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우리 땅에서 태어나지 못했을까. 내 나라에서 가족과 동무와 우리말로 이야기하며 맛있는 우리 음식을 먹고 사는 생활은 재일조선인인 나에게는 꿈속의 꿈이다. 북에서든 남에서든 내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었다.” 조선적(朝鮮籍)인 재일동포 3세 리정애씨에게 국적은 차별의 다른 이름이었다.
“‘조선’은 없어진 나라를 표기한 것에 불과해 무국적자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다. 무국적자이기 때문에 여권이 없고 외국에 갈 때마다 재입국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남쪽에 갈 때는 한국 정부에서 발행하는 임시 여권이 필요한데 북-남 관계에 따라 임시 여권을 주지 않을 때가 많다. 또한 잠재적 테러집단으로 여겨져 일본 공안경찰의 관리 대상이 되고, 이 때문에 직업을 선택할 때도, 일상생활에서도 많은 제약을 받는다”고 리정애씨는 에 적었다.
국적 전환, 조선→한국→귀화
재일동포에게 국적은 어떤 의미일까. 재일동포는 크게 리정애씨와 같은 조선 국적 소지자, 한국 국적 소지자, 일본 국적 소지자의 세 부류로 나뉜다. 한국 국적 소지자란 한국 국민과 같은 뜻이다. 그렇다면 조선 국적 소지자는 북한의 국민인가. 그렇지는 않다. 조선적의 ‘조선’은 “조선반도 출신, 조선 민족의 일원이라는 의미, 즉 국적이 아니라 민족적 귀속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1947년 쇼와 일왕 최후의 칙령인 외국인등록령에 따라 ‘외국인’으로 간주된 재일동포는 외국인 등록을 할 때 자신의 ‘국적’을 신고하고 기입해야 했다. 분단으로 치닫던 당시 상황에서 남북 어디에도 국가는 없었다. 나라가 없는데도 국적을 신고하라고 강요받은 재일동포는 결국 국적란에 ‘조선’이라고 기입했다. ‘조선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적은 점점 줄어들고 한국 국적 전환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한국적이 조선적보다 많아졌다. 1990년대에는 국적자 수에서 ‘일본>한국>조선’의 관계가 되었다. 한국적 전환이 다시 귀화로 이어진 까닭이다. 결국 동포들의 국적 전환 추이는 ‘조선→한국(1980년까지)→귀화(1990년대 이후)’의 순서를 밟게 되었다(정태헌, ‘총련계 재일동포들의 21세기 자기인식’).
외교통상부의 2003부터 2010년까지의 귀화자 통계를 보더라도 이런 추세는 확인된다(표 참조). 통계를 보면, 지난 8년여 동안 한 해 평균 8천여 명씩 귀화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2003~2004년에는 무려 2만4672명의 재일동포가 귀화를 했다. 이 통계는 귀화에 거부감이 덜한 2~3세대 재일동포의 인식을 방증한다. 오사카에 있는 ‘코리아엔지오센터’에서 상근자로 일하는 재일동포 3세 김혜미(45)씨도 그런 경우다. 그녀는 “특별히 귀화를 안 할 생각도, 할 생각도 없었다”며 “한국 국적인 남편의 회사 승진을 위해 5년 전 아들 둘과 함께 귀화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인간이 맨 먼저 있고, 그다음에 국적·민족·종교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귀화를 한다고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므로 국적보다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적보다 중요한 건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다.
“국적은 인간관계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물론 귀화를 반대하는 분들의 생각을 부정하지는 않아요. 다만 개인의 선택 가운데 하나로서 귀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장기적으로는 귀화를 통해 참정권을 행사하며 일본 정치·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다른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요. 귀화가 100% 부정적인 것이 아니고 다르게 생각하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생업이 있으면서도 동포들을 위한 코리아엔지오센터 상근 활동을 하고, 이노우에 에미로 바뀐 자신의 이름을 안타까워하는 그녀에게 귀화는 큰 영향을 준 것 같지 않았다.
귀화로 사람이 바뀌지는 않아오사카 코리아타운에서 3대째 김치가게를 운영하는 이희철(28)씨는 일본인 아내와의 결혼을 앞두고 장인의 권유로 3년 전 귀화를 했다. 공무원 등 자식의 진로나 연금, 사회보장, 참정권 등 현실적인 부분도 한 이유가 됐다. 이름은 야쓰다 히로야키로 바뀌었다. 집안 어른인 재일동포 1세 강봉녀(81) 할머니는 순순히 손자의 귀화를 허락했다. 이씨는 “할머니는 귀화 자체에 대해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해도 괜찮다며 다만 뿌리는 잊지 말라고 말씀하셨죠. 귀화는 형식적 절차에 불과하고 인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씨의 권유로 2년 전 일본인과 결혼한 남동생도 귀화를 했다.
