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을 묶어두려고 재계가 활용하는 낡은 ‘레퍼토리’가 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고용이 감소한다.’ 비용(임금)이 늘어나면 기업이 일자리를 줄일 수밖에 없다는 단순 논리다. 하지만 ‘고용률 70%’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박근혜 정부를 공략할 이보다 좋은 카드는 없 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는 최저임금과 직결되는 ‘시간제 일자리’를 5 년 사이 93만 개 늘리기로 했다. 고용률 70% 달성을 위한 신규 일자 리 238만 개의 40%에 달하는 수준이다.
겉모습만 멀쩡한 상한 만두 같은…
실제 1980년대 영미권에서는 ‘최저임금 인상은 10대 청소년 고용 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최저임금이 10% 인상 되면 10대는 1~3%, 20대 초반은 1% 미만 고용이 감소한다는 식이었 다. 하지만 실증분석 결과 10대를 제외한 다른 집단은 최저임금이 고 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에는 이 마저도 뒤집혔다. 10대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는 발견되 지 않고 상황에 따라 고용이 늘어나는 효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경 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결론도 비슷하다. “부분적으로 이견이 있 지만 최저임금 수준이 높을수록 젊은 층이 일자리를 잃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여성이나 시간제 등 다른 집단에서는 최저임금이 고용 을 줄이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최저임금 고용효과’를 분석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 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이 낸 ‘최저임금 수준평가와 고용효과’다. 결론 은 이렇다. “지난 20년간 최저임금이 고용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발 견되지 않는다. 특히 2000년 이후 최저임금 인상이 오히려 고용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왜 그럴까? “최저임금이 오르면 구직을 포 기했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나설 동기가 생긴다.”(김유선 연구위 원) 비경제활동인구가 많은 우리나라에선 특히 최저임금 인상 효과 가 크다는 분석이다.
우리나라 노동시장은 고용률이 낮은데 실업률도 낮은 이상한 구 조를 갖고 있다. 2011년 11월 이 명박 정부의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통계청의 ‘2011년 10월 고 용 동향’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고용 대박”이라는 표현을 썼는 데 당시 실업률이 2.9%로 9년 만 에 3% 이하로 떨어졌기 때문이 다. 이를 두고 “완전고용 상태에 도달했다”고 자랑한 것이다.
실업지표만 보면,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1~2위를 다툴 정도 로 고용 문제에 관한 한 최상위권이다. 의 저자 김승식 디스커버리 인베스트먼트 부사장은 “현실을 있는 그대 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포장하고 왜곡하는 수단으로 실업 률 통계 지표가 악용된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겉모습만 멀쩡한 상한 만두 같다”고 설명했다.
통계청이 발표하는 ‘경제활동인구조사’의 실업률 지표는 국제노동 기구(ILO) 기준에 따라 설문조사로 작성된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실 업자는 굳이 구직 활동을 한다고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밝혀도 실업수당 등 사회적 메리트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 문조사관에게 자기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모두 비경제활동인구가 돼버린다. 실업자 지표에서 절대 수를 처음부터 줄이는 셈이다. 가정 주부나 군입대자, 대졸자 같은 취업준비생이 그런 경우다. 이런 인구 가 54만2천 명 정도로 추정된다.
| |
또 다른 문제는 취업자의 기준이다. ILO 기준에선 주당 최소한의 시간만 일하면 취업자로 인정받는다. 아르바이트 같은 임시직이나 일용직이 크게 확대된 우리나라와 같은 노동시장의 경우 취업률 지 표가 과대 포장될 가능성이 높다. 주 36시간 미만 노동자 가운데 추 가 노동을 희망하는 사람이 35만8천 명으로 예측된다. 결국 추가 노 동을 원하는 사람과 비경제활동인구 중 취업 의사와 노동 능력이 있
는 사람만 합쳐도 94만 명이 넘는다. 실업자 75만9천 명이라는 정부 지표를 이미 웃돈다.
고용률 실태가 이런 현실을 드러낸다. 고용률 지표는 15살 이상 생산가능인구 중 취업자 비중을 말한다. 우리나라 실업률은 3%대이지만 고용률은 59.8%밖에 안 된다. OECD 30개국 중 중·하위권이다. 독일·미국은 실업률이 7~9%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지만, 고용률은 각각 70.4%와 67.6%로 나타난다. 그래서 김승식 부사장은 “이명박 정부의 노동시장 정책에 비해 박근혜 정부의 고용률 70% 달성이 진일보한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실업률이 낮다고 자화자찬하지 않고 고용률을 올리겠다고 나섰으니까.
하지만 노동시장의 비정상적 차별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못하면 여전히 양적 지표 달성에 집착하는 ‘오십보백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 “2012년 3분기 기준으로 임금노동자 1786명의 절반이 넘는 956만 명이 월소득 100만원대 임금을 받는다. 이처럼 저임금노동자가 넘쳐나는 노동시장 구조에서 정규직과 같은 임금과 복지 대우를 받는 시간제 일자리를 민간기업이 창출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게 박근혜 정부의 난센스다.” (김승식 부사장)
OECD는 최저임금 인상이 임금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도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받던 노동자의 임금도 얼마간 오르기 때문이다. 또한 연령·남녀 간 임금 격차가 줄어든다. 우리나라의 남녀 간 임금 격차는 OECD 평균의 2.6배를 웃도는 1위다. 결국 노동자 평균임금 대비 최저임금 비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저임금 계층 비율이 낮고 임금 불평등이 적다는 게 OECD의 결론이다. 우리나라 최저임금은 1987년 처음 도입했을 때 노동자 평균임금의 40%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34%로 떨어졌다.
‘중산층 70%’ 공약도 최저임금과 맞닿아중산층을 70%로 끌어올리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도 최저임금 정책과 맞닿아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 경제사학자 데이비드 란데스 교수는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큰 규모의 중산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우리나라 중산층 규모는 쪼그라들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매킨지 보고서를 보면, 중위소득 3960만원의 50~150%를 중산층으로 파악하면 1990년 75.4%에서 2000년 71.1%, 2010년 67.5%로 줄어들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09년 전체 가구의 55.5%를 중산층이라고 분석했다. 비정규직이라 임금이 적은 ‘워킹푸어’, 집값 대출을 갚느라 허리띠를 졸라맨 ‘하우스푸어’, 자녀교육비 때문에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은퇴푸어’ 등이 급증한 탓이다. 박근혜 정부가 ‘고용률 70%’ ‘중산층 70%’를 달성해 국민행복시대를 실현할 수 있을지는 최저임금 시험대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윤, 국무위원들 계엄 반대 와중에 “발표해야 하니 나는 간다”
공수처, ‘경호처장 강제구인’ 뒤 윤석열 체포영장 재집행 가능성
[단독] 문상호 “1인당 실탄 10발 준비”…계엄 당일 지시
경찰, ‘윤 체포 방해 의혹’ 55경비단장에게도 출석 통보
[영상] 공수처 “군·경호처 200명 팔짱 끼고 체포 막아…일부 총기 소지”
분당 복합상가 큰불 30분 만에 초진…28명 부상·40여명 구조
버티는 윤석열에 보수언론도 “비겁하기 짝이 없다”
‘화살촉 머리’ 플라나리아, 국내서 신종 21종 발견
야구팬들도 관저 앞 ‘분노의 깃발’…체포 막은 경호처에 “윤과 한패”
우원식 “마은혁 헌법재판관 임명 배제 자의적”…권한쟁의 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