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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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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 당신 찾아 천릿길

희망의 버스를 앞에서 이끌며 김진숙을 와락 안으러 순례길 떠나는 쌍용차 노동자의 편지
등록 2011-07-07 16:02 수정 2020-05-03 04:26
7월1일 쌍용차, 발레오공조 해고노동자들이 부산의 김진숙을 만나기 위해 경기도 평택에서 출발했다. 한겨레 류우종

7월1일 쌍용차, 발레오공조 해고노동자들이 부산의 김진숙을 만나기 위해 경기도 평택에서 출발했다. 한겨레 류우종

잊은 줄 알았습니다. 모든 기억이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그때 그 장면만 아니었더라도….

장면#1.
2011년 6월12일 오후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잠든 두 살배기 아이를 품고 85호 크레인 아래 오도카니 서 있는 젊은 엄마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습니다. 핀셋으로 집어내듯 정확히, 2009년 6월의 어느 날이 기억 저편에서 아프게 치고 올라옵니다. 정리해고가 낳은 살풍경은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지만, 그 눈물을 마주 보며 기억의 톱니바퀴가 새삼 다시 돌아갑니다. 아이 엄마는 앞으로 얼마만큼의 눈물을 더 흘려야 할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가슴이 얼어버렸습니다. 그날 오후, 그를 두고 조선소를 떠나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장면#2
2009년 6월 어느 날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앞. 쌍용차 가족대책위 분들이 유쾌하게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매일 공장으로 ‘출근’하던 아내들은 이제 쌍용자동차가 자기 회사가 됐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재잘거리고 자전거를 타고 딱지치기를 합니다. 연대의 손길이 끝없이 이어졌고, 감사의 마음도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즐겁게 6월을 넘겼습니다. 밀어닥칠 먹구름은 모른 채. 행복은 잠시였습니다. 아내가 자결을 하고 남편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고, 공장 안은 죽음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울 힘도, 소리칠 악다구니도 남지 않은 채. 그렇게 시작된 죽음과 공포는 지금도 그 꼬리가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희망 버스 185대’. 7월9일,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의 제목입니다. 지금 전국 방방곡곡에서 노동자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백골단이 ‘용역’으로 명찰만 바꿔달고 전국을 휘젓고 다닙니다. 재벌들은 ‘정리해고’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과 관계를 자근자근 파괴합니다. 울고 있는 아이들, 눈물이 말라버린 아내들, 새카맣게 속이 타들어가는 우리 노동자들, 그러나 85호 크레인 위에서는 강건하게 버티는 김진숙이 있습니다.

압도적인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노출됐던 피해 경험이 아직도 생생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어 서로 저주를 퍼붓던 기억이 지금도 괴로운 아내들. 영문도 모른 채 10년을 함께 뛰어다니던 친구들과 다시 놀 수 없게 된 아이들. 한 아파트 같은 동 위아래 집에서 두 달 사이 2명이 죽었는데 모두 쌍용자동차 해고(희망퇴직) 노동자라는 사실에 소름이 오싹 돋고 심장이 아팠던 수많은 사람들.

‘이 지긋지긋함을 수도 없이 반복만 할 것인가.’ 이 질문의 칼끝 위 김진숙이 서 있습니다. 크레인 위에서 175일을 넘기는 동안 외로운 그의 등에는 100만 송이 소금꽃이 피었다 졌겠지요. 1차 희망 버스가 떠난 뒤 크레인의 덩그런 빈 공간을 채운 건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죽음은 ‘15’를 기록했습니다. 우리 안의 패배감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쌍용에 이어 한진에서 ‘16’이 나올 수 있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아니, 한진으로 이 상처가 끝나겠습니까? 정리해고의 폭풍은 이미 단위 사업장 노동자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지경입니다. 한진 다음은 바로 나, 당신, 우리입니다. 물리력이 아닌 사회적 연대의 손길과 힘으로 김진숙을 안전하게 구해낼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이유입니다.

지금 당신을 안으러 갑니다

7월9일을 향한 희망 버스를 만들려고 주춧돌 하나를 놓습니다. 희망의 폭풍 질주! 소금꽃 찾아 천릿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꽃길을 엽니다. 죽음과 눈물, 고통, 그 비극을 직접 몸으로 겪었던 우리가 먼저 고통을 나누겠습니다.

희망 버스 185대는 숫자가 아닌 마음입니다. 평택에서 부산까지 400km가 넘는 천릿길. 마음의 길 천릿길. 무력감을 씻을 천릿길. 기쁨의 재회를 위한 천릿길. 우리는 천릿길을 달려 김진숙과 한진 노동자들을 와락 안을 것입니다.

이제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아내들은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즐겁게 행복하게 투쟁하고 살아갈 궁리만 합니다. 죽음의 깊은 수렁에서 툭 하고 뛰쳐나와 보니 세상이 보입니다. 이 마음이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김진숙과 함께 행복해지려고 우린 부산으로 내달립니다. 소금꽃 당신, 김진숙 당신을 와락 하고 반드시 안아버리겠습니다.

이창근 쌍용자동차지부 기획실장·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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