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의야, 포구부터 송구까지 한 번에 가자, 한 번에. 안 그러면 더블플레이 못해.”
마음은 김재박, 이종범이지만 이미 지치고 지친 팔다리는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애써 잡은 강습 타구가 글러브에서 빠지지 않는 것처럼 답답한 일도 없다. 그때마다 입단 1년차 유격수 강병의 선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막바지 꽃샘추위가 찾아온 지난 3월29일 오후 경기도 구리에 있는 LG트윈스 2군 구장은 선수들의 땀 냄새로 후끈했다.
4월5일 프로야구 2군 리그인 ‘퓨처스리그’가 시작된다. 지난 3월29일 오후 경기도 구리에 있는 LG 트윈스 2군 구장에서 선수들이 훈련하고 있다.
2군 선수의 적은 불안
강 선수가 이동욱 2군 수비코치의 강한 연습 타구를 받아내고 있을 무렵,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특급호텔에서는 프로야구 미디어데이 행사가 한창이었다. 4월2일 정규 시즌 개막을 앞두고 열린 이날 행사에는 8개 구단 감독과 대표 선수, 그리고 주목할만한 신인 각 1명씩 참가했다. LG트윈스의 신인 임찬규 선수는 이 자리에서 “류현진 선배와 맞붙어 꼭 이기고 싶다”고 밝혀 쌍둥이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임찬규와 달리 강병의·김준호·박병호·백창수 선수 등 30여 명의 ‘구리 멤버’는 미디어데이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언론의 관심이 몇몇 스타플레이어에게 쏠릴 때 그 뒤에서 묵묵히 땀 흘려야 하는 이들은 2군이다. 1군 선수가 오랫동안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야구팬을 만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이들이 2군이다.
모든 2군 선수의 적은 불안이다. 약 500명에 이르는 전체 프로야구 선수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프로야구 중계를 볼 때 해설위원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2군 선수는 1군에서 기회가 왔을 때 감독의 눈도장을 확실히 받아야 해요.” 타자의 경우 몇 안 되는 찬스 상황에서 꼬박꼬박 적시타나 진루타를 쳐줄 선수가 몇이나 될까. 2군 선수는 그래야 한다.
“1군 무대를 밟게 되면 자신감을 갖고 플레이를 해야 하는데 기회가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잖아요. 삼진 먹으면 안 되니까 한 타석이라도 욕심을 부리게 되죠. 기회가 꾸준히 주어진다면 불안감을 떨칠 수 있을 텐데, 현재 LG에 외야수가 엄청나게 많잖아요. 1군 선수 돌릴 자리도 없는 상황에서 1.5군이나 2군 선수에게 기회가 찾아올까 싶습니다.”
최근 2년간 연봉 구간별 프로야구 등록선수 분포
외야수 김준호는 2007년 계약금 5천만원을 받고 LG트윈스에 입단했다. 강한 어깨와 파워를 갖춘 우타 거포 유망주였다. 이병규·박용택·이대형 등 좌타자 일색인 LG의 외야 사정을 고려할 때 김준호의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김 선수는 “입단 당시만 해도 LG의 외야수는 4~5명으로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며 “스타팅 멤버는 아니어도 1군 엔트리에는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선수는 2008년 시즌 초반에 1군 무대에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 모두 29경기에 교체 출전하며 나름의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다.
불행이라면 LG트윈스의 낮은 성적이었다. 만년 하위권을 맴돌던 LG는 2009년과 2010년 시즌을 앞두고 이진영과 이택근 등 다른 구단에 있는 국가대표급 외야수를 데려왔다. 여기에 ‘작은’ 이병규의 등장과 ‘큰’ 이병규의 복귀, 그리고 정의윤의 경찰청 제대로 2군에 머물고 있는 김준호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승엽의 부드러운 스윙을 닮고 싶던 김준호의 타격을 올해 그라운드에서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평균 연봉 9천만원에 숨은 오해
처음부터 2군을 하겠다고 프로야구에 뛰어드는 선수는 없다. 프로 유니폼을 입을 때는 누구든 1군의 화려한 생활을 꿈꾸게 마련이다. 1군과 2군의 운명이 갈리는 것은 매년 4월 초 정규 시즌 개막 직전이다. 현재 각 구단은 최대 63명의 선수를 보유할 수 있다. 대개 개막 3일 전까지는 1군 엔트리 26명의 명단을 확정해야 한다. 여기에 포함되지 못하면 곧바로 2군으로 내려가야 한다. 각 구단이 보유한 10명 안팎의 신고 선수도 2군 신분이다.
프로야구 30년, 경기 수준도 높아졌고 관중도 크게 늘었다. 딱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2군 선수에 대한 처우다. 연봉만 해도 그렇다.
지난 2월10일 한국야구위원회(KBO)의 ‘2011년 프로야구 소속선수 공시’ 자료를 보면 외국인과 신인 선수를 제외한 406명 프로야구 선수의 이번 시즌 평균 연봉은 8704만원이었다. KBO는 아울러 ‘억대 연봉’ 선수가 모두 100명에 이른다는 사실과 ‘연봉 상위 5걸’ 자료도 함께 발표했다.
