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쿠르드 등지에서 평화활동을 해온 아쉬티(가명·쿠르드어로 ‘평화’)가 터키에 처음 갔을 때 만나 쿠르드어를 공부하는 계기가 됐던 한 여학생에게 편지를 썼다. _편집자
베르핀에게
우연히 만난 연극단을 따라 터키-시리아 국경지역 소도시로 공연 여행을 함께하면서 당신을 만난 게 2005년이니 우리가 알게 된 지도 6년이 되었군요. 영어를 제법 하던 당신은 내가 극단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주었지요. 잘 지내고 있으시죠?
나는 왜 쿠르드족으로 이뤄진 극단이 쿠르드어 연극을 하지 않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했고,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다던 당신은 그 큰 두 눈에 슬픔을 가득 담고서 “쿠르드족인 내가 터키어를 국어라고 부르면서 국어 선생님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했지요.
쿠르드족 대부분이 쿠르드어를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나는 비판적이었고, 다른 한 친구는 “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집에서 터키어를 배우지 못해 터키어를 전혀 하지 못했던 나는 당연히 쿠르드어로 이야기했고 선생님께 죽도록 맞았습니다. 이후 더는 쿠르드어로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쿠르드족이었습니다. 지금은 누군가 쿠르드어로 물어도 터키어로 대답합니다”라고 말했지요.
당시 터키어를 공부하던 나는 공부를 그만두고 쿠르드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쿠르드족보다 쿠르드어를 더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얘기가 잠시 옆길로 빠졌군요. 나는 당신에게 그 마음을 한국 친구들에게 편지로 쓸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했고, 당신은 처음에는 해보겠다고 했지만 남자친구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쓰지 못했지요. 당신에게 미칠지도 모를 불이익을 걱정했던 남자친구의 반대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땐 상당히 야속한 마음이었습니다.
이후 쿠르드어와 관련된 터키 정부의 탄압은 많이 완화돼 터키 국영방송사에서 쿠르드어 방송을 내보낼 정도가 되었지만, 탄압이 없어진 게 아니라 교묘해진 것으로 보이더군요. 한국의 일제 식민지 시절 문화정책과 비슷하게….
터키어를 모르는 관내 노인층을 위해 쿠르드어로 시정 서비스를 제공하던 쿠르드족 시장이 시장직을 잃었고, 지방 방송사에서 쿠르드어 방송을 내보냈다가 일주일간의 방송사 폐쇄와 적지 않은 벌금을 부과받기도 했지요. 터키 정부는 아무 제약 없이 쿠르드어 방송을 내보낼 수 있지만 쿠르드족은 자신의 언어로 방송을 내보낼 수 없고, 심지어 시장마저도 주민들이 쓰는 언어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는 게 터키 쿠르드족이 마주한 현실이지요.
‘터키에는 단 하나의 언어와 민족만이 존재한다’고 명시된 헌법을 가진 터키에서는 쿠르드족의 존재 자체가 헌법을 위반하는 범죄인 셈이지요. 당하는 당신들 쿠르드족에겐 미안하지만, 어처구니없는 터키 정부의 행태에 외국인들은 쓴웃음을 짓곤 하지요.
몇몇 지방정부에서는 쿠르드족이 민족을 상징하는 색깔로 좋아하는 빨강·초록·노랑의 세 색깔이 신호등 색과 같다고 신호등 색을 바꿔버린 적도 있었던 것 기억나지요? 쿠르드라는 단어는 산악지역에 살아가는 비천한 신분의 터키족이 겨울에 눈을 밟던 ‘꾸드득’ 하는 소리에 기원을 둔 것으로, 민족을 표현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설이 인류학계의 공식 학설이었던 적도 있지요.
당신은 지금쯤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터키어를 가르치고 있겠지요. 언어는 언어일 뿐, 터키어를 가르치는 당신이 잘못된 게 아니라 쿠르드어를 가르칠 수 없도록 한 터키의 정책이 문제죠. 쿠르드족으로서 터키어를 가르치는 당신의 처지는 터키족과 쿠르드족 민중이 서로 인정하고 화해하도록 하는 데 작은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추운 날씨에 옷 따뜻하게 입고, 나를 못마땅해하던 남자친구에게도 안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멀리 한국에서 아쉬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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