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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수록 커지는 라응찬 차명계좌 의혹

검찰이 실태 제대로 밝히지 않은 라응찬 차명계좌, 운영 ‘총괄표’ 입수해 살펴보니 의혹 천태만상… 자금 출처 당초 해명과 달라 보이고, 자녀에게 불법 증여한 46억원과 차명 증권계좌 운영하며 내부 정보 이용한 의혹 등 새로 드러나
등록 2013-02-01 10:42 수정 2020-05-02 19:27

는 2009년 5월 박아무개 당시 신한금융지주 업무지원팀장이 작성한 라응찬(75) 전 신한지주 회장의 차명계좌 ‘총괄표’라는 문건 등을 입수해 1월23일 공개했다. 이 문건에는 라 전 회장이 신한은행장과 지주 회장으로 재직하던 10년 동안 다른 사람 23명의 이름으로 된 예금과 증권계좌로 은행 돈을 빌려 쓰고 자사주를 매입한 내용이 월별로 빼곡히 적혀 있다. 모두 불법·탈법적인 금융거래다.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차명계좌를 검찰이 두 차례 수사했지만 재일동포 주주 4명만 금융 당국에 알려주고 나머지는 비밀에 부쳤다. 덕분에 라 전 회장은 형사처벌을 피했다. 2010년 11월30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한 라 전 회장의 모습. 한겨레 이종근 기자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차명계좌를 검찰이 두 차례 수사했지만 재일동포 주주 4명만 금융 당국에 알려주고 나머지는 비밀에 부쳤다. 덕분에 라 전 회장은 형사처벌을 피했다. 2010년 11월30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한 라 전 회장의 모습. 한겨레 이종근 기자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격려금을 줬다?

라응찬 전 회장은 신한은행장 임기 마지막 해인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지인 2명과 차남의 동업자, 재일동포 주주 4명, 신한증권 임원 출신 김아무개(69·자금관리인)씨와 그의 친·인척 8명, 신한은행 비서실 직원의 친·인척 2명 등 모두 23명의 이름으로 차명계좌를 만들었다. 차명계좌는 1998년 1월 라 회장의 지인 이아무개(73)씨의 은행계좌와 재일동포 주주 이아무개(77)씨의 증권계좌에서 시작된다. 그러고는 1998년 5월 3개, 2001년 3월 8개, 2004년 3월 12개로 늘어나다 2006년 7월부터 줄어들어 2008년 12월에는 다시 2개가 된다. 마지막 차명계좌는 재일동포 주주 이아무개(54)씨와 라 전 회장의 자금관리인 김씨의 친척 박아무개(65)씨 것으로 적혀 있다. 차명계좌로 관리한 금액은 11억여원(1998년 1월)에서 출발해 96억여원(2004년 1월)으로 증가했다가 23억여원으로 줄었다. 거래 금액 기준으로 보면 수백억원이 된다. 잔액이 매년 들쑥날쑥한 이유는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 투자금으로 50억원이 건네지고 라 전 회장의 세 아들에게 직간접적으로 46억원이 증여되는 등 수시로 입출금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박연차 50억원’은 검찰에서 두 차례 조사한 적이 있다. 당시 라 회장은 1991년 신한은행장으로 선임될 때 은행 창업자인 이희건 신한지주 명예회장이 재일동포 원로 주주 4명과 함께 격려금 30억원을 모아 줬는데, 그 이자가 붙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물론 증여세는 내지 않았다고 했다. 라 회장의 주장을 받아들여 검찰은 2009년 5월, 50억원은 재일동포 4명의 차명계좌로 운영했지만 비자금이 아닌 개인 투자금이라고 결론 내렸다. “금융실명제법 위반은 과태료 사안으로 형사처벌 법규가 없다”며 1차 수사가 흐지부지 끝났다.

