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익숙한 노래, 그러나 대중화되지 않은 노래.
“무엇이 그댈 아프게 하고 무엇이 그댈 괴롭게 해서 아름다운 마음이 캄캄한 어둠이 되어 앞을 가리게 해. 다 알지 못해도 그대 맘을 내 여린 손이 쓸어내릴 때 천천히라도 편해질 수만 있다면 언제든 그댈 보며 웃을게. 사라지지 말아요. 제발 사라지지 말아. 고통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나 덜어줄 텐데….”
슬픔 뒤에는 파괴된 관계가 있다쌍용자동차 파업을 다룬 영화 의 OST 중 ‘디어클라우드’의 의 노랫말이다. 몇십 번을 본 이 영화, 그러나 아직 대중화되지 않은 이 노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고통과 아픔이 여전하다는 방증일까. 겨울의 초입에서 노랫말이 애잔하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사라지는 걸까, 죽어가는 걸까, 살아 있다면 산 것일까. 죽음과 반죽음의 공포 속에서 ‘산 자’는 ‘죽은 자’를 슬퍼할 겨를이 없다. ‘죽은 자’를 애도할 마음의 여유 공간이 밀려드는 죽음 바이러스로 이미 오염되고 꽉 차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19라는 숫자로 상징되는 죽음이 ‘발생’했다.
주어는 쌍용자동차 희망퇴직자이며 형용구는 두 아이를 둔 아내다.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죽음이 갖는 공간적 의미가 사라진 지 오래다. 다만 모두가 궁금해하는 건 죽음의 형태다. 지금도 미라처럼 피가 말라버린 반죽음의 노동자들이 어쩌면 출발선 언저리를 서성이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이런 표현이 섬뜩하고 을씨년스럽게 들릴지 모른다. 또한 ‘위대한 노동운동’에 적잖은 피해를 줄지 모른다. 그렇다고 직시를 피해 곡시를 할 순 없지 않은가. 불편하더라도 끝까지 읽어주는 아량 정도는 죽은 자에게 올리는 향 하나쯤이라 생각하고 참아주시라.
문신으로 새겨진 죽음은 그림자.
그림자는 사물이 갖는 또 하나의 존재 형식. 죽음이 그림자라면 사물은 무엇인가. 나인가 너인가, 아니 그보다 더 넓은 우리인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에게만 해당할까. 생각의 타래가 얽히고설켜, 갑작스레 전원이 나가는 컴퓨터의 황망함처럼 머릿속이 검게 변한다. 2009년 2월26일 이른바 ‘쌍용남매’라는 이름의 무급휴직자 임무창 동지가 죽었다. 13번째로 말이다. 이제는 월별·계절별, 그리고 남은 유가족의 기준으로 충분히 분류되고 구분할 만큼 모집단이 커져, 정리된 파일을 꺼내는 의사의 손놀림처럼 의뭉스럽게 19번째를 맞는다. 향내를 달고 살며, 집만큼이나 장례식장의 문지방을 넘나들었지만 여전히 죽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이럴까. 정말 왜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증폭되는가.
휴대전화 고장이 불편치 않은, 파괴된 관계로 살아가는 쌍용자동차 노동자.
자초지종은 이렇다. 41살의 노동자가 있었다. 2009년 쌍용차 파업을 미련하게도 ‘끝까지’ 했다. 파업 이후 ‘희망퇴직’을 선택지 없는 시험지를 받아든 수험생처럼 강제적으로 썼다. 이웃과의 관계의 서먹함은 속절없는 시간 속에 단절과 고립의 지경으로 내몰리는 경우를 숱하게 봐온 터라 이사는 가능하면 선택해야 하는 필수 사항이었다. 낯선 타지에서 일감을 찾아 떠돌이 신세로 전전하는 쌍용자동차 희망퇴직자들의 일반적 삶의 궤적을 따라 흐른다. 아이는 어렸고, 카드 영업을 하는 아내의 고단함이야 미뤄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느 날 엄마가 아팠고 아이들은 아빠에게 전화를 한다. 때마침 아빠의 휴대전화는 고장이 났고 아이들의 심장은 오그라들어 생각을 마비시켰다. 올무에 걸린 짐승들이 올무를 벗으려 발목이 부러지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이들은 미련하게도 아빠에게만 전화를 했다. 휴대전화가 이틀씩이나 고장나도 사는 것에 지장 없을 정도의 앙상한 관계만을 가진 아빠였기에 ‘왜 전화를 안 받았느냐’는 타박은 잠시 접어두자. 전화기를 부숴버리고 싶은 그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말이다.
