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먹을 것이 없다. 넘쳐나는 저질의 위험한 먹거리들 사이에서 가족의 밥상과 건강을 지키려는 주부들의 노력은 필사적이다. 그러나 소비에 필요한 정보와 자원의 습득 능력은 계층마다 균등하지 않다. 서울에 사는 두 가족의 일주일 식생활을 통해 먹거리 양극화 실태를 살펴봤다. 취재에 응해준 장미영(49·가명·서울 진관동)씨와 최명자(51·가명·서울 성수동)씨는 월 가계소득이 각각 500만원과 300만원 안팎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가계 평균소득(363만원)에 비해 조금 많거나 약간 적다. _편집자
자전거는 군데군데 녹이 슬었다. 서울 은평뉴타운의 34평형 아파트에 사는 장미영씨는 장을 보러 갈 때 분홍색 자전거를 탄다. 앞바퀴 위에 바구니가 달렸다. 느긋하게 페달을 밟으면 10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생활협동조합 ‘한살림’ 매장이 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인터넷으로 장을 보지만, 그날그날 필요한 게 있으면 이곳을 찾는다. “옛날엔 유기농이 정말 비쌌는데, 요즘에는 가격이 많이 내렸죠. 일반 마트 상품보다 더 싼 경우도 있어요.”
유기농을 합리적 소비로 여기는 중상층
유기농 식품은 2000년대 초 한 방송사의 식생활 다큐멘터리를 계기로 세간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채식 열풍이 불었고, 채소류 소비량이 급증했다. 이즈음 ‘유기농업기사’ 같은 당시로선 생소한 자격증도 등장했다. 하지만 ‘웰빙’(Well-being) 열풍이 한창이던 2000년대 중반까지도 장씨는 유기농 식품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건강에 유별난 관심을 가진 부자 동네 얘기라고만 생각했다. 이런 그가 한살림을 찾기 시작한 건 2008년부터다.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파동으로 전국이 시끄러운 해였다. 장씨는 정부가 하는 이야기를 거의 신뢰하지 않았다. 그즈음 박사학위를 마친 남편이 정부 산하 연구재단에 자리를 잡아 수입이 안정됐다. 마침 이사 온 집 가까운 곳에 유기농 식품점 3곳이 있었다. 한살림은 장씨 집과 거리가 가장 멀었지만 협동조합 형태라 물건값이 셋 중에서 가장 저렴했다. 별 망설임 없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매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메모지를 꺼내 장 볼 품목과 수량을 확인하는 것이다. 매장에서 사는 물건은 대개 메모 내용을 벗어나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해 판매 품목을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은 매장에 비치된 소식지를 살핀다. 장씨는 “소식지에는 상품 정보가 자세히 나와 있고 추천 메뉴도 있어 가끔은 요긴하다”고 했다.
유기농 매장의 상품이라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는 것은 아니다. 잼을 살 때도 5400원짜리 딸기잼보다는 3500원짜리 사과잼을 선택한다. 한우 고기를 살 때엔 유기농법으로 길렀다는 ‘유기 한우육’보다 일반육을 고르는 식이다. “조금 배신감을 느꼈어요. 유기 한우라며 얼마 전부터 팔기 시작했는데, 일반 한우와 가격 차이가 너무 커요. 아직까지는 감히 살 엄두를 못 내겠어요.” 이 매장의 유기 한우는 보통 한우육보다 부위별로 30∼50% 비싸다. 인공 사료를 먹이지 않은 탓에 ‘마블링’ 상태가 떨어진다는 얘기도 들린다.
장씨가 유기농 매장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생산과정을 신뢰할 수 있어서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로 운영되는 곳인 만큼, 적어도 유전자변형식품(GMO)이나 방부제, 색소 따위의 식품첨가물이 든 식품은 없을 거라 믿는다. 식품의 질에도 강한 신뢰를 나타냈다. “채소는 확실히 여기 게 신선하고 맛이 좋아요. 당근은 속이 여물고 단단해서 확실히 맛있어요.”
