제정에 찬성했다. 결국 노동당과 자유당이 손잡고 2011년 11월 담배단순포장법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다국적 담배업계는 전세계로 비슷한 법안이 확산되지 않도록 적극 대응했다. 유럽·캐나다·뉴질랜드 등에서 이미 관심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필립모리스의 ISD 청구에 이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시장점유율이 높은 브리티시아메리칸토바코 등이 최고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담배단순포장법은 정당한 보상 없이 기업의 고유 자산인 지적재산권을 취득한 것이며, 이는 헌법이 보장한 재산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2012년 8월 최고재판소는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공공보건과 관련한 법률로 재산권을 제한한 것은 헌법 위반이 아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최고재판소의 법률적 판단에도 필립모리스는 법안 철회를 요구하며 ISD를 진행 중이다.
한국 법무부는 지난 4월 ‘투자자-국가소송(ISD) 최신 판정분석’을 펴내, 필립모리스의 ISD 청구를 “국가의 입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정의했다. “과거 중재판정례에서 주로 문제된 것은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정부의 인허가 조치나 행정 행위가 대부분이었으나, 최근 들어 투자유치국의 입법 행위, 즉 외국인 투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법률 제·개정을 문제 삼아 제기한 사례가 늘고 있다.”
론스타 첫 ISD 소송에 한국은 ‘자신감’최근 개발도상국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ISD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유럽연합(EU)은 미국과 FTA 협상을 진행하다 지난 1월 투자 분야 협상을 중단하고 여론 수렴에 들어갔다. 독일·프랑스 등 일부 회원국이 ISD가 다국적기업에 유리한 제도로 공공정책을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해서다.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독일 정부가 원전 폐쇄를 선언하자 이 원전에 투자했던 스웨덴 국영 에너지 기업인 바텐팔이 ISD를 제기한 바 있다. 인도네시아도 ISD가 포함된 67개 BIT를 종료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영국 광산기업 처칠이 인도네시아 정부를 상대로 수십억달러 규모의 ISD를 제기할 뜻을 밝혔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2012년 11월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에 첫 ISD 소송을 당했지만 여전히 ‘자신감’이 넘친다. 우태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실장은 지난 4월10일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위원회 현안보고에서 ‘한-미 FTA ISD에 대한 민관 전문가 태스크포스(TF)’ 연구 결과를 공개했다. “한-미 FTA ISD는 투자자 보호와 국가 규제 권한 간에 균형을 이룬 형태다. 국내 법·제도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여러 안전장치를 마련해놨다. ISD를 전면 폐기하거나 핵심 조항을 개정하는 것은 국제적인 추세에 배치된다.”
캔버라·시드니(오스트레일리아)=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김민전에 “잠자는 백골공주” 비판 확산…본회의장서 또 쿨쿨
“‘내란 세력’ 선동 맞서 민주주의 지키자”…20만 시민 다시 광장에
‘내란 옹호’ 영 김 미 하원의원에 “전광훈 목사와 관계 밝혀라”
청소년들도 국힘 해체 시위 “백골단 사태에 나치 친위대 떠올라”
이진하 경호처 본부장 경찰 출석…‘강경파’ 김성훈 차장은 세번째 불응
경호처, ‘김건희 라인’ 지휘부로 체포 저지 나설 듯…“사병이냐” 내부 불만
연봉 지키려는 류희림, 직원과 대치…경찰 불러 4시간만에 ‘탈출’
천공 “국민저항권으로 국회 해산”…누리꾼들 “저 인간 잡자”
윤석열 지지자들 “좌파에 다 넘어가” “반국가세력 역내란”
‘적반하장’ 권성동 “한남동서 유혈 충돌하면 민주당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