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부채 1천조원 시대가 왔다. 놀랄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두 가지 유의사항이 있다. 개인 부채는 이른바 가계 부채와는 약간 다른 개념이다. 소규모 개인 기업이 더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상 말하는 가계 부채는 약 800조원 언저리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유의사항은 개인 부채가 증가하는 과정에서 개인 부문의 자산도 함께 증가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지난 6월15일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양자의 비율은 큰 변동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투기가 가계 부채와 양극화 불러그러나 이번 한국은행 발표는 우리 사회의 잠재적 폭탄임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는 가계 부채의 문제점을 전반적으로 둘러봐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마치 저축은행 문제가 지난 정부 말기부터 지속적으로 지적되다가 급기야 이번에 대형 폭발을 일으킨 것처럼, 가계 부채 문제도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의 대형 폭발을 예고한다. 아마도 그때가 되면 지금 금융정책이나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분들은 다시 뒤늦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나. 그리고 다가오는 파국을 막거나, 적어도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리나라 가계 부채는 보통 ‘U자형’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들 한다.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의 가계 부채 부담이 상대적으로 과중하고, 중위권 소득자의 가계 부채 부담은 상대적으로 가볍다는 것이다. 필자는 U자형 가계 부채 분포의 이면에는 부동산 투기와 양극화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동산 투기가 가계 부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상식에 속한다. 부동산 투기는 가장 손쉽게 큰돈을 버는 ‘국민적 재테크 수단’이었다. 장관 청문회 때마다 ‘땅을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들’과 ‘온 국토를 주민등록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어김없이 등장하지 않는가. 그러나 어찌 이들만이 문제이겠는가. 우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두 부동산 투기꾼이다. 우리는 누구나 집을 살 돈만 있다면, 그리고 정부가 다주택 소유를 규제하지만 않았다면 몇 채라도 집을 샀을 것이다.
적당한 수준에서 부동산 투기의 불씨를 살려나가는 것은 금융기관과 정부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한다. 금융기관은 가장 안전한 사업 방식을 통해 짭짤한 이자 수익을 손쉽게 챙기고, 정부는 건설산업을 떠받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부동산 경기가 위축된 상황이 상당 기간 지속되면 노골적으로 부동산 투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경기 부양책이라는 이름으로 터져나온다.
이런 구조는 가계 부채의 양산에 다양하게 기여한다. 집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금융기관에서 담보대출을 받는다. 집값 상승이 촉발한 전셋값 상승에 신음하는 집 없는 중산층은 전세대출을 늘린다. 이 한도나 조건은 정부가 부동산 투기 억제책의 일환으로 대책의 말미에 선심 쓰듯 완화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가계 부채는 늘어난다. 가계 부채는 아니지만 집값이 상승하면 건설사들의 건설 욕구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금융기관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이라는 거위를 이용해 또 다른 황금알을 챙긴다.
그런데 부동산 투기는 가계 부채 팽창의 직접적 요인일 뿐만 아니라 양극화를 심화시켜 가계 부채를 간접적으로 팽창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이쪽의 상황은 앞의 경우와 달리 매우 음산하고 을씨년스럽다. 아파트값이 일주일에 1천만원씩 뛰면 경제는 후끈 달아오르게 된다. 물가도 덩달아 뛴다. 실물 자산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은 이익을 보고, 명목 자산을 가진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손해를 본다. 그러나 자산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앞길이 캄캄해지게 된다. 최저생계를 꾸려갈 방법이 점점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종국엔 집 잃는 채무자 홍수 이룰 것벌어들이는 수입으로 살 수 없는 사람이 도둑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돈을 빌리는 것뿐이다. 은행에서도 빌리고, 친척한테도 빌리고, 카드론과 현금서비스도 마다하지 않는다. 빚을 못 갚으면 파산하면 되는데 그래도 갚아보려고 급기야 대부업체의 문까지 두드리게 된다. 그래서 양극화의 경제적 귀결은 저소득 계층의 부채 누증이다.
정부의 서민금융 확대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런 현실을 해소하기는커녕 상황을 가속적으로 악화시킨다.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더 손쉬운 방식으로 더 많은 빚을 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의 서민금융 확대 정책이 속도를 낼수록 서민들의 어깨는 궁극적으로 더 고단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U자형 가계 부채 구조의 서글픈 진실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부동산 투기를 진정시키고 양극화를 해소해야 한다. 그러나 건설 신화를 꿈꾸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이 흘리는 국물을 받아먹으라는 낙숫물 정책을 펼치는 현 정부에 이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다음 정부를 잘 뽑아서 해결하자. 대신 이 정부에는 장차 터질 대형 사고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요구하자.
가장 시급한 것은 도산제도 중 개인회생 절차를 정비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고소득자의 주택담보대출이 야기할 문제에 대처하는 데도 필요하고, 저소득자의 채무 부담 경감에도 필수적이다.
고소득자의 주택담보대출 중 앞으로 사고가 터질 부분은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렸던 곳이다. 그곳이 어디인가. 누구나 몇억원에서 몇십억원만 있으면 사고 싶어하는 아파트가 있는 곳, 바로 서울 강남 3구와 용산구다. 앞으로 주택담보대출 쪽에서 문제가 생기면 필시 이 지역에서 경매로 넘어간 아파트 매물이 홍수를 이룰 것이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시들시들한 아파트값에 결정타를 날릴 것이고, 우리 경제는 끝 모를 심연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이 아파트들이 홍수처럼 경매시장에 나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러려면 집을 가진 채무자들이 집을 지키며 도망갈 수 있는 곳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개인회생 절차가 진행 중일 때는 채권자가 임의로 담보 처분을 못하도록 도산법을 개정해야 한다.
저소득자에 대한 대책은 오직 채무 경감뿐이다. 지금 정부는 서민금융 대책이라며 이들에게 더 많은 채무를 권하고 있다. 이들을 아낀다면 빚을 깎아주어야 한다. 이를 정상적이고 일반적으로 시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개인회생 절차의 기간을 단축해주는 것이다. 지금처럼 빚을 권하다가는 서민도 죽고 은행도 죽고 우리 경제도 온전하기 어렵다.
도산법 개정안 시급히 시행해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산법 개정안은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졌다. 이 정부 출범 초기인 2008년 하반기에 개정 작업이 시작돼 2009년 봄에는 골격이 나름대로 갖추어졌다. 그런데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의 반대로 국무총리실 서랍에서 썩고 있다. 기재부와 금융위가 가계 부채 문제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지금이라도 이 법안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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