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길었던 여름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참으로 긴 겨울을 기다리는 참이다. 그 사이에 찾아드는 꿀 같은 가을볕을 그냥 보낼쏘냐. 무르익음은 곧 허물어짐의 다른 말이다. 10월 잠깐, 무르익은 가을은 절정을 보이고는 곧이어 찬바람을 내뿜기 시작할 것이다. 나가 놀기 좋은 철도 이달로 끝이란 얘기다. 짧아서 아쉽고, 반짝여서 아름다운 이 계절을 방구석에서 논할 참인가. 소풍의 계절이다. 신을 꿰어 신고 길을 나서야 한다. 놀 줄 모르는 어른들을 위해 각 지역에서는 가을 축제로 놀이판을 벌였다. 에서 10월 가을 축제를 정리해봤다. 이제 당신이 할 일은 형광펜을 꺼내 가고 싶은 축제에 줄을 치고 날짜를 맞춰 떠나는 것이다._편집자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2년 전국 시도별 지역 축제 개최 계획에 따르면 올해 총 758개의 축제가 전국에서 열린다. 곳따라 일따라 깨알 같은 축제들이 많다. 흥도 좋고(충남 천안흥타령축제 10월2~7일, 충북 영동난계국악축제 10월4~7일), 볼거리(경남 진주남강유등축제 10월1~14일)도 좋다. 바람에 음악이 실려온다면 더 좋겠고(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10월12~14일, 그랜드민트페스티벌 10월20~21일), 탄탄한 작품들로 채워진 스크린이 눈앞에 펼쳐져도 좋겠다(부산국제영화제 10월4~13일). 그러나 모든 걸 제쳐두고, 노는 데 먹는 게 빠져서야 되겠나. 제철 재료가 가장 풍성한 계절인 만큼 가을 축제는 먹거리로 넘쳐난다. 한우(강원도 횡성한우축제 10월17~21일), 떡과 술(경북 경주 떡과 술잔치 10월13~17일) 등 배부른 축제들이 그득하다. 김장철을 앞둔 탓인지 새우젓 축제는 무려 세 지역(서울 마포, 인천 강화도, 충남 홍성)에서 열린다.
산속 뒤져 송이 찾는 ‘송이 보물찾기’ 인기
10월3일 강원도 양양에서 송이축제가 시작됐다. “10시까지 운영본부로 오시오.” 떠나기 전날 송이축제 담당자 양양군청 문화관광과 김상철 주무관에게 취재를 가겠노라고 전화했더니 무뚝뚝한 강원도 남자는 거두절미 오전 10시까지 양양에 당도하라 일렀다.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 추석의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았지만, 서울에서 양양까지 산의 영물인 송이를 찾아 떠나는 긴 길에서는 눈을 붙이기 어렵다. 서울과 강원도 사이를 오가는 길은 축제 장소보다 더 축제 길 같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산은 등성이마다 안개를 걸치고 있었다. 어슴푸레 안개를 어깨에 걸치고 있던 산들은 쨍한 햇볕 아래 접어들자 화사했다. 여름의 짙은 초록을 벗고 울긋불긋 물든 모양새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좀더 높고 깊은 산으로 진입할수록 풍경은 더 아름다웠다. 한계령을 지나 설악산 대청봉을 멀리 보며 서울에서 197km. 어느새 양양이다.
양양송이축제는 올해로 16번째를 맞았다. 송이는 인공 재배가 어렵다. 살아 있는 소나무 아래 자라고 서늘한 기온을 좋아하는 이 버섯을 얻으려면 눈썰미 좋은 사람이 가을 산을 부지런히 뒤져야 한단다. 송이는 습한 기운을 좋아하는 덕에 태풍이 잦았던 올해는 송이 풍년이란다. 풍년이라고 해도 몸값 높은 송이를 우후죽순 쉽게 거두기는 어렵다. 서민들에게는 송이 가격이 예년보다 조금 떨어지는 정도라 귀한 송이를 찾아 축제로 굳이 발걸음하겠다고 예약한 사람이 2천 명을 넘겼다.