장씨네 집에서 사용하는 밥그릇은 보통의 밥그릇보다 크기가 작다. 소식이 생활화된 탓이다. 군대 간 큰아들을 제외한 네 식구가 8kg짜리 쌀 두 포대를 사면 한 달은 먹는다. 음식도 짜지 않게 만든다. 요리학원을 다니며 정량으로 조리하는 방법을 익힌 게 도움이 된다. 둘째아들은 엄마가 요리학원을 다닌 이후로 음식 맛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공부하는 아들의 체력 관리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쇠고기를 먹고, 과일도 매일 상에 올린다. 외식하는 일도 드물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저녁을 집에서 먹는 남편의 오랜 습관 때문이기도 하다. 함께 사는 시아버지도 바깥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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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발표 불신하는 주부들
남편은 아침에 맨밥만 먹고 출근하는 일이 잦을 만큼 위장 기능이 좋지 않다. 예민한 성격에 오랜 기간 연구직으로 일하며 얻게 된 직업병이다. 장이 민감하기론 장씨도 남편 못지않다. 물만 갈아 마셔도 탈이 나는 체질이다. 자연히 집에서 식사를 준비해 먹는 일이 잦다. 집에서 만드는 음식은 대부분 한살림에서 구입한 유기농 식품이다. 배추나 제철 채소, 감자, 옥수수 등은 텃밭 농사를 짓는 친정(강원도 간성)에서 가져온다.
사실 장씨가 유기농 식품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대학 시절 절친했던 친구가 생활협동조합 운동에 적극적이어서 시중에 유통되는 식품들의 문제점이 얼마나 심각한지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하지만 당시는 집안 수입이 넉넉지 않았고, 유기농 식품은 고가였다. 지금은 좀더 일찍부터 유기농 식단을 꾸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두 아들 모두 여드름이 많고 잇몸이 무른 게 어릴 적 음식에 신경 써주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장씨가 바라는 건 더 많은 사람들의 밥상 위에 유기농 식품이 올라가는 것이다. 단순히 몸에 좋아서만은 아니다. 농촌과 환경을 살리는 길이 유기농업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이 먹어야 많이 지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저와 주변 사람부터 많이 사 먹으려고요. 어쩌다 공정무역 커피를 사 마시는 것만 ‘착한 소비’는 아니잖아요? 진짜 착한 소비라면 일상적이고 지속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새벽 6시. 주부 최명자씨의 하루가 시작된다. 최씨가 사는 곳은 서울 성수동의 20평짜리 다세대주택이다. 직장에 나가는 세 딸과 인테리어 일을 하는 남편의 식사를 챙기려면 서둘러야 한다. 아침 7시면 집을 나서서 바쁜 하루를 보낼 식구들의 아침은 꼭 먹여 보내고 싶지만, 출근 준비를 서두르다 보면 밥을 거르기 일쑤다. 그나마 직장이 가까운 둘째딸과 일거리가 불규칙한 남편이 식사를 거르는 횟수가 적다. 아침 밥상은 단출하다. 전날 먹던 국을 데우고, 늘 먹던 백김치와 배추김치, 깍두기를 내놓는다. 간혹 입맛이 없다는 남편에게 달걀을 부쳐준다.
월요일인 지난 11월28일 아침, 최씨는 늘 먹던 김치에 미역국과 미국산 브로콜리를 데쳐 먹었다. 국에 들어간 조갯살은 지난주 동생 가족과 서해안에 놀러갔다가 현지에서 구입했다. 사려고 작정하고 간 것은 아니었는데, 동네 마트보다 싼 가격에 마음이 동했다. 마트에서는 껍질을 깐 조갯살 한 봉지가 4천원이 넘는다. 최씨는 망에 든 조개를 1만원에 사서 다듬은 뒤 냉동실에 보관해왔다. 미역은 들기름에 볶았다. 들기름은 시댁인 강원도 횡성에서 얻어왔다. 장류나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 같은 양념류는 친정(전남 장성)과 시댁에서 가져다 먹는다. 맛있고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지만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교회 친구들과 함께 산지에서 대량으로 공동구매하는 것을 선호한다.
다섯 식구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주부로서, 정체불명의 식재료가 판치는 세태가 불안하긴 해도 피해갈 방법이 마땅찮다. 유기농 식재료를 쓰는 게 좋다고들 하지만, 팍팍한 살림살이에 비싼 돈을 들여 유기농 매장을 이용할 엄두가 안 난다. 먹거리 정보는 주로 TV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얻는다. 전문가나 정부 발표는 미덥지가 않다.
