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쪽의 편집국 봉쇄에 항의하는 <한국일보> 기자들이 시위 팻말을 세워 장재구 회장의 불법행위를 비판하고 있다. /탁기형 기자
‘중도’라는 길이 있다. 내 편과 네 편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는 길’이란 시각도 있고, 내 편이기도 하고 네 편이기도 한 ‘정체불명의 길’이란 해 석도 있으며, 내 편도 네 편도 거부 하는 ‘불편부당한 길’이란 견해도 있 다. 어떤 중도인가는 길을 걷는 이 의 걸음걸이가 결정한다. 중심이 없 는 중도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길을 잃지만, 중심이 또렷한 중도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 을 한다. 한국 사회에서 중도의 대 변자를 자임해온 언론이 편집국을 봉쇄당했다. 사주의 불법과 싸우며 기자들이 찾으려는 것 은 ‘비판적 중도’의 길이다.
“편집국 불법 폐쇄 즉각 철회하 라.”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좁고 후 텁지근한 통로를 울렸다. ‘편집국’과 ‘불법 폐쇄’는 언어를 다루는 기자들 에게도 맥락이 닿지 않는 조합이었 다. 6월19일 오전 서울 중구 남대문 로 한국일보사 15층 풍경은 익숙지 않았다. 기사를 쓰고 신문을 만들 어야 할 기자들이 폐쇄된 편집국 밖 에서 출입구를 막은 용역들과 대치 했다. 190여 명의 기자들을 밖으로 내몰고 문을 걸어잠근 장재구 회장 이 소수의 데스크·기자들과 신문을 파행 제작해온 지 4일째였다. 어떤 기자는 “출근했으니까 문을 열어달 라”며 호소했고, 어떤 기자는 “오늘 치 신문은 신문이 아니라 쓰레기”라 고 소리쳤다. 이날 발행된 는 박진열 사장 명의의 1면 사고 (‘한국일보 사태의 진실은 이렇습니 다’)를 통해 기자들의 싸움을 인사 불만에 따른 “폭거”로 규정했다. 한 기자는 “‘기·승·전’을 떼고 ‘결’만 이야기하는 화법”이라고 꼬집었다.
사 쪽이 누락한 ‘기’는 이렇다. 2002년 신문사를 인수한 장 회장은 700억원의 증자 약속을 지키지 않다가, 증자 대금을 마련하려 서울 중학동 사옥 매각 때 한일건설로부터 확보한 새 건물 2천 평의 우선매수청구권을 몰래 넘겼다. ‘승’. 노조는 회사에 200억원의 손해를 끼친 장 회장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4월29일 검찰에 고발했다. ‘전’. 5월1일 장 회장은 이영성 편집국장 등 부장급 이상 간부 5명에 대해 보복성 인사를 단행했다. 6월16일엔 기자들의 인사 불복종에 맞서 편집국을 봉쇄했다.
사태를 바라보는 시선은 중도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이중적 눈길과도 맞닿아 있다. 장 회장에게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가 지역으로 발령난 고재학 경제부장은 “는 좌든 우든 시시비비를 정확하게 가리는 적극적 중도를 지향함에도 정치권과 사회는 이번 사태조차 자신들의 유불리에 따라 좌와 우의 관점으로 재단하고 곡해한다”고 토로했다. 그는 “ 사태는 아주 단순하다. 족벌언론 사주가 개인 탐욕과 비리로 신문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게 본질이다. 검찰이 사주의 불법행위를 수사해서 처벌하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라고 말했다. 검찰은 고발 50여일이 지났지만 아직 장 회장을 조사하지 않고 있다. 사 쪽이 내세우는 ‘노사 갈등’ 프레임도 장 회장의 잘못을 덮는 ‘위장 논리’로 작용하고 있다.
