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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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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 예술가가 되지 않을 조건을

4대 보험·실업급여 비껴가는 비정규직 예술 종사자들의 삶…

실태부터 신중히 파악해 권익 보장하는 복지제도 마련해야
등록 2011-02-24 16:53 수정 2020-05-03 04:26

예술인 복지 정책이 정부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건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참여정부 시절 이창동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내놓은 보고서 ‘새예술정책’에 ‘예술인에 대한 사회적 예우 강화’라는 과제를 제시했다. 4대 보험,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 등에 관한 내용이 공론화됐지만 장관이 교체되고 이후 몇 년 동안 예술인 복지는 토론회와 정당 공약집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그친다.
예술인 복지 관련 논의는 2008년 이명박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문화예술인공제회가 등장하면서 다시 시작된다.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예술인공제사업 등 문화예술인 복지 관련 규정 강화를 내용으로 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 입법을 추진했으나 다른 부처의 반대로 무산됐다. 같은 해 ‘예술인 복지법’ 2건이 각각 정병국 당시 한나라당 의원과 서갑원 당시 민주당 의원의 대표발의로 국회에 제출됐다. 2건의 예술인 복지 법안은 예술인의 고용 및 산업재해보험 가입,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설립 등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점은 서갑원 의원은 특별법을 통해 예술인을 근로자로 규정하고, 정병국 의원은 예술인을 근로자로 의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2건의 법안은 상임위 논의 과정에서 관련 부처의 반대 의견으로 2년째 국회에 계류 중이다.

지난 2월15일 국회에서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실 주최로 ‘한국 영화인 창작환경 개선을 위한 전문가 좌담회’가 열렸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으로 정치권은 예술인 복지 관련 법안과 정책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의 ‘반짝’ 관심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연합

지난 2월15일 국회에서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실 주최로 ‘한국 영화인 창작환경 개선을 위한 전문가 좌담회’가 열렸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으로 정치권은 예술인 복지 관련 법안과 정책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의 ‘반짝’ 관심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연합

‘어디까지가 예술인이냐’라는 문턱

예술인 복지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힘든 데는 특수한 예술인의 고용지위와 노동환경이 있다. 예술인의 취업 형태는 절반 이상이 자유전문직과 피고용직이다. 지금의 고용보험법에서는 자영업자에 대한 실업급여가 인정되지 않아 실업급여를 받는 데서 제외되고, 정규직을 대상으로 하는 고용·산재 보험 등의 가입률 역시 낮아 채 30%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이들의 생계를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다. 2009년 기준으로 문화예술인의 66%가 예술활동으로 벌어들인 월평균 소득액이 100만원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들 중 37.4%는 예술활동으로 인한 수입이 ‘없다’. 이는 3년 전인 2006년(27.2%)에 비해 10%포인트나 늘어난 수치다(표 참조). 최저생계비가 53만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예술인들의 경제적 여건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술인 복지의 기반인 4대 보험 가입과 실업급여 관련 법안이 진전을 보이지 못하는 건 예술인의 법적 지위를 둘러싼 찬반논쟁 때문이다. 우리 법에 예술인의 법적 지위를 설명하는 조항은 없다. 문화예술진흥법에 예술인에 대한 정의는 있지만, 예술인의 법적 지위를 규정하는 조항은 없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고용보험법 등에서 소외된다. 국회에 계류 중인 예술인 복지법은 예술인을 근로자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해당 부처는 ‘예술인에게 법적 지위를 부여하기에는 예술인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반론을 제시한다. 예술인의 지위가 법의 문턱을 넘지 못하면 예술인 복지법은 실제 법안으로 통과되기 어렵다. 이에 대해 한 법학과 교수는 “예술인 범위 규정에 한계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70~80%는 예술인의 직업 분류를 해놓은 해외 사례 등을 참고하고 애매한 부분은 세칙이나 상황에 따라 정하면 해결할 수 있다”며 “특별법으로 노동관계법상 예술인을 준근로자로 규정하는 것은 현행법에서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예술인 복지법에서 말하는 예술인복지재단은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국정과제로 내세운 문화예술인공제회와 그 성격이 다르다. 공제회는 회원이 자신의 계좌로 일정액을 불입해 일시금이나 연금을 받는 내용인데, 이는 당시 예술인들의 반감을 샀다. 안정적 수입이 있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예술인들만을 위한 제도라는 지적이었다. 이에 법안에서는 예술인복지기금 설치와 문예진흥기금의 일부, 수익사업 등을 통해 재원을 확보해 실업급여나 퇴직급여, 생계지원, 직업훈련 등을 해나가는 예술인복지재단 형태를 제안했다.