좋은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찬거리는 주로 동네 어귀의 기업형슈퍼마켓(SSM)에서 산다. 구매품이라야 채소, 달걀, 우유 등이다. 간식은 거의 먹지 않는다. 매장에 들어서면 입구에 비치된 전단지부터 살핀다. ‘1+1’ 상품이나 ‘반값 할인’ 제품 목록에 눈길을 고정한다. 저녁엔 ‘떨이’로 파는 채소도 애용하는 편이다. 장을 볼 때 가장 우선시하는 요소는 가격이다. 국산이 좋다는 건 알지만, 많게는 서너 배까지 차이 나는 가격을 감당하긴 힘들다.
이날 최씨는 저녁상에 올릴 된장찌개용으로 수입한 콩으로 만든 두부 한 모를 ㄹ마트에서 샀다. GMO의 위험성은 잘 모른다. 외국산보다 국산 콩 재료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2천원이나 더 주고 국산을 고집하고 싶진 않다. 그래도 이름 있는 대기업에서 만들었다는 점에 최씨는 안심하고 싶다. 우유는 값이 싼 PB(자체 브랜드) 상품을 선택했다. 저렴하지만 함부로 만들었겠느냐는 생각에서다. 마트에서 장을 볼 때 브랜드는 중요한 선택 기준이다.
집 근처 채소가게도 자주 찾는다. 가게의 원래 이름은 ‘천냥하우스’였다. 가격은 대부분 1천∼3천원이다. 원산지는 거의 표시가 안 돼 있다. 주인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만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조심스럽다. 매일 오는 트럭 가게도 단골이다. 역시 원산지나 유통경로는 알 수 없다. 외식이나 간식이 일절 없는 최씨 가족은 종종 제철 과일을 트럭에서 조달한다. 요즘은 과일값이 올라 자주 사지 못한다.
부업 삼아 일주일에 세 번 요양간호 일를 하는 최씨는 늦더라도 저녁은 집에서 먹는 편이다. 대부분 남편과 함께지만 혼자 먹는 날도 있다. 딸들은 약속이나 야근 등으로 밖에서 해결하고 오는 경우가 많다.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횟수는 한 달에 한 번도 안 된다. 가끔 저녁 밥상엔 고봉밥과 함께 생선이나 닭고기, 삼겹살을 올린다. 순전히 남편을 위해서다. 어쩌다 오스트레일리아산 쇠고기를 사서 국을 끓인다. 광우병 파동 이후 미국산은 왠지 꺼려진다.
식사 시간은 조용하고 짧다. 말수 적은 남편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묵묵히 수저만 놀린다. 이날 최씨는 동석한 기자를 의식한 듯 남편의 밥 위에 찬을 얹어주기도 하고 이것저것 말도 건넸지만, 남편의 입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남편은 몸을 틀어 본격적인 TV 시청에 들어갔다.
불신과 체념의 교묘한 공존
설거지를 마친 최씨에게 식료품을 살 때 무엇이 가장 불안하게 느껴지느냐고 물었다. 주저 없이 수입 농산물을 꼽았다. “중국산이 가장 위험한 것 같아. ‘쓰레기 만두’ ‘벽돌 고춧가루’ 같은 것들 다 중국서 왔잖아? 가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입 농산물을 사더라도 중국 거는 거의 안 사.” 하지만 이런 소박한 노력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최씨도 인정했다. “세상에 100% 안전하고 좋은 게 어디 있어? 중국산 아니라니까 그냥 사다 먹는 거지.”
흥미로운 점은 최씨가 자신의 소비 방식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확신한다는 사실이었다. “무농약이니 친환경이니, 그걸 어떻게 믿어? 비싼 돈 내고 속을 바에야 차라리 이름 있는 동네 마트나 값싼 동네 트럭에서 사다 먹는 게 남는 일 아니겠어?” 강한 불신과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고단한 서민 가계의 소비 패턴 안에 교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이상원 인턴기자 solee412@gmail.com
안세희 인턴기자 sehee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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