손자들의 귀화에 대해 묻자 강 할머니는 “일본에 와서 고생을 엄청 했다”며 “자식들이랑 손자들이랑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자식들의 행복이 중요하다는 말로 들렸다. 어머니의 마음자리일 터다. 김치가게 안 작은 방의 벽에는 일본식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바뀐 손자들의 이름과 새로 태어난 증손자들의 이름을 외우려고 적어놓았다고 강 할머니는 말했다.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이유에서 귀화를 하는 것에 긍정적 시선만 있는 건 아니다. 재일코리안청년연합(KEY) 오사카지부 대표 다나카 조 미나코(30)씨는 귀화에 대해 안타깝다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일본인과 결혼한 재일동포 2세인 어머니가 귀화해 일본 국적을 지닌 채 태어났다. “정체성에 대한 생각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귀화하는 분들 가운데 재일동포의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고민 없이 외국인으로서의 차별이 싫어 귀화하는 경우는 가슴이 아픕니다. 재일동포의 처지는 역사적 특수성과 맥락이 있는 것인데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 제약을 인정하려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거죠.” 그녀는 “외국 국적을 가졌더라도 사는 데 큰 차별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위해 주장할 부분은 주장하고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8월27일 ‘한-일 청년 심포지엄’에 참석하려고 제주도를 방문한 KEY 오사카지부 유성도(35) 위원장도 귀화가 느는 현실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무작정 정체성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왜 지켜야 하는지 이유를 말하고 싶다”며 “재일동포는 분명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개인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을 민족이라는 틀로 묶고 싶지는 않아요. 귀화는 여러 종류의 마이너리티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을 거예요. 의식 있는 마이너리티가 진짜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우리 같은 존재가 좀더 다른 시선으로 사회를 보고 이를 밖으로 알리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비단 우리 문제를 넘어 동북아의 평화랄지, 북한 기아 문제의 해결이랄지, 세계의 여러 문제를 마이너리티의 눈으로 더 잘 들여다볼 수 있다고 믿어요.” 귀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민족주의를 발원지로 삼지 않았다. 민족이라는 범주 너머의 보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민족 대체할 느슨한 네트워크예측 가능한 시기에 일본 정부가 재일동포에게 지방참정권을 부여하고 차별을 철폐하는 날이 올까. 전망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어둡다. 일본 정부의 태도 변화가 어려운 상황에서 재일동포는 현실적·경제적 차원에서 귀화에 나서고 있다. 귀화한 재일동포 가운데서도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에 따라 귀화를 대하는 태도가 갈렸지만, 모두 이 흐름이 계속되리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재일동포 사회의 미래에 대해 코리아엔지오센터의 곽진웅 대표이사는 닫힌 민족주의가 아닌 열린 네트워크를 강조했다. “‘코리안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합니다. 그 네트워크는 폐쇄적인 것이 아니라 열려 있어야 합니다. (국적이 중국인) 조선족이나 귀화한 재일동포를 모두 다 연결해야 합니다. 그 뿌리가 한반도에 있다면 누구든 네트워크에 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민족을 대체할 느슨하고 자율적인 망을 상상할 때라는 것이다.
오사카(일본)·제주=글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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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코리아페스티벌’ ‘민족교육문화센터’ ‘재일한국민주인권협의회’ 3개 단체가 모여 2004년 설립된 코리아엔지오센터는 최근 재일동포 변호사·법무사·행정사들이 회원으로 있는 ‘코리아인권생활센터’와도 살림을 합쳤다. 민단·총련과는 행사 취지가 맞으면 같이 행사를 벌이기도 하지만, KEY와 가장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코리아엔지오센터는 일본 시민사회단체의 신청을 받아 일요일 오전 코리아타운 투어 프로그램(사진)도 진행한다. 미유기모리 신사에 있는 ‘한-일 우호의 탑’에서 시작한 투어는 2시간 동안 코리아타운의 김치가게, 반찬가게, 조선학교 등을 둘러본 뒤 한정식집에서 불고기 식사와 함께 마무리된다. 코리아엔지오센터 곽진웅 대표이사는 매년 120여 개 단체 8천여 명의 일본인들이 프로그램에 참가한다고 밝혔다. 5~6월과 8~11월에 신청이 몰린다. 투어 프로그램에 참가한 초등학교 교사 모리카즈(27)는 “평소 한국 문화와 음식을 좋아했지만 식민지와 자이니치 등 한-일의 어두운 역사는 잘 몰랐다”며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아이들에게 잘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KEY는 10~20대 젊은 재일동포들이 주축이 돼 1991년 결성됐다. 전체 회원 규모는 400명 정도로 도쿄에 1곳, 오사카 3곳, 효고(고베) 2곳의 지부를 운영하고 있다. 모든 지부에서 매주 한글교실이 열린다. 한국 국적의 젊은이가 60~70%에 이른다. 다나카 조 미나코 오사카지부 회장은 “역사 학습이라든지 재일동포 차별 해소 운동을 통해 코리안의 정체성을 지켜나간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코리아엔지오센터와 네트워크를 만들어 전후보상 문제 해결에도 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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