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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철(31·가명)씨는 10년간 여러 피임법을 거친 끝에 올해 들어 콘돔에 정착했다. 예전엔 주로 여자친구의 배란주기를 계산해가며 섹스를 했다. 체외사정도 단골 피임법이었다. 여자친구에게 피임약도 먹여봤다. 그러나 서른을 넘기자 문득 임신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전셋방 한 칸 마련할 돈도 없는데 덜컥 여자친구가 임신하면 어쩌나 불안했다. 그렇다고 여자친구에게 계속 약을 먹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콘돔으로 바꾼 뒤 마음의 평온을 얻고 섹스에도 전념할 수 있게 됐다.
피임약 먹는 선미씨, 난관수술해야 한다면…이선미(32·가명)씨는 1년 전부터 꼬박꼬박 사전피임약을 챙겨 먹는다. 7년 사귄 남자친구지만 매번 “콘돔을 쓰라”고 말하는 데 지쳐서다. 애원하는 느낌이 싫었다. 남자친구가 섹스를 하다 콘돔을 주섬주섬 찾으면 김도 샜다. 어쩌다 콘돔을 준비 못해 체외사정이라도 하면 한 달 내내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씨는 피임약을 복용하며 자신의 몸과 섹스를 조절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뒤 남편이 정관수술을 꺼린다면 난관수술을 할 생각이다.
‘화성 남자’의 피임과 ‘금성 여자’의 피임은 이렇게 다르다. 매일매일 이런 이들이 서로를 만나 성관계를 갖는다. 똘똘하고 대화하는 남자가 있는 반면, 무식하고 폭력적이고 꽉 막힌 남자가 있다. 야무지고 확실한 여자가 있고, 체념하고 말 못하는 여자가 있다. 계획이나 준비 없는 임신은 남녀 모두에게 대부분 큰 짐이다.
다들 어떤 피임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취업 포털 사이트 ‘인크루트’에 의뢰해 성인 남녀 1334명(미혼 744명, 기혼 590명)의 피임법을 살짝 들춰봤다. 통계로는 읽을 수 없는 내밀한 얘기들은 직접 만나 실토하게 만들었다. 서로에게 안전하고 편리하면서 성적 만족감도 살려주는 피임법을 찾아보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쉽게 따라주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자꾸 어긋난다.
낙태가 많다더니, 뜻밖에도 성인에게 피임은 일상이다. 미혼의 69%(514명)가 평소 ‘반드시 또는 대부분 피임을 한다’고 답했다. 기혼은 이보다 낮은 56.4%(333명)가 ‘반드시·대부분’을 택했지만, 이 역시 절반을 훌쩍 넘는 수치다. 이들은 모두 콘돔을 가장 선호했다. 콘돔 피임법을 택한 이들은 전체의 58.8%(784명)였다. 이는 정부 공식 집계보다 높은 수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9년 전국 출산력 및 가족보건·복지 실태조사’를 보면, 콘돔 사용률은 25.0%에 그쳤다. 그나마 2000년 16.5%, 2003년 8.5%, 2006년 19.2%로 경향적으로 높아진 결과다. 이 조사는 가임기인 15~44살 기혼 여성 4868명을 통해 부부들의 피임법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인크루트 설문조사와 단순비교하기 어렵다. 부부들은 정관·난관수술 등 피임 선택지가 다양해 미혼 커플보다 콘돔을 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인크루트 설문에서는 기혼 남녀 가운데 절반 이상(53.3%, 308명)이 콘돔 피임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전통’ 피임법인 자연주기법은 전체의 17.1%(228명)가 활용한다고 했다. 콘돔 피임법에 이어 둘째로 높은 선호도다. 기혼자가 미혼보다 이 방법을 더 선호했다. 최근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 재분류안을 두고 논란이 거센 사전피임약 선호도는 8.5%(113명)로 나왔다. 정부 통계에선 여성 배란을 억제하는 사전피임약을 사용한다는 이들이 2.7%에 불과하지만, 20대 연령에선 이 비율이 16.4%로 올라간다. 인크루트 조사에서 가장 확실한 남성 정관수술을 택한 이들은 4.6%(62명)였다. 영구 피임법인 만큼 이 방법을 택한 미혼자 비율은 0.9%(7명)에 그쳤다. 기혼자의 정관수술 비율은 9.3%(55명)로 올라가지만 정부 통계(21.0%)보다는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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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자들은 피임 성공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44%(587명)가 ‘피임의 안전성’을 최우선 기준으로 꼽았다. 그다음으로 ‘몸에 끼치는 영향’(14.9%, 199명), ‘사용·착용 편의성’(12.7%, 169명), ‘성관계 중 느낌’(12.3%, 164명)을 중요하게 봤다.
