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상상하든 상상 그 이상을 볼 것이다.’
이 정부 들어 벌어진 수많은 일들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파렴치범 수준의 고위 공직자, ‘촛불 배후’ 잡도리, 한나라당의 예산안 3년 연속 날치기, 언론악법 날치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날치기 비준, 역사 교과서 왜곡, 4대강 사업 강행…. 12월1일 종합편성채널(종편) TV조선, JTBC, 채널A, 매일방송이 동시에 개국했다. ‘상상 그 이상’의 결정판이다. 수구 신문인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가 각각 대주주인 이 종편들은 케이블 방송이면서도 지상파 방송과 똑같이 보도, 오락, 교양 등 모든 영역의 방송을 내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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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고 화려한, ‘그들만의 잔치’
12월1일 오후 5시40분 종편 4사는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개국 축하쇼를 열었다. 김황식 국무총리,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박희태 국회의장,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 임태희 대통령실장 등 정부 여당 최고위층이 참석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영상 메시지를 보내 “국민에게 사랑받는 방송으로 발전하길 크게 기원한다”고 축하했다. 박희태 의장은 “모태는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오래 받아오던 인쇄매체다. (종편은) 신생아가 아니라 노련한 장부”라며 “자동차의 네 바퀴처럼 안전하게, 힘차게 멀리멀리 굴러가시길 바란다”고 축원했다. 가수 박정현과 원더걸스는 축하 노래를 불렀다.
행사를 취재하려는 기자들은 미리 취재 신청을 하고, 신원 확인까지 거쳐 비표를 받아야 했다. 한 종편사 관계자는 “VIP도 참석하기 때문에 경호가 중요해 신원 확인을 거쳤다”고 말했다. 행사장에 들어가려면 세종문화회관 앞 인도로 5m 이상 점거해 별도로 설치한 출입구 앞에서 초대장을 확인받아야 했다. 건물 주변은 경찰과 경찰버스가 에워쌌다. 건물 입구에선 몸 수색과 소지품 검사도 받아야 했다. 종편 개국 축하쇼 ‘더 좋은 방송 이야기’는 따뜻하고 화려한, ‘그들만의 잔치’였다.
같은 시각, 맵찬 바람이 부는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언론노조) 조합원 1천여명이 종편 출범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경찰은 “퇴근 시간엔 통행 인구가 많아 인도에서는 집회를 열 수 없다”며 이들을 가로막았다. 똑같은 퇴근 시간, 종편에는 허락된 인도였다. 언론노조는 세종문화회관 쪽에 “계단 위 내부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들은 미디어렙(방송광고 판매대행사)법 제정과 종편 사업권 회수를 촉구했다.
이날 언론노조는 총파업을 벌였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경남도민일보 등은 신문 1면에, 한국일보는 신문 2면에 백지광고를 실었다. 지역 방송 기자 713명은 ‘언론 노동자 지위 포기각서’를 썼다. 세종문화회관 앞 집회가 열리기 전 이들은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이 각서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에게 전달하려 했다. 한참을 기다리자, 경찰의 연락을 받은 한 당직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강성남 언론노조 수석 부위원장이 “홍 대표에게 전달해주세요. 한나라당이 집권한 상황에서, 언론이 장악된 상황에서 쪽팔려서 언론인 못하겠다는 뜻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직자는 그냥 돌아서려고 했다. 하지만 강 부위원장이 “어디 가세요?”라고 붙들자 “주세요!”라며 각서가 담긴 서류봉투를 빼앗듯 받아든 채 당사 안으로 급히 사라졌다. “누구시냐”고 묻는 기자들은 당사 앞을 에워싼 경찰에 가로막혔다. 그가 강 부위원장에게 건넨 명함은 ‘한나라당 민원국’의 것이었고, “국민의 소리를 듣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기존 채널 변경 안내 조차 없어
언론노조가 펜을 놓고, 총파업에 백지광고까지 불사하며 초겨울 거리 한복판에 선 이유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는 허가부터 개국 이후 운영까지 종편에 온갖 특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시청자 불편까지 초래한 대표적인 특혜가 채널 번호다. 종편은 개국 방송 이틀 전인 11월29일에서야 채널 번호를 확정했다. 종편과 SO(종합유선방송사업자)는 3개월 여 동안 논의를 벌이다 개국 막판에서야 합의에 이르렀다. 그 사이 시청자들은 종편의 채널번호는 물론 해당 채널에 있던 방송이 어디로 갔는지 제대로 안내받지 못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유료방송 이용약관 가이드라인’은 “채널 변경이 불가피한 경우 변경일 기준 2주일 전후에 변경대상 채널을 포함한 전체 운용채널의 2분의 1 이상과 사업자의 홈페이지, 이메일 혹은 우편 등을 통해 이용자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돼 있다. 또 공정거래위원회의 ‘종합유선방송 표준약관’도 “채널 변경시 변경 전후 15일 동안 전체 운용채널 중 3분의 2 이상 채널을 통하여 수신자에게 고지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SO들은 채널 변경 사실을 제대로 안내할 수 없었다. 