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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노인을 위한 구청은 있다

지자체 가운데 최초로 자살 관련 응급 시스템 구축한 노원구… 예방 프로그램 및 자살 시도자 응급대응 사업 역점 계획
등록 2011-05-09 18:48 수정 2020-05-02 04:26

“어르신, 이 냄새 뭐예요? 담배 피우셨어요?”
“….”
박민희 사회복지사는 박금자(74·가명)씨의 주름이 많은 오른손을 두 손으로 쥐었다.
“어르신, 이거 봐요, 이거 봐. 담배 누가 사다주셨어요? 혼자 잘 걷지도 못하시잖아요.”
그는 프로다. 대부분 귀가 어두운 노인들에게 하이톤인 그의- 목소리는 잘 어울린다. 표정이 풍부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끈다. 독거노인들을 보살피는 일이 그의 직업이다.

자살예방 관련 법률안 국회 통과

“아으 여아가 사아줘어어….”
대답하는 박씨의 말을 박민희 복지사는 금세 알아듣는다.
“아는 여자가 사다줬어요? 어휴, 담에 또 피우다 걸리면 어르신 혼나요? 아셨죠?”
물론 박민희 복지사가 정색하고 혼내는 일은 없을 게다. 좁은 방 두 칸과 부엌이 전부인 서울 노원구 하계동 영구임대아파트의 5월2일 일상은 지난주처럼 다시 이렇게 시작됐다. 박금자씨는 자녀가 없다. 만성기관지염을 앓고 있으며 이가 거의 없어 발음이 샌다. 남편은 10여 년 전에 치매로 숨졌다. 거동이 불편하다. 그는 이날도 노원노인종합복지관의 봉사단과 박민희 복지사가 가져다준 도시락으로 배를 채울 게다. 도시락 하나로 하루를 견딘다. 도시락을 배달하는 은빛나눔봉사단원도 60대다. 건강한 노인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돕고 있다. 박씨는 오늘 담배 외에도 박민희 복지사에게 걸린 ‘사고’ 하나가 더 있다. 취하려고 어린이 감기약을 하루에 7병씩 마셨다. 위에 탈이 났고 요새는 복지관의 노력으로 감기약을 ‘끊었다’.

지난 5월4일 독거노인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 박민희씨가 박금자씨의 주름이 많은 오른손을 꼭 쥐며 귀엣말을 하고 있다.

지난 5월4일 독거노인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 박민희씨가 박금자씨의 주름이 많은 오른손을 꼭 쥐며 귀엣말을 하고 있다.

“어르신, 제 이름 기억나셔요?”

“바가, 바가.”

박금자씨는 매일 도시락을 배달해주는 사회복지사를 “박가”라고 불렀다. 다음은 909동의 유영희(96·가명)씨 집이다. 경기도에 사는 정신지체 아들은 노원의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노모를 직접 보러올 힘이 없다. 역시 박민희 복지사의 도시락 배달 몫이다. 영구임대아파트의 독거노인 6명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작업은 정확히 오전 11시5분에 끝났다.

가난한 노인 자살을 막으려는 노력에 힘이 실린다. 국회는 지난 3월11일 본회의에서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자살 문제 해결에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지자체가 구체적으로 사업에 나서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은 △국민이 자살 위험에 처했을 경우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 도움을 요청할 권리와 정부의 자살 예방 정책을 수립·시행함에 있어 협조해야 하는 의무를 규정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자살 예방과 자살 확산 방지를 위하여 자살과 관련된 각 단계별 정책을 수립·시행해야 하는 책임을 규정 △자살예방기본계획은 5년마다 국민건강증진정책심의위원회 내 자살예방전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수립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매년 자살예방시행계획을 수립·시행·평가하며 보건복지부 장관은 자살 예방에 관한 시·도별 시행계획을 조정하고 그 이행사항을 점검한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강제 조항이 적어 미흡하지만 중요한 전진이다. 강창일 민주당 의원과 윤석용 한나라당 의원이 대표발의했다. 윤 의원은 “자살은 사회적 전염성이 커서 조기에 차단하지 못하면 사회 전체에 끼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1차적 책임이 있는 국가가 나서서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예방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서울 지자체 가운데서는 노원구의 노력이 두드러진다. 노원구는 2017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0만 명당 11.2명 수준으로 자살률을 낮춘다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다. 최초로 ‘경찰-응급실-구청’이 함께 자살을 막는 응급 시스템도 구축했다. 서울시내 구청 최초로 구청에 ‘생명존중팀’을 만들고 기관 간 자살 위기 대응 시스템을 구축해 지난해 10월부터 올 3월까지 약 4개월간 운영했다. 모두 109건의 자살자 및 자살 시도 정보를 경찰·소방서·구청·병원 간에 공유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지난해 노원구에서 자살을 시도한 사람 중 21명이 ‘사후관리 서비스’를 받겠다고 동의했다. 또 노원구청은 2012~2013년 2년간 자살 예방 사업 예산 20억원을 보건복지부에 지원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노원구, 유가족 사후관리 사업도 시행 예정

노원구는 이를 위해 전담조직을 만들었다. 2010년 10월1일 보건소 보건위생과에 생명존중팀을 꾸렸고, 동 주민센터 복지사례관리 직원을 보강했으며, 노원정신보건센터 자살예방팀을 신설했다. 특히 노원정신보건센터의 노력이 두드러진다. 노원정신보건센터는 자살 시도자 응급대응 사업에 역점을 둘 계획이다. 이는 우울증 조기 발견에 초점을 맞춘다. 무직자, 독거노인, 아동 및 청소년, 기초생활수급자가 주된 배려 대상이다. 자살 시도자 및 자살자 유가족 집중 사후관리 사업이 핵심이다. 이들과 지속적으로 면담을 이어가고 경제적·심리적 상황을 체크한다.

김성환 노원구청장은 “1단계로 2010년 10월∼2013년 12월 10만 명당 자살률을 약 15명으로 낮추고, 2단계로 2014년 1월∼2017년 12월 자살률을 11.2명으로 낮추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 구청장은 “생명 존중 및 자살 예방 관련 제도 및 조직 확충, 자살 예방을 위한 통합 프로그램 개발 운영 등의 사업에 박차를 가하겠다”며 “노인 자살 문제는 지자체가 나서서 배려해야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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