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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특별할 게 있나요.”
12월20일 오전.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최병승(36)씨는 이렇게 답했다. 전날 있은 대선 결과의 소회를 물었는데, 반응이 덤덤하다. 그가 전화를 받은 곳은 울산 북구 양정동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명촌중문 근처 송전탑 위 23m 지점. 건물로 치면 8층 높이쯤 될 법하다. 앙상한 겨울 벌판 너머 저 멀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송전탑 위에선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로 일하다가 2005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다 해고된 최씨와 민주노총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사무국장 천의봉(30)씨가 두 달 넘게 농성을 벌이고 있다. 2004년 고용노동부와 올해 대법원에서 현대차 생산 공정이 불법파견이라고 결정했는데도 현대차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 항의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철판을 잇대어 만든 농성장에서 생활하고 있다.
최씨처럼 이른바 ‘고공농성’이 벌어지는 곳은 전국에 모두 4곳. 경기도 평택 쌍용차 공장 인근 송전 철탑에선 한상균(51) 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과 문기주(53) 정비지회장, 복기성(36) 비정규직 수석부회장이 한 달 넘게 부당한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충남 아산의 유성기업 앞 굴다리 위에는 홍종인(39) 금속노조 유성기업 지회장이 올라가 있다. 그는 노무법인 창조컨설팅과 유성기업 사 쪽이 결탁해 ‘민주노조 파괴’에 나선 사실에 항의하며 이를 중단시켜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경기도 동두천시청 3층 건물 옥상에 있는 8m 높이의 철탑 위에선 차재만(43)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민주버스본부 정비지회 사무장 등 2명이 한 달 넘게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지난 7월 민주노총 산하 노조를 만든 성상운(52) 대양운수분회장의 부당 해고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합판 제조회사인 광원목재 노조원들과 전북 고속버스 노조원들도 최근까지 고공농성을 벌이다 내려왔다.
최병승씨는 영하 10℃ 넘게 내려갔던 12월19일 밤 휴대전화 지상 파 DMB로 대선 개표 방송을 지켜봤다. “어차피 문재인이나 박근혜 둘 중 한 후보가 될 거라 별 느낌이 없었죠. 다만 절망스러웠던 건 노 동자 후보인 김소연·김순자 무소속 후보의 득표수가 합쳐도 6만 표 밖에 안 됐다는 거예요. 아, 노동자가 정치에 주체로 나서고 적극적 인 정책을 펼치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쌍용차+용산+제주+밀양
전화기 너머로 바람 소리가 휙휙 들려왔다. 최씨 등 울산 현대차와 평택 쌍용차, 아산 유성기업 고공농성자들은 대선 기간 김소연 무소 속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대선 기간에 박근혜·문재인 후보 모두 이 들에 대한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않았다는 실망감 때문이다. 그러 나 높은 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탓에 이들 모두 투표는 못했다. 한 전 지부장은 투표를 하고 싶어 선거관리위원회에 부재자투표 신청을 했 지만 철탑 위는 부재자투표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고 공농성자들은 스마트폰 메신저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의지 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고공농성이 낯선 모습은 아니다. 어쩌면 이명박 정부 들어 익숙한 풍경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항의하며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309일 동 안 시위를 벌인 김진숙(52) 민주노총 지도위원이나 2009년 서울 용 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 망루를 쌓고 올라간 철거민들이 그랬다. 인 천 부평 공장 앞에서 복직 농성을 2100일 넘게 해온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장기 농성도 그렇다. 노동자와 정상적인 대화를 하지 않 으려는 기업, 이런 갈등을 방관하는 정부와 공권력 등 정치권이 요지 부동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거리의 농성자들은 비바람보다 더 무서운 도시의 ‘무관심’과 싸우고 있다. 서울 정동 덕수궁 대한문 앞의 농성촌 풍경을 보자. 대한문을 바 라볼 때 오른쪽 덕수궁 돌담을 따라 비닐로 만들어진 천막 3동이 서 있다. 추위를 피하려고 비닐을 두툼하게 덧댄 천막에는 “함께 살자 탈 핵, 함께 살자 용산, 함께 살자 쌍용, 함께 살자 강정”이라고 쓰인 펼침 막이 걸려 있다. 이곳에는 용산 철거민 참사 진상 규명, 제주 강정 해군 기지 건설 백지화, 핵발전 폐기, 경남 밀양의 송전탑 건설 반대를 촉구 하는 이들과 ‘쌍용차 희생자 추모와 해고자 복직을 위한 범국민대책위 원회’(이하 쌍용차범대위)가 모여 ‘함께 살자 농성촌’을 꾸리고 있다.
대한문에 가장 먼저 세워진 천막은 쌍용차범대위의 거처다. 2009 년 쌍용차 파업 이후 해고노동자 22명이 목숨을 끊은 사실을 알리 려고 지난 4월5일 세운 이 천막은 8개월 넘게 서 있다. 대한문 앞에 분향소도 있다. 그 뒤로 하나둘 생겨난 천막들은 이명박 정부 아래 에서 공권력으로부터 피해를 입었거나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통합’의 진정한 의미 살려야
그러나 올 한 해 거리의 농성자들은 강제 철거와도 싸워야 했다. 지 난 11월 도로 위 불법 시설물을 방치한다는 보수언론의 비판에 서울 중구청이 농성촌 강제 철거 방침을 밝혔다가 보류되기도 했다. 상처 받은 이들의 농성촌은 언제나 위태롭다.
하늘과 거리에서 농성자들의 아우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지 난 12월21일에는 한진중공업에서 정리해고됐다가 지난 11월 복직한 최아무개(36)씨가 노조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일어 났다. 지금 이들에게 두려운 건 어쩌면 이 싸움이 기약 없이 계속될 지 모른다는 막막함일 듯싶다. 이명박 정부가 지난 5년 동안 만들어 낸 불신과 폭력을 답습하려는 게 아니라면 새 정부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럴 때 쓰는 말이 바로 ‘통합’이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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