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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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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도박에 돈 잃고 시간 뺏기는 아이들


고교생 민철이와 기영이는 어떻게 친구 따라 불법 스포츠토토에 빠져 용돈을 탕진했나… 한 반에 10명이 불법 토토에 뛰어드는 교실, 합법 토토의 5배인 13조원에 이르는 ‘지하경제’ 바닥에 아이들이 있다
등록 2013-01-26 13:41 수정 2020-05-03 04:27

“아, 진다 진다. 갑자기 스크(SK)가 왜 지냐.”(김민철·18·가명)
“야, 난 아까 첫 3점부터 털렸어. 넌 뭐 걸었냐.”(박기영·18·가명)
“첫 득(점), 첫 3점, 1쿼터 핸(디캡)승. 마지막 핸승에서 꼴았어.”(민철)
1월11일 늦은 저녁으로 정신없이 닭갈비를 먹던 민철이와 기영이가 순간 시무룩해졌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으로 SK와 KGC인삼공사가 맞붙은 농구 경기의 실시간 중계를 본 뒤였다. 이날 경기는 둘이 인터넷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에 베팅한 예측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민철이가 4천원, 기영이가 3천원을 잃었다. 직전에 치러진 KCC와 전자랜드의 농구 경기에서도 이미 각자 3천원씩을 잃은 터라 둘은 “망했네, 망했어”를 연발했다. 그나마 민철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미국프로농구(NBA) 경기에 1천원을 걸어 5천원을 따놓은 것을 위안 삼았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color="#00847C">한 친구 스포츠 도박으로 100만원 300만원으로 불린 ‘전설’이 도화선이 됐다. 반마다 10명 가까이는 스포츠 도박에 뛰어들었다. 온라인 게임을 하는 친구는 ‘중딩’ 또는 ‘폐인’ 취급을 받았다. 축구박사로 통하던 기영이도 용돈을 불릴 생각에 불법 사이트에 가입했다.</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font color="#991900">아이들 미치게 만드는 ‘한폴낙’</font>

고교생 김민철(가명)씨가 1월11일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에 접속해 베팅을 하고 있다. 하루 2~3개 경기에 돈을 걸고 중계를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겨레 서보미 기자

고교생 김민철(가명)씨가 1월11일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에 접속해 베팅을 하고 있다. 하루 2~3개 경기에 돈을 걸고 중계를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겨레 서보미 기자

서울 시내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기영이는 1년 전 불법 스포츠 도박을 시작했다. 스포츠 도박이 학교에서 유행처럼 번지던 때였다. 한 친구가 스포츠 도박으로 100만원을 300만원으로 불린 ‘전설’이 도화선이 됐다. 반마다 10명 가까이는 스포츠 도박에 뛰어들었다. 온라인 게임을 하는 친구는 ‘중딩’ 또는 ‘폐인’ 취급을 받았다. 축구박사로 통하던 기영이도 용돈을 불릴 생각에 불법 사이트에 가입했다. 그 뒤 매일 2~3개 경기에 돈을 걸었다. 한 경기당 베팅액은 주머니 사정에 따라 3천~3만원까지 달라진다. 한 달 용돈이 7만원인 그에겐 과감한 베팅이다. 운이 좋을 땐 1만2천원으로 8만원을 딴 적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잃었다. 한 달 전에는 결혼예식장에서 이틀간 꼬박 아르바이트해서 받은 8만원을 전설의 주인공을 따라 걸었다가 한 방에 날리기도 했다. 기영이는 “잃은 건 상관없다. 그런데 ‘한폴낙’(한 번 베팅을 할 때 특정 게임의 첫 득점, 첫 3점슛 등 여러 ‘폴’(폴더)을 묶어 배당률을 높여놨는데 그중 한 폴을 못 맞혀 돈을 모두 잃었을 경우)일 때가 가장 미친다. 거의 땄다가 잃은 거다. 그래서 계속하게 된다”고 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민철이는 두 달 전 스포츠 도박에 입문한 새내기다. 잘한다는 친구에게 종종 ‘대리 베팅’을 시켰다가 쓴맛을 본 뒤 아예 직접 나섰다. ‘총알’로는 용돈 4만원이 전부인 탓에 베팅 금액은 기영이보다 적다. 한 경기당 1천~3천원 정도다. 그러나 성향은 더 공격적이다. 기영이는 대개 한 번 베팅에 2~3폴을 만드는데 민철이는 7폴을 조합하기도 한다. 폴이 많아질수록 결과를 맞힐 확률은 떨어지지만 그만큼 배당금은 많아지기 때문이다. 지난번 7폴을 맞혀 1천원을 1만5천원으로 불린 게 그의 최고 성적이다.

