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5일 오후 2시께,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학(SOAS) 정문 앞. 수십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다. 카를 마르크스의 붉은색 초상화 아래 ‘위기와 혁명’이라고 적힌 포스터가 나무마다 걸려 있다. 이 대학 역사학과에 재학 중인 벤 필던(21)은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실업난 등에 위기감을 느낀 젊은이들이 주도하는 시위가 남의 일 같지 않다고 말했다. “뉴욕에서 벌어지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를 접하며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낀다. 나도 지난해 11월 정부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한 바 있다.”
14.9% 늘어난 노숙인 시설 거주자
지난해 11월 영국에서는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가 재정 긴축정책의 일환으로 수업료를 인상하고 연금을 축소하는 것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대학생 등 7만5천 명이 모였다. 이 학교 인문학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톰 머디머(24)도 시위에 참여했다. 머디머는 한 레스토랑에서 시간당 최저임금인 6파운드(약 1만1천원)를 받으며 주 30시간씩 일하고 있다. “당연히 아르바이트 생활이 공부에 지장을 준다. 요즘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데 이렇게 공부해서 졸업해도 무직자로 남을까 걱정이다.”
직장을 가져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9월17일 저녁, 런던 중부 트래펄가 광장 안에서 노숙자 케빈(41)은 노숙인 재활지원지 를 판매하고 있었다. 케빈은 노숙 10개월째다. 노숙자가 되기 전 그는 빌딩에서 수리 등을 했고, 딸과 아내와 함께 방 두 개가 딸린 집에 살았다. 한 달에 2400파운드를 벌어 월세 800파운드를 내며 살았다. 그는 “지난해 8월 회사가 망한 뒤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며 “정부가 복지 혜택을 줄여 의지할 곳 없는 어려운 사람들을 벼랑으로 몰고 있다”고 비판했다. 케빈은 월세를 내지 못해 거리로 내몰렸고 곧 아내와 딸은 떠났다. 몇 년째 지속되는 경제위기와 정부의 복지정책 축소 탓에 영국 내 노숙인은 가파르고 늘고 있다. 지난 8월 요크대 등이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정부가 운영하는 노숙자 임시거주시설에는 전년보다 14.9%가 늘어난 18만9천 명이 머물고 있다.
공무원이 안정된 직업이란 것도 영국에서는 옛말인 듯했다. 9월27일, 헬렌(53)은 런던 남동부 서더크역 안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헬렌은 교통 당국에서 정보기술(IT) 전문가로 활동하고 공무원노조 소속이다. 지난 6월 ‘영국 정부의 공공부문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파업에 참여했다. 당시 교사 등 수십만 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언제 잘릴까 미래가 불안할 따름이다. 동료 몇몇은 벌써 직장을 떠났는데 이 정부 안에서 파업은 불가피하다.”
“제 인생이야 될 대로 되라죠”
노숙인 지원단체 ‘크라이시스’의 레슬리 머피 소장은 최근 일간 과의 인터뷰에서 “경제위기와 정부의 복지 축소 정책이 계속될 경우 향후 몇 년 새 수십만 직장인들이 노숙자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데 정부는 지금이라도 민심을 살피고 정책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경고했다. 경제위기와 정부의 긴축정책은 지난 1년 동안 수업료 인상 반대 시위와 공무원 파업 외에 빈민 지역 청년 폭동 등으로 이어졌다. 8월 폭동에 참여한 10대들은 언론을 통해 “희망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런 듯했다. 런던 중부 차링크로스역 앞에서 앳된 얼굴의 노숙인 4명이 쭈그려앉아 대마초들 돌려 피웠다. 대마에 취해 눈이 반쯤 풀린 콜(17)은 노숙 생활 5개월째다. 가출했다는 콜에게서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올해 들어 부쩍 바빠진 부모님은 하루 12시간씩 일했어요. 자기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저를 찾지 않을 거예요. 제 인생이야 될 대로 되라죠.”
런던(영국)=이승환 통신원 stevelee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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