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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집에서 배우는 거야 담을 타고 올라 뚜룩치는 기술, 집게손가락을 가운뎃손가락에 얹어 솜씨 좋게 쓰리하는 법 등 두루 다양했다. 손가락이 너무 굵거나 짧은 이는 적격이 아니었다. 노리카이(기차 바꿔 타기)도 당연히 자연스러워야 했다. 소매치기에서 걸리지 않아야 하는 건 손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배려였다. ‘손님을 놀라게 하면 쓰나.’ 같잖은 예절까지 빠짐없었지만 나라 훔치는 법만은 가르치지 않았다.
» 1988년 10월 탈주범 지강헌은 자신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대고서야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칠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옥방을 사상의 단련소로
양씨 문중에게 이곳은 일찍부터 ‘나의 대학’이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서대문옥 마룻바닥에 못으로 쓴 글씨로 누대에 걸쳐 전승되었다. 이미 전옥서 마루와 바람벽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돈과 빽에 따라 죄도 높낮이가 달랐지만 벌은 더구나 그러하였다. 신산스런 삶의 감옥을 탈옥하고자 저지른 행동은 양아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팔자들을 더 높은 담장 안에 가두었다.
기술 말고도 이들이 빵깐에서 배우는 건 지지리도 묵은 체념과 팽팽한 분노였다. 분노가 터져오를 무렵이면 잠시 담장이 낮아 보이기도 했다. 저 사자성어를 널리 알린 이는 지식분자들이 아니라 88올림픽이 끝난 그해 서리 내린 담을 넘은 지강헌 무리들이었다.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송되던 중 몸을 빼쳐 나온 이들은 서울 북가좌동에서 경찰과 맞섰다.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보다 높은 형량을 받은 잡범 개털들은 권총을 관자놀이에 대고서야 비로소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다. 이들의 언행은 고스란히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목숨을 건 탈주극은 단지 근육에 의지하는 올림픽에 비길 수 없이 생동감이 넘쳐났다. 이는 언론 자유가 봉쇄된 사회에서 대중에게 강박적으로 전달된 고도의 경고와 쾌락이었다. 죽기 전 지강헌은 (비지스)를 듣게 해달라고 했다. 그가 누린 하루짜리 자유는 경찰이 쏜 총알 두 발과 맞바꾼 목숨값이었다.
압송차 회색 차유리 칠 벗겨진 틈새로 낯익은 길을 바라볼 때면 문득 내려서 내달리고 싶은 거야 양씨들이나 시인이나 다를 턱이 없었다. ‘나를 태운 압송차가…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김남주, ‘이 가을에 나는’에서)
그 교도소를 ‘나의 대학’으로 삼은 이로 먼저 김창수(김구)를 꼽는 게 마땅하다. 황해도 치하포에서 맨주먹으로 칼 든 왜놈을 때려죽인 그는 인천감리서에서 읽기를 넘어, 세계 역사와 지리를 공부했다. 그저 혼자 깨우친 게 아니라 까막눈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옥을 서당으로 삼더니 이내 탈옥 동지로 만들어냈다. 감리서 벽돌을 파내고 밖으로 나와 충남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 생활을 포함해 천하를 주유했는데, 이는 백범 일생에 걸친 기나긴 노정을 암시하고도 남음이 있다.
비록 탈옥은 아니지만 경찰서 유치장 탈출 두 번을 포함해 옥방을 사상의 단련소로,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족해방투쟁의 전위 공간으로 만들어낸 이는 이재유다. 백두산 밑 화전민의 후손인 그는 심부름 가는 돈을 노자 삼아 서울로 올라와 개성, 일본 도쿄를 떠돈 고학생 혁명가였다. 그에게 ‘편안한’ 학교는 일제의 치안유지법으로 3년6개월 선고를 받고 갇혀 있던 형무소였다. ‘형무소에 아직 자유가 있어서’ 등을 차입해 읽으며 더 강하게 사상을 담금질해낸 그는 마침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조직 경성트로이카를 이끌어가는 동적 중심이 될 수 있었다. 만기 출옥(1934년)한 이재유는 서대문경찰서에서 검거됐다가 한 번 탈주로 자동수갑이 채워진 가운데 밥알로 족쇄의 형을 떠낸 뒤 우유통 뚜껑으로 열쇠를 만들고, 옷감을 오려내 마스크를 한 다음 유유히 사라졌다. ‘서대문 사건’이었다.
