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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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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소송, 느닷없는 취하


쌀 개방 추가 협상 의혹 담긴 미 국무부 외교 전문 인용 보도에 민형사 소송 건 김종훈 의원과의 429일 동안의 소송 뒷이야기들
등록 2013-01-19 17:37 수정 2020-05-03 04:27

2011년 11월4일 김종훈 당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현 새누리당 의원)이 나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형사고소했다. 손해배상금 3억원을 요구하는 민사소송도 법원에 따로 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국무부의 비밀 외교 전문을 인용해 2011년 9월15일치 1면에 ‘김종훈, 쌀 개방 추가 협상 미국에 약속했었다’고 보도한 걸 문제 삼았다. 그는 소장에서 “37년간 외교부에서 오로지 국익을 위해 충실히 근무하며 쌓아왔던 명예와 자긍심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고 적었다.

 

순식간에 세 건의 법정 싸움 휘말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2007년 8월31일치 주한 미국대사관 외교 전문을 보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심의하는 미 하원 세입위원회 소속 얼 포머로이 민주당 의원이 김종훈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을 만나 미 의회에서 한-미 FTA를 비준하려면 △뼈 있는 쇠고기 수입 재개 △픽업트럭 관세 철폐 기간 연장 △쌀 개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돼 있다. 이후 두 나라는 실제로 쇠고기 시장 전면 개방에 합의했고(2008년 4월), 픽업트럭 관세를 7년차까지 유지하도록 한-미 FTA를 변경했다(2010년 12월). 남은 문제는 쌀이었다.

포머로이 의원은 “한-미 FTA에서 쌀이 제외돼 캘리포니아 곡물업자들이 반발하고 있다”며 쌀 개방을 촉구했다. 그러자 김종훈 본부장이 “현재로는 쌀 문제를 다룰 수 없다. 그러나 세계무역기구(WTO)의 쌀 관세화 유예가 2014년에 끝나면 한국 정부가 재논의할 것”이라고 답한 것으로 외교 전문에 적혀 있다. 원문은 이렇다. “Kim (Jong-Hoon) indicated that ROKG(Republic Of Korea Government) would revisit the rice issue once the 2004 WTO arrangement on rice quotas expired in 2014.” 는 미국산 쇠고기와 픽업트럭의 협상 전례에 비춰볼 때 쌀 개방 추가 협상도 미국에 약속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보도했다.

2011년 11월3일 외교부는 미국에 약속하지 않았다며 정정보도 소송을 냈다. 그리고 다음날 이와 별도로 김종훈 의원이 민형사 소송까지 제기했다. 나는 순식간에 세 건의 법정 싸움에 휘말렸다. 2012년 2월10일 서울서부지법 민사합의12부(재판장 배호근)가 “정정보도 하라”고 판결했다. 내용은 이렇다. “위키리크스 문건에 따르면, 김종훈 본부장이 ‘쌀 문제는 2014년 세계무역기구 쌀 쿼터 협정이 종료되면 재논의될 수 있다’고 발언한 것으로 돼 있을 뿐, 쌀 개방 추가 협상을 약속하거나 쌀 개방을 밀약한 발언은 없는 것으로 확인돼, 이를 알려드립니다.”

“법원은 미 외교 문서에 ‘promise’(약속하다)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점을 주목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이 나라 통상 교섭의 책임자가 외국의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무슨 말을 했고, 우리의 이익을 얼마나 대변했는지 여부다. 설령 다소 부정확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허위 보도였다고 볼 필요가 있었나 싶다.” 언론중재위원회 양재규 정책연구팀장(변호사)이 내놓은 판례 평석이다. 는 항소했다.

