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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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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풀면 투자 는다’는 위험한 확신

박근혜 정부가 규제 개혁에 목매는 진짜 이유
‘4% 성장률’ 흔들리자 대기업 설비투자 늘리려 무리수
등록 2014-04-04 09:24 수정 2020-05-03 04:27

“규제 개혁이라고 쓰고, 일자리 창출이라고 읽는다.”(2월19일)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투자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은 규제 개혁뿐이다.”(2월25일)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갑자기 ‘규제 개혁’에 나라의 명운이 걸린 것처럼 몰아가는 이유는 결국 ‘474’ 때문이었다. 2017년까지 4%대 잠재성장률, 70% 고용률, 1인당 국민소득 4만달러 시대에 도달하겠다고 해서 474다. 어딘가 낯설지 않은 구호다. 이명박 정부 시절 목 놓아 부르던 ‘747’(7% 성장,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대 경제강국)의 변주곡처럼 들린다.

치밀한 각본에 따른 ‘한판 쇼’

처음부터 솔직했던 건 아니다. ‘경제대통령’을 자임하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 달리, 박근혜 정부의 출발점은 달랐다. 대선 때는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걸었고, 지난해만 하더라도 창조경제와 민생경제, 경제민주화라는 삼두마차를 통해 경제부흥을 이뤄내겠다(2013년 5월 ‘박근혜 정부 국정과제 추진계획’)고 약속했다. 그런데 집권 2년차에 들어서자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 140개 국정과제 중 137번 항목에 처박혀 있던 ‘부적절한 규제의 사전적 예방 및 규제 합리화’가 최고의 국정과제가 된 듯한 분위기다. 모든 정부 부처가 규제 개혁이라는 과제에 올인하고 있다. 오로지 경기 활성화와 일자리 늘리기를 향해 ‘앞으로 돌진’이다.

여기엔 영악한 노림수가 깔려 있다. 먼저 규제 개혁이라는 의제가 어떻게 국정을 단숨에 장악했는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3월20일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개혁 장관회의’는 애초 17일에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회의를 하루 앞둔 3월16일, 갑작스레 회의를 연기하라는 통보가 내려왔다. 행사 준비를 맡은 국무조정실에서도 우왕좌왕했다. 그러더니 중소기업체 대표, 자영업자 등을 초청하고 ‘끝장 토론’을 벌이기로 하는 등 회의 전체의 밑그림이 변경됐다. 무려 7시간 동안 진행된 회의는 KBS·MBC·SBS 지상파 3사는 물론이고 네이버·다음 등 인터넷 포털에서까지 생중계됐다.

회의 자체는 ‘쇼’였다. 미리 정해진 발언 순서에 따라 돼지갈빗집 사장, 관광호텔 투자개발회사 대표 등이 자신이 당한 규제의 불합리함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날것 그대로가 아니라, 미리 써온 원고를 읽는 방식이었다. 각 정부 부처 장관을 비롯한 공무원들은 준비된 답변에 충실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보신주의에 빠진 공무원들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다그치며 군기를 잡는 한편으론, “신속히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하며 ‘민원인’들을 살뜰히 챙기는 엄한 어머니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의 관심을 끌면서 정국과 공론장을 주도해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규제 개혁을 비즈니스 프렌들리로 비치게 했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일자리 창출과 민생 살리기, 공무원 개혁이라는 지점과 연결지음으로써 규제 개혁을 굉장히 개혁적인 어젠다로 구성해냈다. 앞으로 대기업 중심의 규제 완화로 간다고 하더라도 거부감이 덜 들도록 하는 여러 포석을 깔고 있는 조처다.” 김윤철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소장(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의 관전평이다. 지방선거를 앞둔 타이밍도 절묘했다.