관광객한테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송이 보물찾기’ 행사란다. 산속을 뒤져 송이를 찾는 이벤트다. 학창 시절 소풍 때 선생님들이 선물이 적힌 쪽지를 여기저기 흩어놓듯 행사 관계자들이 산속 정해진 구역에 송이를 숨겨놓았다. 송이 캐기는 아니고 말 그대로 송이 찾기 ‘체험’인 셈이다. 산에 뿌리내린 송이를 직접 찾아나서는 줄 알고 심마니가 된 심정으로 결기에 가득 차서 올 일은 아니다. 일부러 숨겨놓은 송이를 찾는 게 무엇이 어렵겠나. 향도 모양도 치밀해 보이는 송이를 부리나케 캐고 내려와 관광객을 위해 마련했다는 송이주와 송이요리나 실컷 맛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심봤다!” 누가 외쳤다. 수풀 속에 숨겨놓은 송이는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산비탈에 서서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라, 나무 막대기를 이용해 수풀 사이를 관찰하라는 매뉴얼을 모범생처럼 따랐지만 송이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외치는 심마니들의 탄성을 들으며 그들의 지난밤 꿈자리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나이 들어 산에 들어와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부러 숨겨놓은 먹거리도 못 찾는데…. 포기하는 마음으로 잡생각이나 흘리고 있는데, 옆에서 함께 헤매고 있던 유진북(65·서울 강서구 우장산동) 할아버지가 “심봤다”를 외쳤다. 괜스런 배신감이 들었다. 송이를 찾은 것이 죄가 돼버린 할아버지를 원망하며 수풀을 다시 뒤적이는데, 바로 뒤에서 묵묵히 송이를 찾던 정보성(8·서울 광진구 광장동) 어린이도 송이를 치켜들었다. 송이를 찾은 사람들은 송이주로 하산주를 하기 위해 줄줄이 산을 내려갔다. 행사 관계자들은 뒤처진 이들에게 ‘나머지 공부’하시는 분들 힘내시라며 격려했지만 이미 낭패감은 커졌다. 지역의 큰 축제라 그런지 지상파 3사 지역 방송이 모두 출동했는데, 이러다간 못 찾는 사람 대표로 인터뷰를 당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행사 관계자에게 힌트를 얻어 겨우 한 송이 ‘득템’하고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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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개의 소원이 강물타고 흐르다
다시 돌아온 행사장은 양양에 막 도착했을 때보다 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저런 체험 행사장과 공연 무대를 사이에 두고 장이 섰다. 양양 지역 송이축제장은 커다란 놀이터인 동시에 대목을 맞은 장터다. 송이축제장에 선 장에서는 짙은 송이향과 함께 장사꾼과 소비자들의 흥정이 너울댔다. 전통적 축제가 지역 주민 중심의 제의적 성격이 강했다면 현대적 축제는 관광상품화한 경향이 강하다. 김창수 경기대 교수는 에서 “지역 축제란 한 사회의 정신적·물질적·감정적·지적인 것의 복합물로서 예술과 문화를 포함한 생활공동체 구성원들과 방문객들의 잔치”라고 말했다.
지역 축제에 지역의 삶과 문화적 요소가 잘 녹아 있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현재 국내 지역 축제, 특히 특산물을 내세운 축제는 ‘물질적’이라는 단어에 많은 부분을 기대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축제는 소비하고 즐기려고 지역을 찾은 외지인과 장사에 나서거나 혹은 축제와 상관없이 일상을 보내는 지역 주민들로 구분된다.