채널 번호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SO 관계자는 “이번 종편 개국은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진행돼 시청자들에게 채널 변경 내용을 제대로 알릴 수가 없었다”며 “통상 채널이 확정된 뒤 방송 시작 일자를 정하는 등의 상식을 종편은 전혀 따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욱이 방통위는 지난 11월17일 SO쪽에 채널 변경 사실을 알리라고 통보했다. 종편 채널 번호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채널이 변경될 것이라는 안내를 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언론노조는 “채널 번호도 정해지 않은 종편의 개국을 홍보하는 자막을 내보내도록 압력을 행사한 셈”이라며 “정작 방통위가 시청자 피해를 막기 위해 채널 번호가 확정되고 충분한 시험방송을 한 뒤 종편이 개국하도록 하는 등의 기본적인 역할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방통위 관계자는 “시청자들이 종편 개국에 따라 채널 변경 등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며 “종편이 워낙 급박하게 진행돼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졸속으로 종편이 추진돼 그 피해를 시청자가 떠안았다는 비판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공중파·케이블 장점만 따온 ‘특혜 선물세트’
종편이 받은 특혜는 어마어마하다. 공중파와 케이블TV의 장점만 따온 ‘특혜 선물세트’라고 할 만하다. 케이블TV가 갖고 있던 경쟁력인 △프로그램 사이에 광고를 넣을 수 있는 중간광고 △광고주를 상대로 광고를 직접 팔 수 있는 권리 등을 고스란히 챙겼다. 또 KBS1과 교육방송처럼, SO와 일반 위성방송 사업자 등이 의무적으로 재전송해야 하는 권한도 가졌다. 지상파인 KBS2와 문화방송은 의무 재전송 대상이 아니다. 향후 방송사업자가 방송광고 매출액의 6% 이내에서 방송발전기금을 일정 기간 유예받고, 의료기관이나 의약품 등이 방송 광고 금지 품목에서 풀리는 등의 또 다른 특혜까지 받을 것으로 본다.
수많은 특혜와는 달리 방송의 질은 제대로 담보해내지 못하고 있다. “이번 개국으로 방송 콘텐츠가 더욱 풍성해지고, 우리 방송이 글로벌 미디어 기업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개국 축하 메시지와는 달리 턱없이 부족한 준비로 인해 첫 방송부터 사고가 발생했다. TV조선의 경우 개국 첫날 화면이 분절되거나 방송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등 사고가 잇따랐다. JTBC는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 인터뷰 때 오디오를 켜지 않는 ‘대형 사고’로 재녹화를 했다. 이에 대해 케이블TV 관계자는 “시청자가 훨씬 적은 지상파DMB라 하더라도 최종 시청자에까지 도달하는 시험방송을 보름 이상 했다”며 “겨우 12시간 정도 시험방송을 거친 뒤 정규 방송을 시작한 종편은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광고시장 왜곡도 벌써부터 심각한 수준이다. 미디어렙법 제정이 늦어지자, 종편들은 지금까지 방송사에는 ‘금단의 영역’이었던 직접적인 광고영업에 뛰어들었다. 방송사가 직접 광고를 유치하게 되면 경제권력과 언론권력이 유착할 가능성이 커지고, 힘있는 거대 방송사에게로만 광고가 쏠려 지역 방송 등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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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로 홍보할 테니 돈 내라는 종편들
채널A는 최근 국내 주요 대기업에 자사 프로그램에 대한 제작비와 협찬을 요구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기획특집 프로그램 등을 비롯해 , 등 예능 프로그램까지 다양했다. 해당 프로그램에 대기업 총수를 소개하거나 기업의 브랜드, 상품 등을 소개할 계획이니 그 대가를 달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기획특집 프로그램은 채널A 뉴스에서 관련 기획기사 리포트를 방영하고, 동아일보 기획기사 시리즈와 연계해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비용도 회당 10억원인 경우를 비롯해 수억원에 이르러 기존 지상파 프로그램의 홍보 대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프로그램을 미끼로 ‘돈’을 따내고 자사의 뉴스와 신문까지 총동원하는 영업이 정상적인 것일까? 김유진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종편에 대해 우려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현실화된 것”이라며 “돈을 받고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방송 뉴스와 신문에서 홍보하겠다는 것은 정상적인 언론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사정은 다른 종편들도 별반 차이가 없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종편의 광고 영업 행태를 ‘매문’(賣文)이라고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채널A를 비롯해 다른 종편들도 자사(방송) 프로그램을 방송 뉴스와 신문을 연계해서 홍보할 테니 대가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며 “기존 지상파도 자사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뉴스를 하기도 하지만 돈을 받은 협찬 프로그램을 (뉴스에서) 소개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말했다. 또 “협찬 프로그램과 뉴스를 연계하는 것은 언론의 자질 문제”라며 “종편이 기존 경제방송에서 하던 방식을 비판해도 모자라는 판에 오히려 이를 더 활용해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는 꼴”이라고 덧붙였다.