합법이건 불법이건 아직은 도박을 할 수 없는 청소년이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제재를 받은 적은 없다. 불법 사이트는 가입할 때 성인 인증도 요구하지 않았다. 돈이 오고 가는 계좌번호만 입력하면 됐다. 다만 친구의 추천은 꼭 필요했다. 불법 사이트들이 정부 단속을 피하느라 거의 매일 인터넷 도메인을 바꿔가며 은밀하게 운영되는 탓이다. 회원이 되자 변경된 도메인이 전자우편 문자로 들어왔다. 민철이는 “이젠 온라인 게임은 거의 안 한다. 이게 훨씬 짜릿하다. 잘만 하면 현금도 막 생긴다. 돈을 딴 것만 자꾸 생각나고 잃은 것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font color="#991900">스포츠 도박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하루</font>

이들의 하루는 스포츠 도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매일 1~2시간을 전날 경기 분석에 할애하는 건 기본이다. 국내외 축구와 농구 등에 자유자재로 베팅하려면 모든 경기 흐름을 꿰뚫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베팅한 뒤에는 실시간으로 경기를 중계하는 앱이나 인터넷 사이트를 수시로 들락거린다. “요즘은 방학인데도 매일 아침 8시면 일어나서 엄마가 놀라신다. 아침 9시부터 농구 경기가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1시간 전부터는 분석에 들어가야 한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때는 새벽 3~4시까지 경기를 보곤 한다.” 민철이의 말이다. 정신을 스포츠 도박에 빼앗기니 학교 성적은 자연스레 곤두박질이다. 기영이는 “1학년 때는 모의고사를 보면 과목별로 2~3등급은 나왔는데 이젠 3~4등급으로 떨어졌다. 공부에 많이 방해된다는 걸 안다”고 했다.

민철이와 기영이가 스포츠 도박에 몰두하는 것은 ‘구조적’ 원인이 크다. 불법 사이트들은 강력한 무기인 ‘포인트’를 활용해 고객을 끌어오고, 계속 잡아두는 기술이 탁월하다. 불법 사이트마다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컨대 고객이 1만원을 입금하면 포인트가 1만1천 점 정도 쌓인다. 합법적인 스포츠토토에는 없는 방식이다. 여기에 친구를 초대하면 4천 점 정도를 그냥 준다. 여기까지는 시작이다. 내가 초대한 친구가 돈을 잃으면 그 5% 정도를, 내가 잃으면 그 2%를 나에게 ‘위로낙첨금’으로 돌려준다. 게시판에 글을 쓰면 100점, 댓글을 쓰면 50점을 주는 사이트도 있다. ‘올인’난 청소년들도 도박을 계속하게 만드는 구조다. 그러나 인심 좋던 불법 사이트도 포인트를 현금화해주는 데는 인색하다. 공짜로 받은 포인트는 얼마라도 현금을 얹어야 빼낼 수 있다. 그리고 전체 포인트의 80% 이상은 무조건 베팅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보너스 4천 점을 찾으려고 1만원을 넣었다 치자. 1만1200원은 어떤 게임에라도 걸어야 한다. 만약 돈을 다 날려도 남은 2800점은 환전할 수 없다. 1만원 단위로만 찾을 수 있는 탓이다. 민철이는 “계속 돈을 넣고 베팅해서 불려야만 한다. 그 돈을 찾으려다 결국 돈과 포인트를 모두 잃게 된다”고 설명했다.

불법 사이트의 불합리한 구조를 깨달은 회원이라도 발을 쉽게 빼지 못하는 건 ‘배당의 매력’ 때문이다. 불법 사이트들은 한 경기에 걸린 총 베팅액의 80~90%를 고객에게 돌려준다. 스포츠토토가 국민체육진흥기금 등을 떼고 50~60%만 돌려주는 것과 비교하면 환급률이 높은 편이다. 환급 금액이 많으니 배당률도 당연히 높다. 불법 스포츠 도박은 같은 경기라도 스포츠토토에 비해 1.5~2배 많은 배당금을 지급한다. 또 스포츠토토는 한 경기당 베팅 상한이 10만원으로 정해져 있지만, 불법 사이트에선 제한이 없다. 배당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도 불법 사이트에선 다양하다. 스포츠토토는 경기의 승무패나 점수를 맞히는 정도인 반면, 불법 사이트는 언더오버(두 팀 간 점수의 합이 사이트가 정한 기준점 이상인지 이하인지를 맞히는 방식), 첫 득점, 첫 3점슛, 첫 반칙 등에도 일일이 베팅할 수 있다.

<font color="#991900">벌금 90만원 낸 친구도 있지만</font>

기영이와 민철이는 불법 스포츠 도박을 짜릿한 ‘게임’ 정도로 생각한다. 오히려 불법 사이트의 자극적이고 비밀스러운 운영 수법을 흥미롭게 여긴다. 다만 요즘 들어선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싹트고 있단다. 자신이 가입한 사이트가 정부 단속에 걸려 폐쇄되거나, 포인트만 가지고 ‘먹튀’를 할까 걱정돼서다. 기영이의 말이다. “도박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런데 최근 한 친구가 이용하던 사이트가 적발되는 바람에 그 친구도 벌금 90만원을 냈다. 그런 거 보면 걱정도 되지만 당장 끊을 계획은 없다. 고3이 되기 전에 한 방 크게 따고 그만두려고 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추정한 불법 스포츠 도박의 규모는 13조원에 달한다. 합법적인 스포츠토토의 5배에 이르는 ‘지하경제’의 바닥에 아이들이 있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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