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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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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보살의 손들

하늘의 손과 땅의 손이 맞잡아 마침내 사람을 살린 309일, 그 희망의 기록
등록 2011-11-17 11:16 수정 2020-05-03 04:26


“저는 주익씨가 못해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하지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끊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하겠습니다.”
» 지난 1월11일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에 반대하며 크레인 위에서 농성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한겨레21 정용일

» 지난 1월11일 한진중공업의 구조조정에 반대하며 크레인 위에서 농성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한겨레21 정용일

“제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비틀거릴 때마다 천수보살의 손으로 제 등을 받쳐주신 여러분, 꼭 이기겠습니다. 157일이 아닌 1570일을 견뎌서라도 반드시 이기겠습니다.”(2011년 6월12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희망버스 연설)

아무도 모르게 그는 무작정 겨울 하늘로 올랐다. 무쇠바람 부는 2011년 1월6일이었다. 35m 상공에서 흔드는 그녀의 손은 땅을 향했지만,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저는 지금 주익씨가 앉았던 자리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보고 간 세상의 풍경을 봅니다. 무심히 지나다니는 행인들과 분주히 오가는 차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스물여섯 살에 해고된 뒤 동료 곁에 돌아오겠다는 꿈 하나를 붙잡고 27년을 견뎌온 여성 노동자가 그 동료를 지키겠다며 다시 이 크레인에 매달려 세상을 향해 간절히 흔드는 손을 저들 중 몇 명이나 보고 있을까요.”(2월14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애초엔 해고당한 사내들만 85호 크레인 아래서 애달픈 노래를 불렀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사이렌처럼 간절한 노래는 사람을 불렀다. 고공농성 157일, 마침내 소나기 내리는 옥포의 조선소에서 눈보라 날리는 서울 철로 위를 달려 희망이 도착했다. 제1차 희망버스가 온 2011년 6월11일이었다. 정말로 1570일이 될까 걱정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약속은 예언이 되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하늘을 몸으로 견뎌낸 소금꽃은 지상으로 내려왔다. 2011년 11월9일, 309일 만이었다. 그렇게 견우와 직녀가 만나고, 직녀가 직녀를 부둥켜안았다.

은 희망버스가 도착하기 전에 하늘의 김진숙을 찾아갔다. 하늘에 오른 지 일주일 남짓 지난 1월14일 김진숙 지도위원이 두툼한 장갑을 끼고 당시 취재를 갔던 하어영 기자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왼쪽 사진·845호 사람과 사회 ‘얼지마, 울지마, 죽지마, 철의 노동자여’ 참조). 그리고 11월9일 마침내 땅으로 내려온 그가 동료들과 함박웃음 머금고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주익 열사가 숨진 85호 크레인으로 그녀가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놀라 얼어붙은 마음이 309일 만에야 비로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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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좋고 전망 죽이고 젤 좋은 게 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다 알로 보입니다. 방이 좀 좁아서 그렇지 발코니도 널찍하지요. 봄이 오면 텃밭을 가꿔서 가을에 걷어 먹을 생각입니다.”
(1월7일 저녁 촛불문화제 연설)

다시 4월, 이 고공농성 중인 한진중공업을 찾았다(856호 표지이야기 ‘외롭고 높고 쓸쓸한 당신, 노동자’ 참조). 고공농성 80일을 지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외로웠다. 그러나 외롭다고 악을 썼다면, 오히려 목소리는 멀리 퍼지지 못했을 것이다. 땅 아래 사람들의 불안과 달리 하늘의 그는 여유가 있었다. 그는 어떤 이들이 우러르는 하늘의 동상이 되기보다 하늘의 농사꾼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가 크레인 위에서 치커리를 키우자 크레인은 크렌나무로 변했다. 2010년 정리해고 반대 단식으로 위를 다쳐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그에게 아래의 사람들은 죽을 바구니에 담아서 올려 보냈다(사진). 한 여성은 서울에서 죽을 쒀서 왔다며 한사코 봉쇄된 공장 담벼락을 넘어 죽만 전하고 가겠다고 했다. 경찰도 그녀의 애타는 마음을 말리지는 못했다. 그렇게 생존을 올려보내자 그는 희망을 내려보냈다. 한여름 하늘에서 열매를 맺은 방울토마토 세 알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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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여러분들이 85호 크레인을 생각하셨다면, 이제부터는 우리 조합원들을 기억해주십시오. 2003년 그 모질었던 장례투쟁의 와중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현서·다림이의 아비 고지훈·김갑열을 기억해주십시오. 잘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는 최성철을 기억해주십시오. 말기암으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아버지보다는 동료를 지키기 위해 농성장을 지키는 박태준을 기억해주십시오. 비해고자임에도 이 크레인을 지키고 있는 한상철·안형백을 기억해주십시오.”
(6월12일 1차 희망버스 연설)