광고비 역시 턱없이 높은 수준이다. 종편은 대기업들에 지상파의 70% 수준의 광고 단가를 요구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어제 나온 시청률을 보면 1%에도 못미치는 등 YTN 수준도 안 되는데도, 훨씬 높은 광고료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YTN은 지상파의 10% 수준의 광고료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들은 최대한 버티기 전략을 쓰고 있다. 10대 대기업 관계자는 “효과도 없는 광고를 턱없이 비싼 값에 집행할 수도 없지만, 기업 총수를 공격하거나 기업 이미지를 훼손할 수 있어 집행하지 않을 수도 없다”며 “일단 다른 기업들이 결정할 때까지 ‘(광고 집행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자’는 방침”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도 “한 종편에서 ‘일단 공짜로 광고를 내보낼테니 테이프라도 달라’고 했지만 나중에 어떤 얘기를 들을지 몰라 이마저도 보내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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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미소가 한국 미래 바꾸기를”
이런 상황에서 우려되는 것은 종편이 광고시장과 여론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광고주에 휘둘리는 방송은 공정할 수 없고, 중소 신문이나 지역 언론은 말라죽을 수 있다. 이미 신문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수구 신문이 지금까지 어떤 신문을 만들었는지 상기해보면, 이들의 ‘방송 버전’이 수구적이고 선정적일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이는 자유
롭고 다양한 의견의 소통이 기본인 민주주의가 질식됨을 의미한다.
오래 지켜보고 판단할 일도 아니다. 12월1일 종편 4개사는 동시에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 인터뷰를 내보냈다. 박 의원의 개별 언론 인터뷰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이후 처음이다. TV조선은 박 의원이 스튜디오에 등장하자마자 “형
광등 100개를 켠 듯한 아우라”라고 추어올렸다. 그의 추억담을 통해 ‘박정희 향수’도 자극했다. 매일방송은 이날 에서 박 의원 인터뷰를 내보낸 뒤 그의 영상자료를 틀어주며 ‘미소가 아름다운 당신, 당신의 미소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자막을 얹었다. 이런데도 종편이 “품격 높은 뉴스, 재미있고 의미 있는 프로그램”(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박근혜 띄우기’와 한나라당 편향 현상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크다. 야당과 언론노조 등은 종편 4개사 허가를 한나라당의 집권 연장 시도라고 비판한다. 민주당 등 야당은 종편 개국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또한 지금까지 조선일보 취재를 거부해온 민주노동당은 종편 4개사의 출연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노총과 언론소비자주권연대 등도 종편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국정조사와 청문회를 통해 특혜로 뒤덮인 종편 허가 의혹을 밝혀야 한다는 태도다. 야당들은 또한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권력을 교체한 뒤 종편 사업권을 회수하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사업권 회수나 특혜 철회 가능해
이들을 믿어도 좋을까?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비롯해 인터넷에선 텔레비전 자동채널설정에서 종편을 삭제하자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종편에 투자한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의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런 주장보다 더 근본적으로, 종편의 사업권을 회수하거나 최소한 특혜를 철회할 힘은 정치권이 갖고 있다. 하지만 미디어렙법 연내 제정에 한나라당과 합의한 민주당은 종편을 미디어렙에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면서도 ‘승인시점(2010년 12월31일) 3년 뒤 강제위탁’이라는 유예규정을 주장하고 있다. 종편이 방송시장에 안착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2년여 동안 직접 광고영업을 허용해주자는 것이다. 이런 민주당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다수석을 차지한다고 달라지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들만의 잔치’를 언제까지 수수방관할 것인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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