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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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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 150명의 전태일



노동현실 비판하는 유서·유언을 남기고 목숨 끊은 오늘의 노동자들…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를 위한 실천으로 계승해야
등록 2010-11-04 15:34 수정 2020-05-03 04:26
가진 것 없는 노동자의 마지막 수단은 제 목숨이다. 2003년 1월12일 오후 경남 창원시 두산중공업 노동자 광장에서 열린 고 배달호씨의 추모제. 한겨레 강창광

가진 것 없는 노동자의 마지막 수단은 제 목숨이다. 2003년 1월12일 오후 경남 창원시 두산중공업 노동자 광장에서 열린 고 배달호씨의 추모제. 한겨레 강창광

1969년 12월31일, 1960년대의 마지막 밤, 전태일은 일기를 썼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스스로 읽고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그의 더듬이는 예민해졌다. 자신이 걸어갈 바를 또렷이 감지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마침내 1970년 8월9일, 전태일은 일기에 썼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두 달 뒤 전태일이 죽었을 때, 언론은 사회면 기사로 이를 다뤘다. 대학생들은 전태일의 장례식을 돕고, 그 죽음을 기리는 집회를 열었다. 지식인들은 청계노조를 찾아가 일을 거들었다. 지금도 전태일은 있다. 전태일처럼 노동현실을 고발하며 죽는 이들이 있다. 지금 없는 것은 뒤늦게나마 노동자의 곁에 섰던 언론과 대학생과 지식인이다. 민주노총의 집계에 따르면, 2000년 이후에만 적어도 20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전태일이다.

그 많던 언론·대학생·지식인은 어디로

천덕명(39)씨는 2002년 11월22일 새벽, 인천 ㄱ운수 차고지에서 시너를 끼얹고 분신해 사망했다. 천씨는 노조 대의원이었다. 회사가 조합원들을 징계위에 회부했다. 죽기 사흘 전, 천씨는 회사의 탄압에 맞서 강력히 투쟁하자고 동료들에게 호소했다. 이해남(41)씨는 2003년 11월17일, 대구 세원정공 앞에서 분신했다. 금속노조 세원테크 지부장이던 이씨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내는 글을 유서로 남겼다. “예전 변호사 시절 우리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셨던 때를 기억하라”고 적었다.

전태일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무감한 사장들에게 분노했다. 김주익(40)씨는 2003년 10월17일,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사업장 대형 크레인 난간에 빨랫줄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회사 쪽의 성실한 임·단협을 요구하며 45m 높이의 대형 크레인에 올라 129일째 홀로 고공농성을 벌였으나, 회사가 협상에 응하지 않자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21년 동안 일한 그는 세금을 빼고 한 달에 80만원을 받았다. 그는 유서에 이렇게 적었다. “노동자는 다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인가.”

2007년 4월18일 오후 서울 용산미군기지 앞에서 고 허세욱씨의 노제.한겨레 김태형

2007년 4월18일 오후 서울 용산미군기지 앞에서 고 허세욱씨의 노제.한겨레 김태형

전태일은 일용직·계약직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했다. 이용석(31)씨는 2003년 10월31일, ‘비정규직 철폐’를 촉구하는 서울 종묘공원 시위 중 분신했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인 이씨는 유서에 “노예문서 같은 비정규직 관리 세칙을 파기하는 우리의 싸움이 얼마나 힘들까 가슴이 메어온다”고 적었다. “아무런 상의도 없는 제 행동을 너그러이 용서 바란다”는 글도 동료들에게 남겼다.

박일수(50)씨는 2004년 2월14일, 울산 현대중공업 선박건조장에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했다. 박씨는 현대중공업 사내 하청 노동자였지만, 하청 노동자 모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박씨는 죽기 직전 벗어놓은 점퍼 호주머니에 유서를 남겼다. “하청 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내 몸을 불태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 속에 착취당하는 구조가 개선되길 바란다”고 적었다.

<font color="#C21A8D">“하청 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내 몸을 불태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 속에 착취당하는 구조가 개선되길 바란다.”
-2004년 2월14일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분신한 노동자 박일수씨의 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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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봉(50)씨는 2004년 12월27일, 경남 마산 한진중공업 도장공장에서 나일론 끈으로 목을 매 숨졌다. 김씨는 24년간 정규직으로 일하다 비정규직으로 전환됐으나 계약 연장을 거부당했다. 21일 동안 공장 안에서 1인 항의농성을 벌이다 죽음을 택했다. 편지지 5장 빼곡히 유서를 적었다. “나 같은 사람도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비정규직 철폐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적었다.

정해진(48)씨는 2007년 10월27일, 인천 영진전업 건물 앞에서 집회를 벌이던 중 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했다. 몸에 불이 붙은 채로 정씨는 “파업투쟁은 정당하다. 사장을 구속하라”고 외쳤다. 이날 아침 가족에겐 “누군가 희생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전봇대·철탑 위에 올라가 고압 전선을 만지는 비정규 노동자였다.

전태일은 자본의 논리가 인간의 권리를 짓누르는 현실을 비판했다. 허세욱(55)씨는 2007년 4월1일,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 앞에서 분신했다. 하얏트호텔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장소였다. 한독택시 조합원인 허씨는 이날 오후 동료에게 건넨 유서에서 “굴욕, 졸속, 반민주적 협상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노조 활동 외에도 민주노동당 당원, 참여연대 회원 등으로 활동하며 낮은 자리에서 자본과 국가의 전횡을 비판해왔다. 그에게 한-미 FTA는 인간의 권리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우리 다시 전태일이 되자”

이들은 노동현실을 비판하는 유서나 유언을 분명히 남기고 공개 장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징계·해고·노조탄압 등에 떠밀려 자살·분신·음독했으나 유서 또는 유언을 남기지 않은 경우, 노조 활동 중에 사고 또는 과로로 숨진 경우, 집회나 파업 도중 경찰·구사대 등의 폭력으로 숨진 경우를 더하면 지난 10년에 걸친 ‘전태일’은 60여 명으로 늘어난다. 1970년 이후로 넓히면 150여 명의 ‘전태일’이 세상을 떠났다.

민주노총은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우리 다시 전태일이 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저마다 최후의 방법을 택하자는 것은 아니다. 가난했으나, 더 가난한 자를 살폈던 전태일의 마음을 따르자는 이야기다. 박석민 민주노총 교육국장은 “전태일이 이루려 했던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를 위한 실천이 지금 더욱 절실하다”고 말했다. 친구가 절실했던 전태일은 오늘에도 우리 곁에 있다. 누가 가난한 노동의 친구가 되어줄 것인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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