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정권에서 임명된’. 임채진 검찰총장 이름 앞에는 언제나 이런 수식어가 붙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당시 “좌고우면”한다며 당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에서 갖다붙인 주홍글씨다. 뒤집어 읽으면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총장이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저의가 깔려 있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2007년 11월에 임명됐다. 임기 2년을 마치고 퇴임한 정상명 총장의 후임이었다. ‘나가는 대통령’이 대선을 앞두고 검찰 수장을 새로 임명하는 것에 한나라당은 강하게 반발했지만, 공석으로 비워두기에도 애매한 시기였다. 결국 “대통령이 임기가 다 된 사람들에 대해 인사를 하겠다고 하는데 우리가 목숨을 걸고 반대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인사청문회에서 따지고 국민 편에서 판단하겠다”(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고 했다.
4대 권력기관 도움에도 국정 망친 MB이명박 대통령은 참여정부 시절에 임명된 검찰총장, 국세청장, 경찰청장과 함께 자신의 임기를 시작했다. 이른바 4대 권력기관 가운데 국가정보원장을 제외한 세 곳의 기관장을 ‘스테이’시킨 것이다. 이대통령은 집권 1년을 넘기며 이들 권력기관의 판을 자기 사람 위주로 다시 짰다. 측근과 대구·경북(TK) 인사들이 전면에 나섰다. 김성호 국가정보원장이 1년여 만에 물러나고 서울시장 시절부터 이 대통령의 ‘수족’이던 원세훈(경북 영주) 행정안전부 장관이 새 국정원장에임명됐다. 절반이나 임기가 남은 어청수 경찰청장도 물러났다. 그 자리에 경북 영일 출신의 김석기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을 내정했다. 김석기 내정자가 서울 용산 철거민 참사로 낙마하자 경북 성주·고려대 출신인 강희락 해양경찰청장을 앉혔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왕창 덴 뒤 충성도 높은 이들을 앞세워 국정 장악력을 높이려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들 권력기관의 ‘도움’이 부족해 국정이 망가졌다는 것인데, 결국 법질서를 앞세워 공안통치를 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전 정권에서 임명된 기관장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청와대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사권을 쥔 최고 권력의 의중을 파악하고 복심을 해석하고 땀나게 뛰는 권력기관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참여정부와 협의해 임명한, 그래서 반쯤은 MB 인사였던 어청수 경찰청장은 촛불집회 당시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컨테이너로 ‘명박산성’을 쌓으며 충성을 바쳤다. 종교 편향 논란의 중심에도 섰다. 이 대통령은 2011년 10월 어 청장을 청와대 경호처장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유임을 위해 박박 기었던 한상률 국세청장은 재계 620위권의 고만고만한 경남 지역 기업에 ‘국세청 속 특수부’라 불리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을 내려보내 세무조사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자, 박연차 회장의 태광실업이었다. 정치적 목적으로 이뤄진 ‘표적’ 세무조사 자료는 검찰로 넘어갔고,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나서서 노 전 대통령을 소환했다. 참여정부에서 자리를 얻고 이명박 정부에다 뼈를 묻으려 한 한상률 국세청장은 ‘인사 청탁 그림 로비’가 드러나자 검찰 수사를 피해 국외로 도피했다. ‘전 정권에서 임명된’ 임채진 검찰총장도 결국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의 서거로 임기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지난 5년을 복기해보면, 국가정보원·검찰·국세청·경찰 등 권력기관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정권 초기 ‘MB 정신’이 국정 곳곳에 스미지 않았다는 주장은 망상에 가깝다. 4대 권력기관이 대놓고 도와줬는데도 국정을 말아먹은 이명박 정부의 무능을 탓해야 옳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는 집권 첫해 검찰과 감사원을 총동원해 ‘공기업 사장 물갈이’를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10년 만에 되찾은 정권이다 보니 자리를 챙겨줘야 할 ‘자기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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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교체기에는 주요 정무직 인사나 기관장들이 퇴임하는 대통령에 맞춰 스스로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새 대통령의 국정 운영방향을 이해하는 이들이 국정 전반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다. 반면 기관장 임기제를 도입한 기관들의 경우에는 정치적 중립성 확보라는 임기제 도입 취지에 따라 주어진 임기를 채우고 물러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잘못한 게, 취임하며 이 사람들(권력기관장)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대선이 끝나고 나흘 뒤인 2012년 12월23일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기자들에게 던진 말이다. 그의 말에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뜻이 얼마나 실렸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명박정부의 연장선에서 박근혜 정부가 공유하는 여권의 ‘불안’이 엿보인다. 정권의 성패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두 달, 집권 첫해에 갈린다고 한다. 대선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야권을 지지한 48%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은 2008년 촛불집회가 증명했다. 일종의 트라우마다. 4대 권력기관에 ‘MB 사람’이 아닌 확실한 자기 사람을 심어놓고 정권 첫해를 장악하고 싶은 욕망은 강력할 것이다.
박 당선인에게 돌아가는 상황은 괜찮다. 개혁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검찰은 버거운 상대다. 자중지란에 빠진 검찰은 2012년 12월 한상대 전 검찰총장이 임기 도중 사퇴해 김진태 검찰총장 직무대행 체제로 돌아가고 있다. 후임 검찰총장을 임명만 하면 된다. 박 당선인 처지에서는 고마울 따름이다. 경찰청장의 경우는 애매하다. 김기용 경찰청장은 2012년 5월에 임명됐다. 경찰청장 임기 2년을 채우려면 1년도 넘게 남았다. 박 당선인은 ‘정치적 중립을 위해 경찰청장 임기를 보장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국정원장과 국세청장은 임기가 없다. 원세훈 국정원장은 2009년 2월부터 4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며 정보기관인 국정원을 ‘공작기관’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다. 2010년 8월 국세청장에 오른 이현동 청장 역시 TK 출신 인사들로 국세청 주요 보직을 꽉꽉 채워넣었다. 이명박 정부 TK 라인의 실세인 원세훈 원장과 이현동 청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사퇴할 것이 확실하다.
