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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20일 서울구치소 오전 11시. 김정우 지부장을 70여 일 만에 만났다.
생각보다 건강해 보였으나 헐렁한 수형복 때문이었는지 푸석푸석한 느낌이 들었다. 단단하던 몸은 온데간데없었다. 오랜 단식으로 이가 흔들리고 잇몸까지 들떴을 텐데 식사는 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만나자마자 어색한 포옹이 이어졌다. 팔에 힘이 들어가자 약간의 떨림이 느껴졌다. 애써 웃는 얼굴 때문이었을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웃음기가 채 가시기 전, 그림자가 보였다. 햇볕 없는 실내였음에도 그림자는 면회가 끝날 때까지 주변을 길게 따라다녔다. 보기보다 막상 안아보니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매일 30분 이상 운동한다는 얘기가 빈말이 아닌 듯했다.
헤어지면서 다시 포옹을 했다. 그때였다. 목덜미에 닿은 까슬까슬한 수염이 옛 기억을 찔렀다. 내 구속 시절이 떠올랐다. 어지럽게 난 수염과 다듬지 못한 짧은 머리. 울산에 사는 형이 편지에 그 얼굴을 그려넣고선 흡사 짐승의 모습이라 했을 정도였다. 눈은 빛났고 군살 하나 없었다. 오로지 근육으로만 움직이던 몸은 날짐승처럼 가벼웠다. 입맛은 사라졌으나 생각은 맑았다. 피부로 호흡을 느낄 만큼 신경은 예민해졌다. 살기 위해 모든 신경이 곤두섰고 죽지 않기 위해 감각이 작동했다. 2009년 8월의 일이다. 쌍용차 파업이 끝나고 경찰서로 향하는 버스 지붕 위로 최루액처럼 비가 내렸다. 몸에 묻은 파업의 기억이 하나둘 땅으로 쓸려 내려갔다. 미움과 분노, 패배감과 무력감이 빗물 따라 승천하는 미꾸라지처럼 하늘로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오랜만에 평온한 시간을 맛보는 곳이 경찰버스 안이라는 사실이 조금 뜬금없었다.
봄가을이 없는 그곳에 왜 갔는가감옥엔 봄과 가을이 없다. 가마솥 같던 더위도 새벽이면 이불을 턱밑까지 당겨야 하는 요즘이다. 더위와 추위도 문제지만 오십 중반의 나이에 감옥 생활은 여러모로 고역이다.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김정우 지부장의 말이다. 수감번호 111번. 김정우 지부장은 현재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 중이다. 순박한 강원도 사람. ‘뽕짝’을 맛깔스럽게 부르는 사람이다. 언젠가부터 이 사회는 김정우 지부장을 쌍용차 ‘맏상주’라 부른다. 반백의 노동자면서 오십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맏상주가 돼 있었다. 가족 같은 동료가 하나둘 죽어나갈 때마다 장례식장에서 비운 소주병은 얼마였던가. 이제는 눈물이 마를 만도 한데 눈물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흘리는 눈물 속엔 공장에서 잘려나간 수많은 동지들의 눈물이 있었고, 생계를 위해 거리에서 힘겹게 버티는 동료들의 고단함도 배어 있었다. 41일간 단식을 할 때도 서울 대한문 철거를 막아섰을 때도 그에겐 오직 죽음을 막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무력하게 동료들의 죽음을 안아야 했던 그 기막힌 시간을 더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 쌍용차 국정조사를 통해 시시비비가 가려지고 집안에서 웅크린 동료들이 세상 밖으로 떳떳하게 나올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가 지금 구치소에 수감된 이유다.
철탑에 오른 마음들
허리를 펴지 못했다. 꼿꼿하게 서서 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포기했다. 꼬리뼈가 말썽을 부렸기 때문이다. 쌍용차 비정규직지회 복기성 수석부지회장은 송전탑을 내려오면서 울고 있었다. 171일간의 송전탑 철탑 농성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진 않았다. 함께 올랐던 한상균 전 지부장과 문기주 정비지회장 또한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췄다.
파업 이후 3년간 감옥살이를 한 몸으로 15만4천V가 흐르는 송전탑에 오르는 한상균 전 지부장의 마음은 남달랐다. 이번만은 꼭 문제를 풀고 싶었다. 대선이 코앞이고 여야 대선 후보들이 쌍용차 국정조사를 포함해 사태 해결에 나서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사태 해결의 속도를 내기는커녕 정치적 희망고문의 시간만 길어지고 있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강도 높은 투쟁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쌍용차 정리해고에서 회계조작과 기획파산의 의혹이 점차 사실로 드러났다. 2012년 9월20일 국회 청문회에서 새누리당 의원조차 쌍용차 정리해고는 부당하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진전이 없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뻔뻔한 회사는 빈약한 근거를 들고나오며 국정조사 반대를 주장했지만 여론은 예전과 달리 싸늘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쌍용차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새벽 3시에 철탑에 오르며 171일간 철탑 농성을 이어간 3명의 노동자가 바란 건 오직 하나였다. 쌍용차 문제를 해결해서 이번만은 고통의 시간을 끝내자는 것이었다. 철탑 농성으로 쌍용차 무급노동자들의 복직은 앞당겨졌고 사회적 관심은 더 높아졌다. 그러나 아직 세 노동자의 바람은 온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과정이 결과를 그려보고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될 때가 있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그동안 숱하게 맞고 끌려가고 구속당하는 과정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지금은 쌍용차 문제 해결 이후의 상황을 부지불식간에 하나둘 맛보고 조율하고 있는 과정은 아닐까.
다시 거리에서지난 8월24일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범국민대회가 서울역에서 열렸다. 8천 명이 넘는 노동자·시민이 조직위원으로 참여했다. 거리에서 공장에서 혹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으로 마음과 정성을 모아줬다. 쌍용차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읽혔다. 정리해고가 삶은 물론 가족의 붕괴와 파괴로 다가오는 현실을 쌍용차에서 보고 경험했기 때문일까. 지부장을 맏상주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쌍용차 문제를 자신과 관련이 있는 가족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었다. 안타까워했고 함께 아파했다. 지쳐가는 조합원을 응원하고 격려했다. 이 싸움에서 질 수 없다는 ‘사회적 의미’가 생긴 것이다. 쌍용차 문제가 대한민국 노동문제의 중심은 아니다. 그러나 쌍용차 문제를 우회해선 노동문제에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국정조사가 쌍용차 해법의 유일한 수단 또한 아니다. 그럼에도 국정조사를 말하는 이유는 난마처럼 얽힌 쌍용차 문제를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수단이 국정조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포기 없이 다시 거리에서 싸운다. 거리에서 싸우는 것이 좋아서라기보다 쌍용차 문제의 해법이 사회적 압력을 더 높이는데 있기 때문이다. 의존하지 않고 의탁을 바라지 않고 우리는 스스로 싸우는 것을 선택했다. 삶을 빼앗기지 않고 더 이상 죽지 않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우리 스스로 투쟁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도 거리에서 싸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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