김진숙을 만나러 갔다가 김진숙들을 보았다. 오랫동안 참아왔던 울분을 희망버스 승객 앞에서 피 토하듯 쏟아내는 이용대 한진중공업 해고조합원을 보았고, 떠나는 희망버스 승객에게 눈물 젖은 손으로 양말을 나눠주던 가족대책위 엄마들을 보았다. 점점 얼굴이 익숙해진 푸른 작업복의 아저씨들을 사람들은 ‘한진중공업 스머프’라는 살가운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중간 크레인에 올라간 사수대 박성호씨를 알자, 박성호씨의 딸 예슬이와 아들 슬옹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희망의 손은 맞잡고 이어졌다. 중간 크레인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을 지키다 내려와 서울에서 제주 강정까지 다니며 해고 철회를 외친 이용대 아저씨는 ‘스머프’의 상징이 되었다. 이용대 아저씨의 모자는 갈수록 ‘패셔너블’해졌고(위 사진), 젊은 한진 해고자와 어린 아들의 얼굴도 어느새 낯익게 되었다(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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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희망버스 때는 쌍용차 해고 동지들이 평택에서 부산까지 걸어오셨습니다. 물집이 터져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 발들을 사진으로 보며 생각했습니다. 저들은 어떤 마음으로 걸었을까. 15명의 생목숨을 제 손으로 묻은 저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을까.”
(7월30일 제3차 희망버스 연설)

끔찍한 숫자의 행렬은 멈출 줄 모른다. 3차 희망버스 이후, 석 달 남짓 만에 쌍용차 해고로 잃은 생목숨은 15명에서 19명으로 늘었다. 희망버스 최초의 승객들은 국회의원도 연예인도 아니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같은 처지의 해고노동자들이 희망의 버스를 상상하고 시작했다. 먼저 해고된 이들이 한진을 찾아가고 한진의 김진숙은 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쌍용차, 재능교육, 발레오공조, 유성기업… 제발 한진을 넘어 이들을 보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런 동병상련의 발걸음으로 쌍용차·발레오공조 해고노동자들은 천릿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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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 세 번을 타니 어느새 여름이 지났다. 부산에서 희망 휴가를 보낸 이들은 8월20일, 서울에 모여 희망 시국대회를 열었다. 청와대까지 들리라고 외쳤고, 한진중공업 본사에 가자고 모였다. 우리는 저마다의 크레인에 몰려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85호 크레인에서 홀씨처럼 퍼졌다. 김진숙의 얼굴을 한 희망버스 승객들은 “우리가 김진숙이다”라고 외쳤다. 청와대 뒷산에 플래카드도 걸었다. 역시나 공권력은 부산에서처럼 서울에서도 물대포로 응답했지만, 희망의 팔뚝질을 멈추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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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익씨가 못해봤던 일, 너무나 하고 싶었으나 끝내 하지 못했던 내 발로 크레인을 내려가는 일을 꼭 할 겁니다. 그래서 이 85호 크레인이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더 이상 한과 애끊는 슬픔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이 되도록 제가 가진 힘을 다하겠습니다.”
(1월7일 저녁 촛불문화제 연설)

노사협상이 타결돼도 공권력은 끝까지 저항했다. 경찰은 11월9일 내려오는 김진숙을 체포하겠다며 85호 크레인 주변을 에워쌌다(왼쪽 사진). 소식을 들은 노동자들은 조합원 총회를 중단하고 달려왔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보이지 않는 천수보살의 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지상으로 내려오는 길을 텄다. 그리고 김진숙·박성호·정홍형·박영제가 희망버스 승객 한사람 한사람이 놓은 오작교 계단을 내려와 비로소 살아서 땅을 밟았다. 언제나처럼 마무리는 구호로, “즐겁게! 의연하게! 담대하게!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그렇게 통한의 85호 크레인은 승리와 부활의 상징이 되었다.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박승화·정용일·류우종·김경호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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