문화예술인들의 창작활동 관련 월평균 수입 추이(위) / 문화예술인들의 4대 보험 가입 여부

문화예술인들의 창작활동 관련 월평균 수입 추이(위) / 문화예술인들의 4대 보험 가입 여부

프랑스의 ‘앵테르미탕’은 좋은 대안

예술인 복지법에서 제안하는 방안들 외에도 외국의 사례를 기초로 한 대안이 제시된다. 대표적인 사례는 프랑스의 공연예술비정규직 실업급여제도인 ‘앵테르미탕’ 제도다. 앵테르미탕은 영화·방송·음악·공연 등에서 일정 기간 계약을 맺고 단속적 기간제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기술자, 배우, 연주자 등을 대상으로 10개월 동안 최소 507시간을 일하면 이후 일자리를 잃더라도 최대 8개월 동안 하루에 최저 25.90유로(약 3만9천원·2006년 기준)를 지급한다.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이 발행한 (2006) 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프랑스의 예술산업 종사자 30만 명 중 약 15만 명이 앵테르미탕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그중 약 10만 명이 이 제도의 혜택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예술인은 ‘예술인의 집’(시각예술)과 ‘작가사회보장협회’(AGESSA·작가)를 통해 정규직과 같은 조건의 지위를 누린다.

앵테르미탕 제도는 단기간 고용돼 프로젝트 형식으로 일하는 노동 형태가 많은 국내 영화계나 공연, 방송계에 충분히 적용 가능한 모델이071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은 앵테르미탕과 같은 실업부조제 도입을 요구한다. 전국영화산업노조 최영재 사무처장은 “영화 스태프의 경우 한 회사에 고용돼 일하다 다음 영화가 들어올 때까지 쉬어야 하는 특수한 노동 형태”라며 “반복되는 실업 기간에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실업부조금 제도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예술인 관련 정책에는 ‘모호하다’ ‘구체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따라붙는다. 예술인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작업하는 예술인들은 “문화예술인의 실태 파악이 우선”이라며 “정부가 실제 예술인들이 어떤 형식의 복지를 원하는지, 그들의 고용지위와 노동환경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등에 관해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회의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문화부는 1988년부터 3년을 주기로 ‘문화예술인 실태조사’를 해왔다. 조사 대상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의 회원 협회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관련 협회의 회원 명단을 기초로 작성된 10개 장르 2천 명의 문화예술인이다. 협회에 회원으로 가입된 예술인이 국내 문화예술인을 대표할 수 있을까. 이지원씨나 최고은씨 같은 젊은 예술가와 독립예술가는 협회나 단체에 소속돼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빠르게 늘어나는 새로운 문화예술 분야의 현실 역시 담아내지 못한다. 이렇게 작성된 실태조사 결과로는 현 시점의 국내 문화예술인 현황을 정확히 알아낼 수 없다. 문화예술인들의 월평균 소득액이나 보험 가입률 등은 앞에서 얘기한 통계 수치보다 낮을 거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예술인도 근로자라는 사회적 합의가 먼저

예술인의 현실은 통계상의 숫자보다 더 열악하고, 더 급격히 악화된다. 이진원·최고은씨가 건넨 경고등은 지금 붉게 빛나지만 추모의 시간이 끝나면 금세 그 빛을 잃을 테다. 그렇다고 서둘러선 안 된다. 실태조사부터 제도, 법안까지 천천히 밟아가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예술인 복지 관련 제도나 법안은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부분이 아니기에 예술인의 요구가 없다면, 또 예술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거부감이나 편견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좀처럼 진전되기 힘들다. 성급하게 여론에 따라 제도나 법을 만드는 것보다 ‘예술인에게도 복지가 필요하고 예술인 역시 근로자’라는 점에 대해 진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더 중요하다”는 문화부 관계자의 말은 예술인 복지 관련 논의를 펼쳐놓기에 앞서 한번 생각해볼 만하다.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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