박 당선인에게는 MB 정부 5년동안 망가진 4대 권력기관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역할이 주어졌다. 박 당선인 쪽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들을 보면, 일단 권력기관 권한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검찰의 경우 대검 중수부 폐지, 검찰 수사 기능 축소, 검사장(차관급) 수 축소 등이 거론된다. 중수부 자체를 폐지하는 게 옳은지, 수사 기능만 없애는 게 적절한지, 중수부 폐지만이 능사인지를 두고 논란이 예상되지만 인수위 단계부터 개혁 논의가 시작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국세청에 대해서는 자의적인 조세범칙조사(특별세무조사), 개인과 기업의 세무 정보 독점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이 발부한 압수수색 영장 없이도 특정인의 계좌를 무제한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계좌추적 권한의 축소도 거론된다. 국정원·검찰·경찰의 무분별한 정보 수집에도 제동을 걸겠다는 얘기가 나온다. 국회, 정부부처, 기관들을 출입하며 직무와 별 관련이 없거나 직무 범위를 넘어서는 첩보·동향까지 수집하는 정보원들의 활동을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칼 대겠지만 난도질까지 하겠느냐”정권이 새로 시작할 때마다 권력기관을 뜯어고치겠다는 의지는 반복된다. 여론의 지지도 높다. 반면 해당 기관들의 반발은 상상 이상으로 조직적이고 끝을 모르게 끈질기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 기관의 수사·정보 기능이 정권에는 아쉬워지기 마련이다. 검찰 관계자는 “검찰 개혁은 어제오늘 나온 얘기도 아니어서 심리적으로 많이 누그러진 상황이다. 새로 거론된 정보원 출입 제한의 주 타깃은 국정원으로 판단된다. 검찰과 경찰은 곁가지로 끼워넣어진 것으로 본다”고 했다. 검찰 출신인 안대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에 대한 기대도 있다. “칼은 대겠지만 난도질까지 하겠느냐”는 것이다. 국세청 쪽 반응도 비슷하다. 박 당선인 쪽에서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 개편을 얘기하지만 검찰 개혁의 ‘곁가지’로 국세청이 들어간 것 아니냐는 것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조사4국의 경우 청와대나 국세청장의 하명·특명조사국이라는 얘기가 나오며 검찰의 중수부나 특수부와 비교되지만, 실제로는 기업뿐만 아니라 조세포탈 혐의가 중한 사채업자, 룸살롱 업주, 안마시술소도 조사한다”고 했다. 국세기본법에 따라 세무행정 등이 비밀에 가려져 있다 보니 극히 일부 사례가 외부에 부풀려 알려졌다는 것이다.
다른 권력기관과 달리 국정원은 조직과 운영에서 새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게 관철되는 조직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권력기관 투명화, 권력기관 힘 빼기는 정권이 늘 꺼내놓는 단골 메뉴”라면서도 “이번에는 조금 강도가 다른 것 같다”고 했다. “아직까지 유일하게 옛날 방법을 답습하는 쪽이 정보라인이다. 법과의 괴리가 가장 크다. 국정원과 경찰 정보라인을 함께 거론했다. 당선인의 의도가 읽힌다.”
‘박근혜식 선정’을 기대할 수 있는 분야가 권력기관 개혁이라는 전망도 있다. 한 법조계 인사는 “국정원 등 권력기관으로서는 자기들이 원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된 셈이다. 문재인이라는 ‘점령군’이 들어와 수술하는 것보다는 ‘우리 편’이 이것저것 바꾸자고 할 때 오히려 반발이 적을 수 있다”고 했다. 박근혜식 개혁에도 반발할 경우 ‘진보든 보수든 무조건 반발하는 꼴통 조직’으로 찍힐 수 있다는 것이다. “당선인으로서도 반발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택할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진정성의 문제다.”
진정성은 매 순간 시험을 받는다. 정권의 출발을 같이할 사람을 뽑는 인사가 진정성의 주요 시험대가 된다. 박 당선인의 사람 쓰는 기준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당을 이끌 때 인사 스타일인 ‘묻지마 밀봉 인사’를 통해 극우 인사인 윤창중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으로 임명하더니, 1월3일 이명박 대통령이 이동흡 전 헌법재판관을 새 헌법재판소장에 지명하는 데도 깊이 관여했다. 지명권자는 이 대통령이지만 사실상 박 당선인의 뜻이 실린 첫 헌법기관장 인선이라고 볼 수 있다. 대구 출신에 2006년 한나라당 몫으로 헌법재판관이 된 이동흡 후보자는 임기 6년 동안 헌법재판소에서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고수해왔다. 그가 당선 직후 말했던 “대탕평 인사”와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인다.
권력기관장 라인업 ‘박통’ 5년 예고집권 5년,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까지 권력기관 개혁과 실패의 과정을 드라마틱한 서사로 몸소 보여준 참여정부는 정권 마지막 해인 2007년 “4대 권력기관 제자리 찾기 성과가 어떤 정부도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성과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는 감시가 필요하다”고 했다.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성과는 이명박 정부 첫해부터 파산했다.
대탕평이라는 말로 또 다른 희극이 반복되려 한다. 4대 권력기관장들 라인업이 ‘박통’ 5년을 예고한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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