물산 축제나 먹거리 축제처럼 소비하기 위한 축제가 아니라면 어떨까? 지난 10월1일 경남 진주 남강에 축제의 작은 불이 조롱조롱 켜졌다. 축제는 초혼점등식으로 시작한다. 매년 10월이 되면 촉석루와 진주 남강 주변의 다리는 알록달록 고운 전등이 켜지고 강물에 비추어 제 빛을 두 배로 키우기로 유명하지만 강물에 띄워보내는 등들은 작고 애달프기만 하다. 400년 전 임진왜란 당시 남강과 대사지에 둘러싸인 물속의 성, 진주성에서 왜병들에게 포위됐던 병사들이 강물에 유등을 띄웠다. 그러나 가족에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려 했던 절박한 3500명의 군사와 7만 명의 백성은 왜군에게 몰살당했다. 남강을 가로지르는 진주교의 길이만 272m. 그날 진주 남강은 피로 벌겋게 물들었다고 한다. 남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제로 손꼽히는 남강유등축제가 원혼을 달래려는 슬픈 사연으로 시작한다는 점은 기이하면서도 애틋하다. 서영수 진주남강유등축제 예술총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레이저나 불꽃이 내는 직설적인 빛보다는 한 꺼풀 덮인 어스름한 불빛이 우리 축제의 본령이다. 올해는 시집가는 모습, 장례식, 군사교대식 등 당시 모습을 등으로 만들어 진주성 안을 400년 전의 조선시대 모습으로 꾸미고 공연에서도 배를 띄운다. 축제 마지막 날 불을 끄면 이 모든 애틋한 사연은 덮이겠지만 화려한 축제가 아니라 빛에 소원을 담는 축제로 거듭나겠다는 소망이다.” 지난 10월1일에는 유등을 띄워보내려고 남강변에 10만 명이 모였다. 10만 개의 소원이 강물을 타고 흘렀다.
같은 날 경북 안동은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로 들썩였다. 10월7일까지 열린 국제탈춤페스티벌은 요즘 각광받는 전통문화 축제로 손꼽힌다. 이 지역 축제는 지역 문화활동가와 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연출자만 40여 명이 나섰다. 안동 축제라지만 경남 진주, 전남 목포에서 건너온 마당극팀들과 외국에서 온 거리공연팀이 안동을 커다란 마당으로 만들었다. 점잖은 도시에 탈춤 기간에는 흥분이 넘친다. 서울에서 온 백성자(45)씨는 “처음에는 아이들 체험 삼아 왔는데 막상 탈을 쓰고 보니 어른들도 딴사람이 된 듯 축제에 끼어들었다”며 “생각해보니 축제는 원래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축제 조직위원회 권두현 사무처장은 “우리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거리 퍼레이드다. 해가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으며 춤출 때가 가장 좋다. 점점 더 길거리 춤판을 벌이는데 주력한다”고 했다. 외지 사람들에게 영 무뚝뚝하던 안동 사람들도, 15개 참여 극단 중 어느 배우인지도 모를 사람들도 탈을 쓰고 춤을 추며 거리를 걸었다. 매일 밤 사이렌 소리가 퍼지면 모두 일제히 거리무대로 뛰쳐나와 대동 난장을 벌이기도 했다. 축제는 너와 내가 구별 없는 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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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의 축제가 가진 의미
그래서 이제 어떤 놀거리를 찾아 떠날 것인가. 가을볕에 늘어선 전국의 놀이판들은 대동놀이형 지역 축제라면서도 동시에 저비용·고부가 상품쯤으로 여겨진다. 지난해에는 열렸으나 올해는 문 닫은 10월 축제도 여럿이다. ‘잘 놀자’는 축제의 본기능과 멀어질수록 축제의 생명은 짧았다. 축제는 그 본성이 나누고 하나되는 동시에 먹고 마시며 소비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오래 이름값을 유지해온 지역 축제 프로그래머들은 그 갈피에서 고민이 깊다고 했다. 올해 양양송이축제를 준비한 양양군청 김상철 주무관은 축제를 거듭하며 과거와 현재의 축제가 가진 의미의 경계를 허물려고 애쓴다고 밝혔다. “송이는 조선 때 임금에게 바치던 진상품이었고, 왕조시대가 끝나고 2차 대전 후에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전량 일본에 수출되다시피 했다. 워낙에 내국인들의 소비가 적었던 터라 그동안은 양양송이를 알리는 데 주력했다면 앞으로는 다양한 관람객을 유치하고 각 지역 주민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현장을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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