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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와 동갑내기 영화인생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가난한 첫 단편 출품으로 연맺은 민용근 감독… 영화 작업의 분기점마다 큰 힘된 나의 영화제
등록 2012-10-09 18:40 수정 2020-05-03 04:26
많은 신인 감독들이 비슷한 꿈을 안고 부산을 찾는다. 2010년 영화 <혜화, 동>을 들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민용근 감독(가운데). 민용근 제공

많은 신인 감독들이 비슷한 꿈을 안고 부산을 찾는다. 2010년 영화 <혜화, 동>을 들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민용근 감독(가운데). 민용근 제공

1996년. 첫 영화를 만들었다. 학교 실습작품으로 만든, 10분이 채 안 되는 길이의 16mm 흑백 단편영화였다. 제목은 . 총제작비 50만원에 가내수공업적으로 만들어진, 여러모로 가난한 영화였다. 영화가 완성된 뒤,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열린다는 어느 영화제에 우연히 출품을 했고, 얼마 뒤 운 좋게도 상영작으로 선정됐다. 그해 가을, 나는 난생처음 영화제라는 곳에 가보게 되었다.

첫 경험이었던 부산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린 첫해. 난 스물한 살이었고, 영화제 덕분에 많은 것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었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봤고, 처음으로 호텔에서 잤으며, 내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수많은 영화배우들을 보며 남몰래 신기해했던 기억,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을 보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 이름만 듣던 까마득한 선배 영화인들과 남포동 길바닥에 앉아 밤새 술을 마셨던 기억까지. 세상 물정 몰랐던 대학 2학년생이 겪는 ‘첫 경험’들은 마냥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물론 달콤한 기억만 있던 것은 아니다. 단편경쟁 부문에 초청된 다른 영화들에 비해 내 영화는 여러모로 너무 초라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해, 앉아 있던 좌석 밑으로 그대로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덕분에, 영화를 결코 쉽게 만들어선 안 되겠구나, 하는 첫 각성 역시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하게 됐던 것 같다. 나에겐 첫 경험이었던 부산국제영화제도, 그 당시 첫 회였다.

그 뒤, 학교를 졸업하고 영화와 상관없는 회사에 다니느라 10년 동안 영화제를 찾지 못했다. 2006년에 만든 이란 단편영화로 10년 만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10년 새 영화제는 서먹할 정도로 몰라보게 화려해졌다. 그래도 반갑고, 고마웠다. 4년 뒤, 2010년에는 첫 장편영화인 으로 다시 부산국제영화제에 갔다. 나의 첫 영화와, 다시 영화를 하기로 결심한 뒤 만들었던 첫 영화, 그리고 첫 장편영화의 수상까지. 부산국제영화제는 유독 내 영화 작업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큰 힘이 되었다. 올해엔 단편영화 심사를 위해 부산을 찾았다. 나와 비슷한 꿈을 꾸고 있을 다른 감독을 만난다는 것, 이 또한 내겐 남다른 의미다.

올해는 지난해 처음 모습이 공개됐던, 영화제를 위한 영화관인 ‘영화의 전당’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해다. 영화제 기간도 하루 더 늘어났고 어린이와 노인을 위한 프로그램 상영이 시작됐다고 한다. 보다 폭넓고 다양한 관객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나의 첫 영화와, 다시 영화로 돌아온 뒤 만들었던 첫 영화, 그리고 첫 장편영화에 수상까지. 부산국제영화제는 유독 내 영화 작업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큰 힘이 되었다.





아득하고도 설레는 상상

나와 부산국제영화제는 동갑이다. 17년째를 맞이하며 매해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영화제와, 첫 영화를 만든 지 17년째가 되어가는 나. 영화 나이로 치자면 17살 동갑내기인 우리 둘은 1996년, 그 첫해를 함께 시작했던 만큼, (적어도 내겐) 오래도록 각별한 사이로 남게 될 것 같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미래의 그 어느 해. 그때의 영화제와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건 무척이나 궁금증을 자극하는, 아득하고도 설레는 상상이다.

민용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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