설문조사 결과만 보면, 응답자들은 피임 중요성을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피임기구를 사용하거나, 피임수술 등 피임 실패 확률이 낮은 피임법을 쓰는 비율이 전체의 80%에 육박한다. 콘돔 사용이나 정관수술 등 남성 주도의 피임을 하는 경우도 60%를 넘었다. 최안나 산부인과 전문의는 “기혼 여성들이 병원에 피임 상담을 받으러 오기도 하는 등 예전보다는 피임에 더 신경 쓰는 분위기다. 낙태가 불법이라는 사실도 이제는 조금씩 인식하고 있다. 다만 콘돔을 착용하고 피임약을 먹는다고 끝이 아니다. 제대로 사용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종교적 차원의 논란은 남아 있지만 이제 성관계를 임신과 출산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시선은 드물다. 당연히 피임기구의 ‘위상’도 달라졌다. 콘돔, 루프(자궁 내 피임장치), 사전·응급피임약 등을 성적으로 문란한 소수가 쓰는 ‘섹스 도구’로 보기도 했지만, 이제는 ‘에티켓’으로 대접받는다. 남동규(27·가명)씨는 “기본적으로 나를 위해 콘돔을 사용한다. 마음이 맞으면 여자와 하룻밤을 즐기기도 하는데 애가 생기거나 병에 걸리면 곤란하다. 상대 여자에게도 기본 매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달라진 피임 인식에는 남녀 관계의 변화도 반영됐다. 여성들은 ‘섹스는 남성, 피임은 여성’이라는 공식을 거부한다. 임신과 출산의 주체인 여성은 ‘준비 안 된 임신’에 대한 공포가 크다. 이제는 남성도 그 공포를 나눠가지기를 요구한다. 김도희(33·가명)씨는 “섹스 못하는 남자는 용서해도, 피임 제대로 안 하는 남자는 못 참는다”고 했다. “섹스에 대한 불만족은 참거나 이야기를 하면서 맞춰가면 된다. 그런데 피임 불만은 나를 늘 불안하게 한다. 얘기를 해도 안 고친다면 그건 나와의 관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젊은 여성들은 피임에 더 솔직하다. 20대에선 콘돔이나 피임약 등 피임 실패율이 낮은 피임 방법에 대한 선호도가 유독 높다. 이들은 학창 시절 비교적 제대로 성교육을 받은 세대다. 다양한 피임법을 알고 있고, 여성도 성적 만족을 즐기는 주체로 인식한다. 피임 실패가 가져오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에 준비가 철저하다.
정다은(20·가명)씨는 올해 초부터 사전피임약을 먹고 있다. 원래는 콘돔을 썼지만 둘 다 성적 만족이 덜했다. 돈도 많이 들었다. 콘돔 비용으로 한 달에 3만~4만원이 들었다. 사전피임약은 한 달에 7천~8천원이라 부담이 덜했다. “아직 임신을 책임질 준비가 안 됐다. 그런데 피임은 어렵고 늘 불안하다. 그래서 남자친구와 많이 이야기를 한다. 콘돔에서 피임약으로 바꿔서 여러모로 만족스럽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부작용 때문에 사전피임약을 의사 처방을 받는 약으로 바꾼다는 뉴스를 봤다. 다시 고민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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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에 야박하다고 여성들의 타박을 받던 남자들도 피임 책임을 공유하려 한다. 김동우(39·가명)씨는 콘돔을 쓰는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아내에 대한 배려다. 아내가 약을 먹거나 시술을 받으면 나야 편하겠지만 아내 몸에 해가 될까봐 걱정된다. 나를 위한다는 목적도 있다. 아내가 콘돔을 안 쓰면 굉장히 짜증을 내는데, 그럼 나도 피곤해진다.”
물론 화성과 금성은 여전히 다른 궤도를 돈다. 피임에 대한 사회의 눈높이는 이만큼 높아졌는데, 아직 몸으로 받아들일 준비는 안 된 경우다. 일부 남성은 안전한 섹스와 성감 사이에서 고민한다. 콘돔을 준비했다가도 “오늘만 그냥 하면 안 되냐”고 물어보는 남성들이다. 최경수(33·가명)씨는 평소 콘돔을 쓰지 않는다. 대개 여성의 배란기를 피해 섹스를 한다. “콘돔을 사용하면서까지 굳이 섹스를 해야 할 의미를 모르겠다. 체외사정을 해도 피임에 실패하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다.”
편법도 쓴다. 상대방에 따라 피임이 달라진다. 박경호(28·가명)씨는 여자친구와 섹스를 할 때는 콘돔을 꼭 착용한다. 임신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서다. 그러나 클럽 등에서 만난 여성과 하룻밤을 보낼 때는 여성이 먼저 콘돔을 요구하지 않으면 체외사정을 한다. “어차피 안 볼 사이다. 자기 몸은 여성 스스로 챙겨야 한다.”