사태는 개인 비리로 얼룩진 족벌언론 사주가 여론의 출발점인 신문 지면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및 무기명 기사로 가득 찬 신문(상자기사 참조)이 창간 59돌을 먹칠하고 있다. 지난 5월15일엔 기자들도 모르게 1면 단독 기사(‘공정위, 광고업계 납품가 후려치기 조사 착수’)가 사라지기도 했다. 사 쪽이 편집국 외부에서 따로 제작한 지면과 바꿔치기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최진주 전국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 비상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은 “신문의 질 저하로 독자가 다 떨어지게 생겼다. 지금의 신문을 누가 돈 내고 보겠나. 신문 신뢰도 하락이 가장 큰 걱정”이라고 했다. 문화부 소속의 한 기자도 말했다. “기자들이 파업을 한 것도 아닌데 장 회장은 편집국까지 폐쇄한 채 신문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사주라고 해서 편집권을 이렇게 뒤흔들어도 되나.”
편집국 봉쇄가 언제 풀릴지는 예단하기 쉽지 않다. 다만 극소수의 인력으로 함량 미달의 일간지를 찍어내는 상황이 장기화되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정상원 노조 비대위원장은 “정치·사회적 압박이 거세지면서 장 회장도 오래 버티긴 힘들 것”이라며 “편집국으로 돌아가면 5월1일 인사 이전 상태로 복귀시켜 우리가 다시 신문을 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의원들과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6월20일 잇따라 성명을 내어 편집국 정상화와 검찰의 장 회장 수사를 촉구했다.
사태는 족벌경영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언론이 그 폐단을 극복하고 정체성을 지켜낼 지배구조를 확보할 수 있는지 가늠하는 첫 사례이기도 하다.
장 회장의 경영 파탄으로 는 2006년 중학동 사옥 매각 때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장부상 부채만 800여억원에 이른다. 직원들의 상여금 지급과 국민연금 납부 및 필자 원고료 지급까지 밀려 있는 상태다. 고재학 부장은 “사옥 매각 때 계획했던 회생 프로그램이 거의 물거품이 됐다. 부도 초읽기에 몰려 있다”고 했다. 극심한 경영난은 를 4대지의 ‘영광’에서 추락시킨 한편 비판적 중도를 향한 구성원들의 열망까지 옥죄고 있다.
반면 현재 난국은 구성원들의 ‘ 정체성 지키기’ 노력을 지탱하는 ‘역설적 동력’도 되고 있다. 기자들은 “우리 미래는 장 회장 퇴진에서부터 열린다”고 말한다. 장 회장 퇴진이 늦어지면 가 재기 불능에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비대위도 장 회장 퇴진에 최우선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기자들은 검찰의 장 회장 구속이 가장 확실한 관계 단절 방식이라고 입을 모은다. 어정쩡한 봉합 대신 장 회장을 배제한 근본적인 지배구조 개편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다.
장 회장이 퇴진해도 ‘힘있는 중도’로 가는 여정은 험난하다. ‘장 회장 이후’ 의 지배구조를 두고 구성원들의 의견은 백가쟁명이다. 처럼 사원주주 형태로 이행하는 방식과 장씨 일가를 제외한 새로운 자본이 인수하는 방식, 소유(장씨 일가)와 경영(전문경영인)을 분리하고 사원들과 외부 자본까지 참여하는 공익재단 형태도 논의되고 있다. 다만 한화가 부채를 떠안고 퇴직금 및 운영자금을 지원한 뒤 손을 뗀 사례보다 현재 의 상황이 훨씬 어렵다는 점이 고민거리다. 성사 직전까지 갔던 ㅅ사로의 매각 협상이 최종 결렬된 것도 구성원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공익재단 방식의 경우 장씨 일가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나같이 녹록지 않다.
내 편인지 네 편인지 밝힐 것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내 편도 네 편도 아닌 ‘진실의 편’에 서는 것이 참된 중도다. 흑을 견제하고 백을 성찰케 하는 ‘건강한 회색지대’의 가능성을 기자들은 찾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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