 

김종훈 의원은 소환도 안 한 검찰
김종훈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현 새누리당 의원)이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고소한 정은주 기자(오른쪽)가 2012년 3월28일 검찰 조사를 받으려고 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부지검에 변호인과 함께 들어서고 있다. 신소영 기자

김종훈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현 새누리당 의원)이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고소한 정은주 기자(오른쪽)가 2012년 3월28일 검찰 조사를 받으려고 서울 마포구 공덕동 서부지검에 변호인과 함께 들어서고 있다. 신소영 기자

2012년 3월28일 검찰이 나를 소환했다.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서부지검 507호 검사실에 들어서자 수사관이 의자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했다. 무게중심을 뒤로 옮기면 넘어질 것만 같은 불편한 의자였다. 그 의자에 내가 앞으로 9시간 가까이 앉아 조사받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신문조서는 녹취록이 아니었다.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고를 몇번 반복한 뒤 수사관이 답변을 간추려 조서로 남겼다. 대화를 그대로 옮기지 않으니까 작성자에게 재량권이 많이 주어졌다. 한참을 설명했는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라고 넘어가기도 하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중요한 논리인데 중간에 빠지기도 했다. ‘조서를 꾸민다’는 표현이 쓰이는 이유를 알았다. 나중에 조서를 다 검토하지만 하루 종일 신문을 받느라 녹초가 된 상태여서 나는 예민하게 문제를 잡아내거나 주요 발언을 복구할 여력이 없었다.

검사가 피의자 신문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조사가 다 끝난 뒤 한차례뿐이었다. 검사는 수사관이 작성한 조서를 훑어보고는 몇 가지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 그럼에도, 조서에는 검사가 처음부터 신문한 것처럼 기술돼 있었다. 이런 현실을 아는데도 법원은 왜 경찰 조서보다 검찰 조서를 더 신뢰하는 걸까?

조서에 지장을 수십 번 찍고 나서 가방을 챙겼다. 검사실이 추워 코트도 벗지 못하고 9시간을 조사받았더니 어깨가 뻐근했다. 가방을 메고 주섬주섬 나오는데 검사가 말했다. “손해배상금도 클 텐데(고소인과) 합의하는 게….” 고소인인 김종훈 의원은 소환 조사도 하지 않은 검찰이 나만 압박하고 있었다.

내가 검찰에서 조사받던 그날 김종훈 의원은 SBS 라디오와 인터뷰했다. “제가 처음에 언론 중재를 신청했죠. (언론중재위원회에서) 정정보도를 하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중재위 결정을 (가)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오히려 그것을 거꾸로 법원에 가져갔어요. 1심에서 제가 또 승소를 했습니다.” 외교부가 낸 정정보도 소송과, 자신이 낸 3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마구 뒤섞어 왜곡했다.

2012년 5월1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4부(재판장 노만경)가 의 손을 들어줬다. “원고(김종훈)의 사회적 평가가 다소 저하될 여지가 있지만 보도 내용이 악의적이거나 경솔한 공격으로 볼 수 없다.” 김종훈 의원은 반발했다. 가 패소한 외교부의 정정보도 소송과, 김 의원이 패소한 3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서울고법 민사13부(재판장 문용선)가 함께 맡았다.

항소심에서 나는 회심의 일격을 준비했다. 우선 1·2학년 여고생 20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69%(138명)가 미 외교 문서를 ‘재협상할 것’으로 해석했다. 통상법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도 의견서를 내어 “미 외교 전문을 보면 한국이 미국과 쌀 재협상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완판 승부를 기대해볼 만했다.

2012년 11월26일 김종훈 의원이 갑자기 민형사 소송을 취하했다. 동시에 외교부도 정정보도 소송을 끝내겠다고 밝혀왔다. 항소심 판결 선고를 나흘 앞둔 날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끄러워지는 게 부담스러웠을까? 전직 관료의 한마디에 외교부가 국민 세금으로 진행하던 소송을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일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가 사실상 승소한 셈”

2012년 12월14일 김종훈 의원의 소 취하는 확정됐다. 외교부가 낸 소송에 대해서는 항소심 재판부가 화해권고 결정을 내렸다. “원고(외교부)는 정정보도 소송을 취하한다. 소송 비용은 각자 부담한다.” 를 변론한 이은우 지향 변호사는 “1심에서 원고가 승소한 사건을 항소심이 취하하라고 결정했으니 가 사실상 승소한 셈”이라고 말했다. 2013년 1월4일 법원의 결정은 확정됐다. 소송이 시작된지 429일 만이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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