» 항일 노동운동가이자 경성트로이카 지도자 이재유의 체포를 전한 일제 어용신문 <경성일보>의 호외. ‘집요하고 흉악한 조선공단당을 마침내 괴멸시키다’라는 제목이 달렸다. 한겨레 자료사진
탈주와 투쟁의 12년, 이재유
이재유는 적어도 일곱 번 일제 경찰의 손아귀에 들었다가 탈주한 역대 최고 강자다. 아지트 키퍼인 이순금의 집에서 체포되었을 때 천장 창문을 깨고 탈출한 게 첫 번째 일이었다. 그가 탈주를 즐긴 게 아니라 조직 역량을 보존하고 비밀선을 유지하고 항쟁을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서울 종로 내수동에서 재차 체포될 순간을 모면한 건 숫제 예사롭기마저 하다. 동지와 접선이 되지 않아 돌아오던 참에 봉래교 위에서 붙잡힌 그는 넓적다리를 불인두로 지지고 전기고문을 당한 몸으로 서대문경찰서를 벗어났으나 하필 담을 넘은 뒤 기절한 곳이 서울 정동 미영사관이었다. 이제 그의 발에는 쇳덩어리, 허리에는 방물이 매달려 있었다. 열쇠는 고등계 주임 요시노가 집으로 가지고 가버렸다.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을 탈출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행동은 이질 환자에게 밥을 건네주는 일이었다. 최악의 긴장을 요구하는 순간에도 인간적 배려를 잃지 않았던 그가 숨어든 곳은 전투적 좌익 교수 미야케(경성제대)의 집이었다. 그에게는 현상금 500원이 붙어 있었다. 치열한 지하 활동 속에 체포(1936년)된 이재유는 ‘나의 대학’을 대중의 학교로 바꾸고자 투쟁했다. 조선어 사용금지 반대투쟁, 수감자의 대우 개선, 간수들에 대한 사상 고취를 그는 그치지 않았다. 고작 마흔 해를 살았는데 징역살이가 12년이었다. 숱한 탈주 이야기 중 이재유를 능가하는 굴곡과 역사성을 가진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탈주가 대중에게 통쾌감을 안겨주는 까닭은 억압과 통제를 일상화하는 권력에 대한 능멸 탓이다. 신창원은 그 정점에 서 있다. 1997년 벽두 그는 부산교도소 화장실 쇠창살을 끊은 뒤 두 해 가까이 포위망 그물 사이를 유영했다. 그와 친교한 여인들은 그를 신고하기보다는 감싸고자 했다. 사살 명령이 내려진 가운데 그는 총을 맞고도 경찰을 따돌리고는 자취를 감췄다. 그 무렵 그는 대중적 영웅으로 부상해 있었다. 그가 읽는 책, 그가 입는 옷은 일시적으로나마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책과 놀이도구까지 나올 정도였다. 무엇보다 신창원은 나이트클럽에 자주 출몰(웨이터 이름)했다. ‘신출귀몰한 탈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대중에게 사회심리적 판타지로 작동했던 것이다. 나이트클럽은 합법적 탈주가 가능한 몇 안 되는 대중 공간이기도 했다.
» 일제가 ‘아시아 최고 근대적’ 감옥으로 지었다는 서울 서대문형무소. 중앙 감시탑에서 모든 감시가 가능한 방사형 구조. 한겨레 자료사진
섬만도 못한, 탈옥이 불가능한 사회
한국 사회에서 탈옥은 거의 불가능하다. 옥을 나와도 탈옥을 완성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이 땅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길은 오직 비행기뿐이다. 38 이남 분단 한국은 자루에 구멍을 뚫듯 허공으로 치솟아야 다른 세상에 이를 수 있다. 그와 함께 대륙적 호방함은 시나브로 소멸해버렸다. 한국인의 대지관은 반도라기보다는 섬 이하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는 단순한 영토 개념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공간에 대한 집단인식을 이른다. 그리하여 배고픔을 벗어나고자 하는 탈북은 있지만 탈남은 없다. 탈남은 고작해야 강남 졸부들의 미국 원정출산 정도다.
