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첫 10년간 한국 소설의 경향을 다각도로 체현하고 있는 소설이 박민규의 소설이다. 이를 네 개의 열쇳말로 짚어두자.
① 장르 화법의 확장 소설이 잡식성의 예술이라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 되었지만, 이 특질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공상과학(SF)에서부터 만화와 인터넷의 화법까지가 한국 문학의 반경을 확장시켰다고 할 때, 그 첫머리에 놓이는 것이 박민규의 소설이다. DC코믹스로부터 발아한 을 펼치는 순간 독자들은 요상한 ‘물건’이 출현했음을 직감했을 터. 가벼운 필법으로 치부되기도 했던 그의 모험은 갈수록 폭과 깊이를 더하며 흥미로운 결과물을 산출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팽창의 서사를 비튼 박민규식 스페이스 오페라 ‘깊’과 무림 사룡이 “다시 만난 세계”를 조명한 ‘절’이 그 사례다.
② 환상 망상의 산물이 아닌 서사적 표현과 형식에서도 박민규만큼 확고하게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나간 작가가 드물다. 타이포그래피를 방불케 하는 활자의 지면 배치는 작가의 인장이 되었고, 특유의 문단 나누기는 동시대 작가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작가가 발표한 첫 단편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에서부터 이런 징후를 확인할 수 있다. 너구리를 비롯해 기린, 개복치, 펠리컨, 대왕오징어 등은 작가의 초기작에서 맹활약한 동물들이다. 지금까지 이 동물들이 연루된 비현실적 사건은 대체로 ‘환상’이라 일컬어졌지만, 박민규 소설의 환상은 인물 개인의 망상의 산물로 축소되지 않는데, 거기에는 까닭이 없지 않다.
③ 세계 2000년대의 루저들 작가가 환상을 통해 무반성적으로 관성화된 현실을 비틀어보고 있으니 그의 눈에 투영된 2000년대 한국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990년대 댄디들이 사라진 자리를 메운 이들은 2000년대 루저들이다. 작가의 데뷔작 은 이른바 루저 소설의 신호탄이라 해도 무방하다. 한 인물의 말처럼 “세계는 이미 한 마리의 괴수”에 다름없지 않은가. 고시원에 몸을 누이는 청년들(), 폭력에 노출된 ‘왕따’ 중학생들(), 외모가 우열 지표가 된 신계급사회 속 ‘세기의 추녀’(). 그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가 지배한 약육강식 정글의 피식자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이들을 사회적 약자, 주변부 타자로 박제하려 한다면 작가는 현 인류의 80%가 “세계가 깜빡한 인간”이라 반문할지 모른다. 박민규 소설의 호소력과 공감대는 이로부터 형성된다.
④ 인간 연민과 사랑, 예외적 가능성 ‘탁구계’에 이른 중학생들이 세계라는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의 결말은 세계에 대한 비관에서 움트고 있다. 혁명적 발상처럼 보이는 그 선택은 오히려 합리적 해법이 없는 무자비한 세계의 전능함을 부조한다. 그런 맥락에서, 박민규가 ‘세계’에서 ‘인간’으로 그 무게추를 옮겨왔다는 점을 확인해두고 싶다. 장르와 환상, 유머와 페이소스, 비관과 허무를 그러모은 박민규 소설은 현재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것은 인간이다. 그의 세계관은 누구도 설득할 수 없을 정도로 완강한 반면에, 그의 인간관은 연민과 사랑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런 만큼 예외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다. 를 비롯해 생과 사의 갈림길에 놓인 삶을 포착한 ‘낮잠’ ‘근처’ ‘누런 강 배 한 척’ 등 근작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충격적인 사건을 근간으로 한 ‘루디’와 ‘아침의 문’에서 어린 생명을 앞에 둔 인물들의 선택이 말해주는 바도 이와 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두 장의 사진으로 마무리하자. 2003년 우리는 검은 고글을 쓴 장발의 ‘무규칙이종소설가’를 만났다. 그러나 2010년 작가는 프로필이 놓여야 할 자리에 노트북이 놓인 휠체어를 가져다놓았다. 그는 책상이 아니라 그 휠체어 위에서 글을 쓴다. 그라면 그게 뭐 대수냐며 시큰둥한 손사래를 칠 테지만, 정말이지 망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건투를 빈다.
차미령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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