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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전국이 월드컵 열기로 달아올랐지만 세원테크 조합원들은 천막에서 파업 24일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회사는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들에게 19억8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하고 임금, 퇴직금, 상여금, 집, 자가용, 통장 따위 재산을 가압류했다. 이해남(당시 40살) 세원테크 노조위원장은 가압류의 힘을 큰아들을 통해 깨달았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갑자기 토하고 까무러쳤다고 아내가 울먹였다. 아이의 병명은 바이러스성 뇌수막염이었다. 당장 입원을 시키려면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통장에서 한 푼도 꺼낼 수가 없었다. 비로소 회사가 노동자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는 알아차렸다. 겉으로는 전세금이나 임금을 묶은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줄을 틀어쥔 것이었다. 노조를 없애고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숨통을 끊겠다는 협박이었다.
기업의 손해배상·가압류 등은 2000년대에 떠오른 ‘신종 노동탄압’ 수단이다. 1994년 대구 동산의료원 사건에서 대법원이 불법 파업이라 사용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결한 게 신호탄이었다. 해고·구속·징계라는 전통적 노동탄압에 이어 이때부터는 회사가 무조건 민사, 즉 돈으로도 대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압류 90% 이상 받아들이는 법원신인수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는 “가압류는 신청인이 낸 서류만 보고 법원이 신속하게 결정하기에 90% 이상 받아들여진다” 고 설명했다. 이후 손해배상 책임이 가려질 때까지 가압류를 당한 채무자는 경제활동에 큰 제약을 받는다.
첫째, 신속했다. 형사처벌은 경찰 수사, 검찰 기소, 법원 판결을 몇년간 기다려야 하지만 가압류는 며칠 만에 이뤄진다. 가압류는 민사소송에서 강제집행을 보전하려고 마련한 제도다. 소송 결과에 따라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채무자의 재산을 미리 묶어두는 거다. 신인수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는 “가압류는 신청인이 낸 서류만 보고 법원이 신속하게 결정하기에 90% 이상 받아들여진다”고 설명했다. 이후 손해배상 책임이 가려질 때까지 가압류를 당한 채무자는 경제활동에 큰 제약을 받는다. 회사 처지에서는 노동자를 제압할 ‘마법 램프’를 얻은 셈이었다. 손해배상 소송에 질 것 같아도 회사는 무조건 가압류를 하는 게 유리하다. 월급과 통장이 가압류된 노동자는 하나같이 생계가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월급이 끊기면 가정 경제가 차츰차츰 무너진다. 먼저 보험을 해약하고,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못한다. 생계를 잇기 위해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뛴다. 그렇게 하나둘 노조를 떠나간다. 노동운동가인 이용덕(42)씨는 “뼛속까지 가난한 노동자는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영혼은 잠식되고 가정은 파탄나며 노조 활동에는 족쇄가 채워진다”고 말했다. 2002년 2월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발전노조) 파업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동서발전주식회사가 발전노조를 상대로 31억6천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이 원고 패소로 판결했지만 회사는 이미 실익을 다 챙긴 뒤였다. 노조의 파업과 동시에 회사가 신청한 가압류는 앞서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노조원들은 적게는 3개월부터 많게는 7개월까지 임금의 50%를 가압류당했다. 게다가 조합비 가압류(145억원)는 손해배상 소송이 끝날 때까지 몇 년간 풀지 않았다. 노조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회사는 민주노총 탈퇴 등을 조건으로 내세워 노조원들의 임금 가압류를 선별적으로 해제했다. 노조와 조합원을 분열시키는 수단으로 가압류를 활용한 것이다.
파업에 민사 책임 묻는 나라 OECD에서 한국이 유일
노동자들은 죽음으로 맞섰다. 2003년 1월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가 손해배상·가압류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몸에 불을 붙였다. 그해 10월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이해남 세원테크 노조위원장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와 경영계, 노동계는 손해배상·가압류를 자제하자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었지만 노동 현장의 사정은 오히려 악화됐다. 손해배상 청구는 대기업 노조부터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에 이르기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확대돼갔다. 민주노총이 집계한 자료를 보면, 2012년 현재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액은 1582억원으로 추산된다.
10년간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는 노동 현장에 노동자는 다시 죽음으로 항거한다. 2012년 12월21일 최강서(35) 한진중공업 노동자가 노조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는 “손해배상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이라고 적었다. 회사는 2011년 2월 회사 경영이 어렵다며 172명을 정리해고했다. 단체교섭에서 해결책을 찾지 못해 노조가 파업에 돌입했다. 경영진은 손해배상 소송을 내고 노조원들에게 158억원의 가압류를 걸었다. 노동법 전문가인 김선수 변호사는 “헌법이 보장한 쟁의행위를 행사했다는 이유로 노동자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묻는 것은 한국의 노동권이 19세기 이전 단계에 있음을 증명한다”고 진단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단순 파업을 이유로 민사 책임을 묻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고용·해고 문제는 근로조건 아니다?
현행 노조법 제3조를 보면,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해 발생한 재산적 손해에 대해 노동조합 및 근로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규정돼 있다. 문제는 ‘이 법에 의한’이라는 표현이다. 노조법은 ‘임금·근로시간·복지 등 근로조건을 결정할 때 발생한 분쟁’만 합법 파업으로 규정한다. 정부와 법원은 구조조정·민영화·정리해고 등은 경영권에 해당돼 이를 막으려고 쟁의행위를 하면 불법이라고 판단한다. 노동자의 생존권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고용·해고 문제가 근로조건이 아니라서 노동자가 다툴 수 없다는 어이없는 논리다. 권영국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노동위원장은 “한국 사회에서 합법 파업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이 법에 의한’이라는 표현을 삭제해 노동3권에 대한 민형사상 면책을 원칙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폭력·파괴 행위로 인한 손해는 배상 청구가 가능하도록 예외 조항을 두면 된다.”
참고 문헌 (윤동수·삶이보이는창), (김순천·후마니타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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