탈옥이 불가능한 사회는 유격투쟁 또한 가능치 않은 사회다. 장기간 숨어 지내며 후일을 도모할 날을 엿볼 수 있는 배후기지가 없는 탓이다. 전통사회에서도 한반도에는 진정한 녹림당이 존재하기 어려웠다. 악랄한 가렴주구와 지겨운 유리걸식을 벗어버리고 고갯마루에서 기다렸다가 권력자들을 골려주고 배를 채울 수 있는 겨울이 있기를 바라는 열망이 만들어낸 대중적 꿈에 가까웠다. 임꺽정이나 홍길동, 장길산네들이 세월이 지날수록 더 의적화한 것은 다 그 때문이다. 어떤 도적도 봉건 통치배들보다는 나을 거라는 믿음이 투사된 것이다. 크막한 산채를 건사한다는 생각은 말 그대로 산속 궁궐일 뿐이었다. 거기서 대중 장악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조선 옥 전옥서는 원형이었다. 이 파놉티콘(제러미 벤담이 고도의 효율성을 주장한 원형 감옥)은 모서리가 없어서 좀처럼 바깥으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동·서·북에 세 칸씩 아홉 칸은 남자를 가두는 옥, 여옥은 남쪽에 두 칸, 서쪽에 세 칸이었다. 선린방, 오늘날 영풍문고 자리다. 푸코의 말마따나 감시가 수월한 구조였다. 구치소 격인 이곳에 홍길동이 갇힌 적이 있고, 임꺽정은 자기 처를 구하고자 모사 서림이 등 패거리들과 꾀를 내어 들이닥쳤다. 개천(청계천) 끝 오간수문을 짓부수고 들어와 옥을 깨뜨리려 한 것이다. 개천을 자박자박 걸어왔다는 그가 전옥서로 올라섰다면 광교께가 맞춤이다. 파옥은 실패했지만 전설은 오늘도 물길을 따라 흐르고 있다.
일제가 ‘아시아 최고 근대적’ 감옥(1918년 등 여러 차례 증축)으로 지은 서대문옥은 벤담의 논리를 고스란히 따르는 방사형 구조다. 입감한 뒤 모든 길은 중앙통제소를 지나도록 설계돼 있었다. 감방에서 길은 곧 눈이다. 끝내 숨을 곳이 없다 하더라도 감시가 있는 한 탈출은 그치지 않는 법이다.
이곳에 갇혀 있는 사람(수용자)들에게는 수형 생활과 노역 말고도 오래도록 인성교육이란 이름으로 다시금 죄의식을 확인시키는 문화적 징벌이 주어졌다. 범죄에 관한 사회구조적 이해나 접근, 모순의 발견을 통한 사회화는 탈옥만큼이나 쉽지 않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게다. 근래 들어 인문학 프로그램이 몇몇 군데에서 운영되는 건 한국 교도행정 사상 새로운 시도임이 틀림없다. 국가나 교정 당국이 지원만 하고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는 상당히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해야겠다.
디지털 감시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교도소는 단지 죄를 징치하는 곳만이 아니다. ‘가다밥’처럼 찍어낸 시간과 행동과 동작을 요구하는 시스템은 이윽고 사회 전반에 예령으로 작동한다. 수감과 수감시절의 존재만으로도 대중에게 국가와 권력에 대한 공포와 환상이 생성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대중에 대한 일상적 감시로 이어진다. 지배자의 감시 욕망은 재생산되어 한국인은 이동하는 동안 믿기 어렵게도 주택가, 상가, 학교, 길(도로·인도·지하보도), 시장, 교통시설 폐쇄회로텔레비전(CCTV) 등에 9초마다 한 번씩 노출되고 있다.
그물이나 철조망이란 건 가까이 다가갈수록 창살이나 그물코가 안 보이게 된다. 감시를 망각하고 마비되는 지점이 여기다. 직접적인 사찰이나 감시, 미행이 아니라도 디지털 감시사회라는 ‘흐린 감방’ 속에 한국인은 살고 있다. 국가 전체가 그물 감방화한 셈이다. 탈옥은 지금, 여기 필요한 상황이다.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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