하지만 이 입수한 차명계좌 문건을 보면 검찰의 수사 결과에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첫째, 재일동포 4명의 차명계좌는 라 회장의 주장처럼 동시에 개설되지도, 30억원이 한꺼번에 입금되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처음 개설된 재일동포 주주 이씨의 계좌는 1998년 1월 8억4천만원으로 시작해 25억5천만원(2003년 9월)으로 늘었다가 2007년 3월 박연차 회장에게 11억4천만원을 보낸 뒤 잔액이 0원이 된다. 그러나 또 다른 재일동포 이씨의 차명계좌는 2003년 3월(1억5천만원)에야 만들어졌고 박 회장에게 8억9천만원이 건너간 뒤에도 2008년 12월까지 9억4천만원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둘째, 라 전 회장에게 30억원을 전달했다는 재일동포 4명 가운데 2명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다. 그렇다면 한 부자가 수억원씩을 따로 줬다는 얘기다. 게다가 아들은 라 전 회장에게 격려금을 준 1991년 당시 32살에 불과했다. 30대의 재일동포가 50대의 신한은행장에게 “행장직을 잘 수행하라”고 격려한 셈이다. 이는 “(격려금을 준 재일동포는 1982년) 신한은행 설립 등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신 분들”이라는 라 회장의 당시 해명과도 어긋난다.

셋째, 1993년 금융실명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뒤에도 당사자들과 차명 합의를 하지 않았다. 차명계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훔친 도명계좌일 개연성이 있다는 뜻이다. 2010년 4월 국회에서 다시 ‘박연차 50억원’이 불거져 금융감독원이 조사에 들어가자 뒤늦게 부랴부랴 재일동포 주주에게 ‘확인서’를 받았다. “(격려금을 재일동포 주주) 명의 계좌에 넣어 관리하겠다는 라 회장의 말을 듣고 이에 흔쾌히 동의했다”는 내용이었다. 격려금을 받은 지 19년 만이었다. 재일동포 주주 1명에게는 끝내 이 확인서조차 얻어내지 못했다.

일부 금액은 차명계좌를 통해 대출받은 것이었다. 신용도가 높은 재일동포 주주 2명 명의의 계좌로 돈을 빌린 뒤 나중에 다른 외부의 차명계좌 두 곳에서 인출한 돈으로 상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은행 최고경영자가 자기 가족의 대출 편의 챙기기에 급급했던 셈이다.
차명계좌로 신한은행 주Z식 매입

라 전 회장이 차명계좌로 관리하던 돈 가운데 46억원이 아들들에게 건네졌다는 사실도 외부로 처음 드러났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라 회장의 장남이 받은 17억원을 비롯해 세 아들은 모두 31억9천만원을 차명계좌로 받는다. 2006년 3월에는 사업을 하는 라 회장 둘째아들의 동업자라는 김아무개(61)씨에게 14억원이 입금되기도 했다. 이렇게 전달된 46억원 가운데 10억5천만원은 2009년 5월 차명계좌 거래를 정리한 신한지주 업무지원팀장도 출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차명계좌인) 이아무개의 2002년 3월 2.5억원, 임아무개의 2001년 12월 4억원, 장아무개의 2001년 12월 4억원은 원인 불명으로 자금이 유입됐다. 후순위채 발행 양도성예금증서(CD)로 운영됐고 대부분 라 회장의 자녀들에게 전달됐다.” 모두 세금 탈루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자금거래다.

또 일부 금액은 차명계좌를 통해 대출받은 것이었다. 신용도가 높은 재일동포 주주 2명 명의의 계좌로 돈을 빌린 뒤 나중에 다른 외부의 차명계좌 두 곳에서 인출한 돈으로 상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은행 최고경영자가 자기 가족의 대출 편의 챙기기에 급급했던 셈이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5조에는 금융기관 임직원이 직무와 관련해 금품 또는 기타 이익을 얻거나 요구할 때는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돼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2008년 12월 1차 조사 때 검찰은 라 회장의 차명계좌 명의인 14명을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재일동포 주주 4명만 금융 당국에 알려주고 나머지는 비밀에 부쳤다. 라 회장이 자녀들에게 차명계좌로 증여를 했다는 사실 역시 밝히지 않았다. 물론 형사처벌도 없었다.

