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후반, 청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후에 밀라노공국을 통치하게 되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편지 한 통을 띄운다. “저는 매우 가볍고 튼튼한 다리 제작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운반하기 쉬워 적을 추적할 수 있고, 필요할 땐 적을 피할 수 있습니다. (중략) 겸허한 마음으로 제 자신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다빈치는 스포르차궁에서 일자리를 얻으려고 자신의 능력을 열거한(무려 10가지가 넘는!) 편지를 썼다. 500여 년 전 이력서인 셈이다.
191개 기업 입사지원서에 학교명 물어
이력서의 출생연월은 정확하지 않다. 20세기 들어 인적 사항 등 개인정보가 포함된 이력서 양식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력서에 스펙의 대명사 ‘토익 점수’가 진입한 건 1990년대 중반이다. 1995년 삼성·현대 등 대기업은 영어 필기시험을 폐지하고 이를 토익 점수로 대체했다. 기업들이 이력서나 입사지원서를 온라인으로 제출받기 시작한 때도 이즈음이다.
학력·가족관계·신체조건 등 ‘신상을 탈탈 터는’ 이력서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채용 과정에선, 언제든 부당한 차별이 일어날 수 있다. 이력서에 사진을 첨부하라는 요구는, 결국 외모를 보겠다는 것이다. 구직자가 너무 뚱뚱하거나 인상이 험악해 보이면 감점 요소다. 2011년,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신입사원 채용 동향을 조사한 결과 기업들이 지원자 스펙보다 면접을 중요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유가상장기업 200개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191개 기업이 입사지원서에서 학교명(191곳)을 묻고 있었다. 대학 본교·분교 여부(42곳), 편입 여부(50곳), 주·야간 여부(65곳) 등 상세한 학력 정보 제공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200개 기업 중 절반 이상이 이력서나 입사지원서에 키, 몸무게, 시력, 혈액형, 색맹 여부, 질병 유무 등 상세한 신체조건 명시를 요구했다. 진보신당은 4·11 총선을 앞두고 사회적 차별 금지법을 제정해 채용 때 직종과 상관없는 학력·스펙 요구를 제한하자고 제안했다.
21세기가 도래한 지 이미 10년이 넘었건만, 이력서 모양새와 채용 방식은 여전히 산업사회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최동석 한양대 아너스프로그램(HP) 특임교수는 이런 현실이 답답하다. “기업에 ‘학교 간판·성적 등은 성과와 무관하다. 그러니까 거기에 현혹되지 말라’고 충고한다. 기존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이를 다시 재현시키는 능력을 보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 실패했을 때 잘못된 점을 깨닫는 능력, 창의성, 성취 지향성 등 밖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개인의 내적 속성인 역량을 중심으로한 학교 교육과 채용이 이뤄져야 한다. 철학이 바뀌어야 한다.”
생존을 향한 절박함
이력서를 놓고 끙끙 앓는 건 젊은 취업준비생들만이 아니다. 취업 전문 포털 ‘잡코리아’의 황선길 본부장은 간혹 짠한 편지를 받는다. 60대 이상의 어르신들이 ‘직업을 찾습니다’란 글귀로 시작하는 이력서를 보내온다. 컴퓨터에 익숙지 않은 어르신들은 주로‘문방구 이력서’를 애용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A4용지보다 작은 소박한 이력서를 손글씨로 꾹꾹 채워나갔을 것이다. 지난 3월 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 이윤형(36)씨에겐 이력서가 희망이 아닌 절망이었다. 경기도 평택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여러 지역을 전전하던 그는 생전에 “주위에서 나를 빨갱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지? 취업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을 동료에게 털어놨다. 무심히 폐기되는 대량의 이력서 더미 위로, 생존을 향한 절박함이 허공을 떠돌고 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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