이명박의 전봇대, 박근혜의 공인인증서

영악함은 전봇대와 공인인증서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탁상행정’의 생생한 사례로 전남 영암 대불국가산업단지에 있는 전봇대를 꼽으며 공무원들을 질타했다. 대불산단 도로변에 있는 전봇대 때문에 트럭으로 선박 철구조물인 대형 블록을 옮기기가 어려운데,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한국전력 등이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기업인들의 하소연을 이 대통령이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한마디에 ‘전봇대 뽑기’가 시작됐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드라마 ‘천송이 코트’를 한국 인터넷 쇼핑몰에서 사고 싶어 하는 중국인들을 예로 들며 공인인증서라는 이슈를 건드렸다. 공인인증서 폐지는 그동안 시민사회단체와 인터넷 업계가 줄기차게 주장해온 바다. 인터넷 결제 때마다 액티브X라는 벽에 가로막혀 짜증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일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푸드트럭, 자동차 튜닝, 택배 증차 등 3월20일 회의에서 언급된 다른 규제 개혁 과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업을 대변한다기보다는 자영업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기업인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불편함에 신경 쓴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액티브X나 공인인증서는 위장전술이다. 원격의료를 허용하고 분양가상한제를 폐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경제민주화와 관련한 규제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하지만, 서서히 풀려고 할 거다. 일감 몰아주기나 대기업 순환출자 금지, 대형마트 의무휴업제 등도 건드릴 걸로 본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의 말이다. 정부는 3월20일 밝힌 규제개혁 추진계획에서 신설 규제를 강하게 관리하겠다고 하면서도 ‘사회안전망 확보, 경제적 약자 보호 등의 규제는 제외’라는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의심을 완전히 거두긴 어렵다. 민관합동 규제개선추진단의 송재희 공동단장(중소기업중앙회 상근부회장)조차 “아직 경제민주화 관련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분위기는 없지만, 중소기업 쪽 입장에선 최근 일부 언론들이 대형마트 의무휴업제 등을 과도한 규제로 자꾸 언급하는 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규제실명제, 규제등록제, 규제총량제 등 역대 다른 대통령들도 집권 초기마다 규제 개혁을 늘 강조해왔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있을 때 얘기다. 당시 재경부(현재 기획재정부) 박병원 차관보가 업무보고를 하러 들어왔는데 규제 완화를 무슨 신비의 묘약인 것처럼 설명하더라. 대기업들이 투자를 늘리게 하려면 규제 완화면 다 된다는 논리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국민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의 회고다. ‘대기업아 대기업아, 규제 풀어줄 테니 투자해다오’는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모든 대통령이 항상 반복해온 레퍼토리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2007년 대선 후보 당시 내세웠던 공약이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은 세운다)였다. 지난 대선 때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로 바꿨다가 다시 줄푸세로 돌아간 걸로 본다. 규제를 암으로 규정한 걸 보니까 대대적인 줄푸세로 갈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금융위기만 봐도 알 수 있듯, 줄푸세로 간 정부는 국내외에서 다 실패했다. 더구나 한국은 세계에서 기업 하기 좋은 나라 7위다. 결코 규제가 많은 나라가 아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는 ‘규제 완화’는 필연적으로 실패한 정책이 될 걸로 내다본다.

기업 하기 좋은 세계 7위 국가인데…

실제 대기업들이 당장 투자를 늘릴 가능성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매출액 상위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올해 국내 투자계획을 조사한 결과, 133조원으로 지난해보다 6.1% 늘어나는 데 그쳤다. 지난해 국내 투자실적(125조원)이 목표치(129조원)보다 낮았던 것에 비춰, 실투자액은 이보다 더 낮아질 전망이다. 또 설비·건물 투자가 성장률을 조금 끌어올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고용 유발 효과는 크지 않다. 이명박 정부 때도 각종 규제 완화와 감세 등을 통해 친기업적인 정책을 폈지만, 기대했던 ‘낙수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중소기업 간 격차와 소득불평등은 더 심해졌다. 정태인 원장은 “정부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3.9%로 내놨지만, 민간 소비가 위축돼 있어 성장률은 2%대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걸로 보인다. 그러니 정부가 설비투자를 늘려서 목표치를 달성하겠다는 계산”이라고 말했다. 정 원장은 규제 개혁의 핵심은 ‘공공서비스산업’의 빗장을 풀어주는 작업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덧붙였다.

지금까지 규제 개혁에 성공한 정부는 없었다. 지금까지 규제 완화로 경제 살리기에 성공한 정부도 없었다. 박근혜 정부가 아무리 규제 개혁이라고 써도, 규제 완화라고 읽히는 이유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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