김앤장 보고서의 ‘조언’ 적중해
947호 특집1

947호 특집1

이 입수한 차명계좌 문건에는 14명 외에도 9명의 이름이 새로 나온다. 이들은 라 전 회장이 신한지주 주식을 매입하거나 수억원을 1년 이내로 보관할 때 사용하던 차명계좌다. 예금계좌와 증권계좌로 자금이 수시로 이동하며 신한지주 주식 수만 주씩을 사고판 흔적이 눈에 띈다. 구체적으로 보면, 차명예금으로 빼낸 돈으로 다른 차명증권 계좌를 통해 신한지주 주식 4만 주를 매입한 다음, 다시 다른 2명의 증권계좌로 주식을 옮겨 2년여 만에 약 12억원의 평가이익을 얻었다. 불법·탈법 행위다. 현행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에 관한 법률’은 차명계좌를 통한 금융기관 임원의 자사주 취득을 엄격히 금지한다. 내부 정보 이용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금 출처에 대한 추적을 피하려고 실물 주식을 그대로 차명계좌끼리 이동시키는 등 ‘주식세탁’ 수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라 전 회장의 자금관리인 김씨의 친척 김아무개(79)씨의 이름으로 개설한 교보증권에 증권계좌가 있었다. 여기에는 신한지주 주식 4만 주가 들어 있었는데, 2004년 4월 이 주식을 굿모닝 신한증권 증권계좌로 옮겼다. 한 달 뒤 신한지주 주식 4만 주를 자금관리인 김씨가 실물로 빼낸다. 보름 뒤 그대로 또 다른 차명계좌인 권아무개(52)씨 증권계좌로 입고하기 위해서다. 이런 실물 거래와 다단계 이동은 전형적인 자금추적 회피 수법이다. 권씨의 증권계좌가 라 전 회장의 차명계좌로 드러나도 자금거래 흐름이 전산에 남지 않아 다른 차명계좌들을 감출 수 있다.

이런 라 전 회장의 차명거래를 검찰과 금감원은 왜 밝히지 않았을까? 이 입수한 법무법인 김앤장법률사무소의 ‘법률검토 보고서’를 읽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검토서는 2010년 7월23일 신한금융 회장 비서팀(업무지원팀)이 김앤장에서 받은 서류다. 김앤장은 검찰과 금감원의 동향을 파악해 이렇게 전망했다. “(검찰은) 라 회장의 차명계좌가 개설된 신한은행 내 특정 점포의 거래 정보(명의인 인적 사항, 대상 거래 기간)를 금감원 조사를 위해 제한적으로 제공할 계획.” “(금감원은) 검찰 통보 후 본격적인 조사 착수 예상됨.”

김앤장은 또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금융실명법 위반에 대한 법리적인 방어 못지않게 실명법 위반이 도화선이 돼 사건의 외견이 확대되는 것을 조기에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현 상황에서는 실명법 위반에 따른 은행 임직원의 책임을 전면 부인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고, 설득력 없는 부인으로 일관시 금감원 조사 범위 확대, 국감 및 감사원 감사 절차시 의혹이 증폭될 우려도 있어 방안 선택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음.”

김앤장의 ‘전망’과 ‘조언’은 적중했다. 금감원은 2010년 9월 대대적인 현장 조사를 벌이고도 재일동포 주주 4명의 차명예금만을 문제 삼았다. 라 전 회장은 업무정지 3개월의 행정 제재만 받았다. 또다시 형사처벌도 면했다. 그해 12월29일 이른바 ‘신한 사태’를 수사한 검찰이 라 전 회장에게만 불기소 처분을 내렸기 때문이다. 2009년 5월에 이어 두 번째로 검찰에서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경영권 다툼에서 비자금 문제로

2013년 1월 이번에는 차명증권 계좌까지 추가로 드러나 라 전 회장은 세 번째 시험대에 올랐다. 경제개혁연대는 1월23일 논평을 내어 “(2010년 9월) 금감원의 조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라응찬 전 회장과 신상훈 전 사장 간 경영권 다툼이 벌어져 비자금 문제보다 경영권 분쟁이 부각됐다. 추가적인 조사 및 제재가 필요하다”며 “국세청, 검찰, 금융감독 당국이 각종 의혹에 대해 해명하고 적극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참여연대도 1월25일 “국가기관의 진상 규명 및 수사 의지가 미흡하다고 판단될 경우 직접 고발에 나설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신한금융 쪽은 “이미 감독원이 조사를 진행하던 사안이 다시 부각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금감원은 “사실관계를 확인하겠다”며 신한금융 쪽에 라 전 회장의 차명계좌 관련 자료 제출을 다시 요구하는 등 사실상 재조사에 들어갔다. ‘삼세번에 득한다’는 옛말이 실현될까?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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