프로야구 선수의 평균 연봉이 약 9천만원에 육박한다는 KBO 자료만 보면 프로야구 선수 전체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 빠지기 쉽다. 선수 간 ‘소득 양극화’가 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액 연봉자를 제외한 대다수 야구 선수의 소득은 평균치에 못 미친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선수협)의 ‘2011년 구단별 등록선수 연봉 현황’을 보면 4천만원 이하의 연봉을 받고 뛰는 선수는 전체 469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265명(56.5%)에 달한다(표 참조). 여기에는 최저 연봉인 2400만원 이하를 받고 뛰는 선수 129명(27.5%)이 포함됐다. 반면에 연봉 7천만원이 넘는 선수는 모두 합해봐야 137명(29.1%)밖에 되지 않는다.
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두산 베어스의 3루수 김동주 선수가 7억원의 연봉을 받고, 롯데 자이언츠의 3루수 이대호 선수는 6억3천만원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TV에서 좀체 만날 수 없는 2군 선수의 대부분이 프로야구 최저 연봉인 2400만원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연차가 많아도 만년 2군 신분이라면 그의 연봉은 3천만원을 넘지 못한다.
프로야구 개막전 엔트리에 들어갈 수 있는 선수는 한 팀 당 26명이 전부다. 나머지 30여 명은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해야 한다.
낮은 연봉과 함께 2군 선수가 겪는 어려움은 장비 문제다. 2009년 선수협이 한국사회여론연구소와 함께 프로야구 선수 103명을 대상으로 벌인 ‘프로야구 선수 인권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구단이 제공하는 운동 환경에 대해 전체 응답자의 41.8%는 “만족스럽지 않다”고 대답했다. 운동 환경에 대한 불만 가운데 압도적인 것이 “각종 운동 장비 지급이 원활하지 않음”이었다(74.4%). 연봉이 3천만원도 안 되는 2군 선수에게 수십만원을 웃도는 글러브와 배트 가격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나 마나 한 ‘2차 드래프트’
이시우 선수협 사무국장은 “2군 선수는 배트와 글러브, 기타 소모품 등 훈련용 장비를 모두 자신이 알아서 구입해야 한다”며 “수시로 부러지는 배트와 대개 1년에 2~3차례 교체하는 글러브 비용만 해도 2군 선수에게는 상당한 부담”이라고 말했다.
낮은 연봉과 1군에 비해 열악한 운동 환경은 차라리 극복과 인내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다. 2군 선수를 더 숨 막히게 하는 것은 불합리한 제도와 규약이다. 다시 LG트윈스 김준호 선수의 사례다. 물론 김 선수 본인은 인터뷰에서 “구단의 운동 환경과 훈련 시스템에 만족한다”며 LG트윈스 생활에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김 선수 본인의 생각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누가 보더라도 LG의 외야수 자원은 차고 넘친다. 입단 5년차인 김 선수가 당장 두 명의 이병규 선수와 이진영·이대형·이택근·박용택·정의윤, 여기에 또 다른 견제 세력인 양영동 선수까지 8명에 이르는 주전급 외야수와의 경쟁에서 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김 선수는 LG보다는 상대적으로 외야수 선수층이 얇은 팀에 가는 편이 낫다.
문제는 지금의 KBO 규약에 따르면 ‘구단의 선처’가 없을 경우, 그가 다른 팀으로 옮겨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에는 ‘룰5 드래프트’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룰5 드래프트란 입단한 뒤 5년째 되는 해까지 매년 자유계약선수 자격 취득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선수, 곧 만년 후보 선수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드래프트를 뜻한다. 비주전 선수에게도 뛸 기회를 주자는 취지의 제도다.
다행히 지난 3월8일 KBO와 8개 구단 단장들은 실행위원회를 열고 한국형 룰5 드래프트인 ‘2차 드래프트’ 제도를 마련했다. 독소 조항은 역시 디테일에 있었다. 룰5 드래프트를 도입하겠다고 하면서도 여기에 참가할 수 없는 보호선수 범위를 구단 등록선수 가운데 50명이라고 정한 것이다. 구단별 보호선수 50명 명단에도 포함되지 못할 선수라면 사실상 프로야구가 요구하는 기량을 갖추지 못한 선수일 가능성이 높다.
이시우 사무국장은 “선수협 차원에서 도입을 요구한 룰5 드래프트와 KBO가 내놓은 2차 드래프트는 너무나 다르다”며 “각 구단이 50명이나 보호선수로 묶어버리면 그런 드래프트는 하나 마나 한 것”이라고 말했다.
4월5일 ‘퓨처스리그’ 개막
2011년 프로야구 정규 시즌은 4월2일 전국 4개 구장에서 일제히 개막한다. 물론 시즌을 시작하는 선수들은 개막전 엔트리에 포함되는 208명의 1군 선수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300명 안팎의 프로야구 ‘2군’ 선수는 그로부터 3일 뒤 기나긴 ‘그들만의 리그’를 시작한다. 그 이름은 ‘퓨처스리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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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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