여성에겐 피임에 당당해지라는 사회의 요구가 벅차다. 성에 대한 의사표현을 주저하게 된다. 남성에게 ‘노는 여자’ ‘밝히는 여자’로 비칠까 두렵다. 성관계 중 남성에게 ‘콘돔을 착용하라’고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면 ‘그만하라’고 말하는 건 더욱 그렇다. 강인희(34·가명)씨는 “한번은 남자와 갑자기 성관계를 하게 됐다. 먼저 콘돔을 끼라고 요구하기가 쑥스러워 참았다. 모텔이라 콘돔이 비치돼 있었다. 남자가 당연히 챙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말도 안 하고 체내사정을 했다. 성폭행당한 것처럼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고 했다.
피임 갈등은 미혼 커플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부들은 더 심한 갈등을 겪기도 한다. 준비 안 된 임신에 대한 두려움은 미혼과 똑같지만, 피임에 대한 긴장감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부부들은 피임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섹스를 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의사소통은 미혼 커플보다 활발하지 않다. 남편은 피임의 책임을 전적으로 아내에게 떠넘기고, 아내는 남편을 설득하다 포기한다. 실제, 부부는 미혼 커플보다 피임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
보건복지부의 ‘전국 인공임신중절 변동 실태조사’(2011)를 보면 미혼 여성의 인공임신중절률(낙태율)은 14.1인 반면, 기혼 여성은 17.1이다. 이 비율은 지난해 여성 1천 명당 이뤄진 낙태 건수를 뜻한다. 김숙희(36·가명)씨는 딸 둘을 낳은 뒤 일을 하려고 더는 자녀를 갖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남편은 정관수술은 하지 않았고 콘돔도 내킬 때만 사용했다. 덜컥 아이가 들어서자 김씨는 낙태를 선택했다. 그리고 남편 몰래 루프를 착용했다. 루프를 시술받고 나오던 날, 그는 부작용으로 병원 앞에서 기절했다. “루프 부작용이 생각보다 컸다. 지금도 가끔 질 출혈이 일어나고 피부에도 문제가 계속 생긴다. 남편은 정관수술은 무섭다고 하고 콘돔은 느낌이 안 좋다고 한다. 아이가 생기면 낳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난 일을 해야 한다. 피임이 절실하다.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루프를 뺄 수 없다.”
피임을 했더라도 임신이 되기도 한다. 제대로 피임했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착각일 때가 있다. 정확하게 피임을 하지 않은 탓이다. 콘돔을 쓰더라도 사용법에 따라 피임에 실패할 확률은 2%에서 15%까지 고무줄이다. 호르몬을 통제하는 사전피임약도 실패율이 0.3~8%로 차이가 크다. 신정호 고려대 의대 교수(산부인과)는 “콘돔과 피임약을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정확하게 쓰는 법을 알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콘돔 포장지에 적힌 정확한 사용법부터 숙지하라는 얘기다.
남녀의 직관에 의존하는 자연주기법이나 체외(질외)사정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자신이 쓰는 피임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머뭇거려진다면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피임 지식이 너무 없다. 예를 들어 많은 남성이 콘돔으로 피임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 생리주기에 맞춰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체내사정을 했다면, 그건 콘돔 피임이 아니라 자연주기법 피임이다. 여성들도 남성에게 제대로 피임을 요구 안 하다가, 성관계를 가진 다음날 아침 응급피임약을 받으러 온다. 피임에 대한 무지는 교육받은 정도, 지위, 종교 여부와 전혀 상관 없다. 피임을 막연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 임신이 정말 두렵다면 의지를 갖고 정성을 들여야 한다.”(최안나 전문의)
남녀가 피임에 이르는 ‘과정’도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섹스는 남녀가 만족과 책임을 공유하는 과정이다. 한쪽은 만족감만을 느끼고, 책임은 상대방에게 전가하려 한다면 정상적인 피임이 아니다. 피임 문제가 남녀의 권력관계 문제로 확대되는 건 이 때문이다. 성교육 기관인 ‘푸른아우성’의 이재경 사무국장은 “피임 실천은 남녀가 함께 해야 하는 중요한 의사결정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남성이 섹스를 주도하며 여성에게 ‘임신은 여자가 하는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든가, 여성이 남성과 대화도 시도하지 않고 ‘임신은 내 책임이니까 내가 알아서 해야지’라는 태도를 보이면 평등한 남녀 관계가 아니다. 남녀 사이에 권력이 동등하게 배분되지 않으면 피임에 대해 합리적인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렵다.”
피임에 이르는 ‘과정’도 중요해
평등한 피임 관계를 만드는 방법은 솔직한 대화다. 남성은 여성이 임신에 대해 갖는 공포에 귀기울여야 하고, 여성은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추혜인 살림의료생협 전문의(가정의학)는 이렇게 당부한다. “피임 대화가 제대로 안 되는 커플이 많다. 대부분 여성 혼자 고민하고 나중에 남자한테 부탁하는 방식이다. 성적인 관계가 무르익어서 대화를 시도하면 이미 늦는다. 남편이나 연인이 있다면 당장 남녀가 어떤 방법으로 피임할지, 피임에 실패하면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피임 불통’ 시대, 지구 남자와 지구 여자는 ‘피임 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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