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놓아드리겠습니다.” 한 정치인이 선거 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켜보던 한 노인이 중얼거렸다. “우리 마을엔 강이 없는데…. ” 정치인은 외쳤다. “그렇다면 강을 파드리겠습니다.”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공약,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일단 내놓고 보는 헛공약에 관한 우스갯소리다. 당선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거나 돈이 없다고 하면 그만이다. ‘빌 공’(空)자 공약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세월도 변하고 유권자도 변했다. 공약은 유권자가 후보를 선택하는 꼼꼼한 기준이다. 정치인의 책임성을 평가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마을 단위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주요 정책이 논의되는 대선에서는 더욱 그렇다. 경제민주화와 함께 복지가 시대정신으로 떠올랐던 지난해 대선에서 여야 후보들이 앞다퉈 복지 공약을 내놓고 실천을 약속한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적 복지 공약이던 기초연금 공약 축소가 9월26일 공식화됐다. 무상보육 실현, 4대 중증질환 진료비 100% 보장, 초등학생 방과 후 돌봄 서비스 확대 등의 공약도 줄줄이 축소되거나 이행이 불투명해졌다. ‘원칙과 신뢰’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왔다는 박 대통령의 이미지에도 금이 갔다. ‘먹튀 공약’ ‘공약 사기’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대한노인회의 환대, 그 뒤 10개월박 대통령이 처음 기초연금 지급 확대 공약을 꺼내놓은 건 지난해 11월5일 대한노인회를 방문한 자리에서다. ‘부양받는 노인에서 책임지는 노인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활동하고 있다는 대한노인회 회원에게 환대를 받았다. 행사장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렸고, 노인회 쪽은 “대한노인회관은 1972년 육영수 여사가 기증해주신 것으로 밖에 송덕비도 세워져 있다”며 고마워했다.
“특히 노후 소득 보장을 위해 기초연금을 도입하려 하고 있다. (국민)연금을 내지 않더라도 월 20만원 정도 보장받을 수 있고, (국민)연금을 든 분들도 (기초)연금을 받을 수 있기에 합하면 최저생계비가 넘는 소득이 보장된다.”
질의응답 시간에 노인회의 한 간부가 “전국적으로 만연되고 있는 복지 정책에 대해, 국가재정을 고려하지 않고 선심성 복지 정책을 남발하는 것은 자제돼야 한다. 젊은이들이 져야 할 부담과 국가 미래를 생각해 현실에 맞는 정책을 약속하는 게 바람직하다. 무엇보다 국가의 미래를 중요시하는 분인 만큼 진정 어린 복지 정책이 제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복지 정책 걱정을 하셨는데, 선거 때 선심성으로 남발하면 지키지 못해 정치 불신만 심해지고 후대에 빚을 남기게 된다.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책을 내놓을 때 예산부터 생각한다. 정책이 만들어질 때 재정 규모가 뒷받침될 수 있는가, 실효성이 있는가, 지속 가능한가를 따져 예산 정책을 만든다. 여태까지 약속을 함부로 못한다. 하면 모든 걸 걸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태까지 신뢰를 가장 큰 소신으로 정치를 해왔기에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았다.”
이처럼 확고한 약속 실천 다짐은 대선 기간 내내 되풀이됐다. “65살 이상 모든 어르신한테 내년부터 20만원의 연금을 드리겠다. …내가 공약을 발표할 때 재원 조달 방안을 함께 검토해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약은 아예 뺐다”(2012년 12월10일 대선 후보 2차 TV토론)고 말했다. ‘세상을 바꾸는 약속, 책임 있는 변화’라는 제목의 공약집에는 “기초연금은 도입 즉시 65살 이상 모든 어르신과 중증장애인에게 현재의 2배 지급”이라고 담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에는 “내가 공약을 발표할 때마다 재원이 어떻게 소요되며 이게 실현 가능하냐, 그것을 만든 분들이 피곤할 정도로 내가 또 따지고 또 따지고 그랬다”며 재원 확보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인수위 때부터 ‘공약 축소’ 징후모두 헛말이 됐다. 박 대통령은 지난 9월26일 국무회의에서 “그동안 저를 믿고 신뢰해주신 어르신들 모두에게 지급하지 못하는 결과가 생겨서 죄송한 마음”이라고 사과했다. 경기침체로 세수가 부족해졌다며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결코 공약의 포기는 아니다. 국민과의 약속인 공약은 지켜야 한다는 신념은 변함이 없다”며 ‘임기 내 이행’을 다시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복지 축소로 귀결된 박 대통령의 약속 위반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바다. 인수위원회 때부터 보편적 복지를 위한 재정 마련이 어렵다는 ‘현실론’이 제기되면서 공약 파기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런 분위기는 “대선 때는 공약을 얘기하는데, 이게 길게 설명할 수 없고 단명하게 나가는 캠페인이다. 선거 캠페인과 정책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이라는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의 3월 인사청문회 발언에서 “복지 축소는 세계적인 경향”이라는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의 9월24일 발언(CBS 라디오)으로 현실화했다. 야권이 “무능이거나 사기”라며 강력 반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병헌 민주당 대표는 “작년이나 올해나 경제는 똑같이 어렵다. 똑같은 상황에서 작년에는 가능했고, 선거가 끝난 올해는 불가능하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재정 불안은 대선 전부터 예상됐는데 이를 몰랐다면 무능한 것이고, 이를 알고도 기초연금 공약을 내걸었다면 사기라는 얘기다. 민주당은 대선 때 소득 하위 80%에게 단계적으로 기초연금을 확대해 2017년 2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공약하고, 이명박 정부 때 이뤄진 ‘부자 감세’ 철회를 재원 마련 방안으로 제시했지만, 박 대통령은 지하경제 양성화 등 추상적인 대책만 언급했다.