의식주보다 기본인 따뜻한 관계
폐렴 증상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열악한 사회 안전망.
엄마는 폐렴 증상이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환절기 흔하디흔한 폐렴기가 죽음으로 이르는 문이었다니, 믿을 수 없겠지만 어찌하겠는가. 사실인 것을. 사회 안전망의 부실함을 탓한들, ‘왜 가까운 병원에라도 가보지’라는 말도 공중으로 날아가는 허망한 연기가 아닐까.
장례식장에서 친척들의 쓸쓸한 눈빛과 찾아온 조문객의 애처로운 마음으로 겨우겨우 미래의 자리를 잡아가야 하는 아이들이 ‘또’ 발생한 것이다. 언제까지 사회적 부조금의 형태로 이 아이들의 살아가는 밑천이 마련되고, 죽은 쌍용차 노동자 아이들이라는 ‘역규정’에 얽매여야 하는가. 엄마의 죽음 이후 이 아이들의 삶은 온전한 채로 살아질 수 있겠는가.
사라져야 하는 것과 사라지지 말아야 하는 것.
옛말에 ‘산 목숨에 거미줄 치겠나’라는 말이 있다. 또 이런 트윗 멘션도 받았다. “해고된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쌍용차 노동자들 너무 약한거 아니냐”고. 백번을 양보해서 이런 말과 멘션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썩은 동아줄이라도 되는가. 외려 죽음의 공간으로 밀어넣는 구실을 하는 건 아닐까. 산 목숨에 거미줄은 몰라도 산 목숨에 관계의 거미줄은 완전히 파괴되고 끊어진 사람들, 약하다는 비아냥을 친척에서 이웃까지 3년 내내 듣는 사람들을 향한 이런 말은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공포 속에선 말과 글도 정제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것뿐이다.
일전에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선생은 나와 내 아이에게 “괜찮아 당신의 잘못이 아니야” “얘야 그건 아빠의 무능함이나 잘못이 아니야”라는 별 싱거운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마법처럼 이 말은 꺾인 무릎을 세우는 기적 같은 힘을 발휘했다. “미안해”라는 진심 어린 사과의 한마디가 힘겨워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나는 이제 경험으로 안다. 관계의 복원과 따뜻한 격려는 의식주보다 더 큰 요소가 된 지 오래다.
“Donde voy, donde voy”(어디로 가나요, 어디로 가나요)
309일 만에 땅을 밟은 크레인 여인 김진숙 지도위원의 컬러링은 특이하게도 (Donde voy)였다. 국경을 넘는 멕시코 이민자들의 노래로 알려진 이 노래. 김진숙 지도위원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찾고 무사히 지상에 안착했다. 수많은 마음들의 결사체인 ‘희망의 버스’의 에너지는 85호 크레인에서 생산됐다. 85호 크레인은 더 이상 죽음의 공간이 아닌 삶의 공간, 희망의 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말하자면 85호 크레인은 에너지 발전소였으며 죽음을 삶의 공간으로 가꾸며 끊임없는 횡적 주유를 감행한 노마드의 장소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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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자, 행복하자
이제 우리 어디로 무엇을 위해 가야 하는가. 희망의 버스 다음 정거장으로 좁게 이해되는 ‘민원버스’의 요구함을 넘어, 죽음으로 피폭된 그곳으로 우리는 무엇을 들고 무엇을 가꾸기 위해 가야 하는가. 이어지는 죽음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어떤 것인가. 풍부화된 인간관계 복원을 위해 우리 웃으면서 즐겁게 가자. 미래가 아닌 지금 당장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아직도 살아 있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죽어간 사람들의 몫은 복수가 아닌 남은 자들의 행복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낙엽 한 잎이 팔랑팔랑 땅으로 떨어진다. 땅을 향하는 낙엽의 심정은 어떨까. 문득 낙옆의 처지가 돼보고자 하지만 여의치 않다. 경험 교직의 끈의 실마리가 애초 다르기 때문이다. 이 낙엽은 아직도 공중을 유영하고 있을까.
이창근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기획실장·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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