예산 국회 앞두고 감도는 전운더 큰 문제는 “임기 안에 반드시 실천하겠다”는 약속이 지켜질지도 의문이라는 점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8월 세제개편안 발표로 증세 논쟁이 불붙었을 때 ‘증세 없는 복지 확대’ 기조를 분명히 함으로써 결국 복지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이날 국무회의에서도 ‘경기 활성화’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 증세를 포함한 구체적인 재원 마련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사회적 합의를 위해 ‘국민대타협위원회’를 만들어 국민 의견을 수렴해나가겠다고 밝혔을 뿐이다.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은 사라졌다. 특히 유감스러운 것은 박 대통령 복지 공약 후퇴의 가장 큰 원인이 됐던 ‘증세 없는 복지’에 대한 성찰이나 사과가 전혀 없고 어떤 대안도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임기 내에 공약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얘기는 또 다른 부도수표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인 안철수 의원도 성명을 내어 “기초연금 공약은 지키지 않으면서 법인세 유지에만 소신을 지키는 것은 국민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돈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못하겠다는 식의 발상은 국민에 대한 도리도, 대책도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은 강도 파고 다리도 놓겠다고 약속했지만, 복지국가라는 강을 파겠다는 철학도, 다리를 놓겠다는 의지도 없는 셈이다. 돈이 없다고 핑계를 대면서도 ‘증세 없는 복지’라는 구호를 붙들고 있는 한, 박 대통령의 ‘약속 위반’은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박 대통령의 ‘축소된 기초연금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민주당은 박근혜 정부를 ‘공약 파기 거짓말 정권’으로 규정하고 정기국회에서 ‘예산 전쟁’을 예고했다. 국회선진화법 시행으로 야당의 협조 없이는 법안 처리가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그동안 박 대통령의 ‘야당 무시’ ‘정치 무시’로 대야 관계는 파탄 지경이고, 집권여당은 무력화했다. 새누리당은 이제 와 자신들이 주장해 만든 국회선진화법이 위헌 소지가 있다며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법 개정에 나섰다. 청와대의 명령을 무조건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서 짜낸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여야를 이렇게 만든 박 대통령을 두고 그동안 정치권 안팎에서는 ‘정치는 없고 통치만 존재한다’ ‘독선을 원칙으로 착각한다’ ‘야당이 뭐라 하든 내가 옳기 때문에 그대로 간다는 순교자 정치를 하고 있다’는 등의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3월 ‘대국민 담화 사건’과 9월16일 3자 회담은 박 대통령의 야당 무시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가 늦어지자 박 대통령은 ‘원안대로’ 통과시키라는 압박성 담화를 했다. 손으로 탁자를 칠 듯한 기세와 화를 참지 못한 목소리와 표정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됐다. 민주당은 “공포정치의 시작”이라고 논평했고, 새누리당 안에서도 “소름이 끼쳤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런 인식과 태도는 야당 대표의 노숙 투쟁에도 아랑곳없이 자기 할 말만 하고 끝낸 3자 회담에서도 되풀이됐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공약 축소를 사과하는 9월26일 국무회의 자리에서도 야당의 협조를 구하기보다 오히려 국회로 화살을 돌렸다. 박 대통령은 “경제 부흥과 일자리 창출을 통한 세수 확보는 대통령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치권과 국민이 다 함께 힘을 모아서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야 가능하다”면서도 외국인투자촉진법, 부동산 관련법 등 경제 활성화를 위한 법안들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분석실장은 “이번 복지 공약 논란으로 야당은 정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세를 펼 수 있는 소재를 얻었다. 박 대통령이 정책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야당의 협조가 불가피한 상황이므로, 원칙을 중시하는 대응보다 야당에 대한 실리적 접근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밀월 끝났다… 고공 지지율 얼마나 갈까박 대통령의 ‘고공 지지율’이 전환점을 맞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금까지 박 대통령은 ‘국회는 정쟁, 청와대는 민생’식으로 정치권과 거리를 두는 전략으로 지지율 효과를 본 측면이 있다. 그러나 3자 회담에서 야당과 대놓고 싸우는 모습이 드러나면서 지지율에 변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윤희웅 실장은 “박 대통령이 3자 회담에서 국가정보원 사건 등 여러 정치적 사안에 대해 직접 언급하면서 대중에게는 정치적 연루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번 복지 공약 문제는 대중이 박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평가하는 소재다. 임기 초반 기대감을 갖는 단계에서 이제는 정책을 구체적으로 평가하는 단계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의 내용, 그리고 이를 현실에 구현해내는 ‘정치’에 대한 대중의 평가가 이제 시작됐다는 얘기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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