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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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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만 빨리 나오는 더러운 세상”



2003년 이후 주요 사면 대상자 160여 명 분석 결과 경제인 575일, 정치인 695일 만에 ‘은전’ 입어…
이명박 정권 들어 가속화한 경제인 사면 속도
등록 2010-08-20 15:40 수정 2020-05-03 04:26
경제인 중에서도 재벌 총수들은 ‘판결문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라고 할 만큼 빨리 사면됐다. 2007년 재판을 받고 나오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 2008년 재판을 받으러 가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한겨레 강창광·신소영 기자

경제인 중에서도 재벌 총수들은 ‘판결문의 잉크가 마르기 전에’라고 할 만큼 빨리 사면됐다. 2007년 재판을 받고 나오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왼쪽), 2008년 재판을 받으러 가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한겨레 강창광·신소영 기자

“사면은 형의 선고의 효력 또는 공소권을 상실시키거나, 형의 집행을 면제시키는 국가원수의 고유한 권한을 의미하며, 사법부의 판단을 변경하는 제도로서 권력분립의 원리에 대한 예외가 된다. 사면제도는 역사적으로 절대군주인 국왕의 은사권에서 유래하였으며… 국가원수가 이를 시혜적으로 행사한다”(2001년 6월1일 97헌바74 결정문)

헌법재판소가 고백하듯 사면권의 유래는 절대군주로 거슬러 오른다. 눈물 없는 법률과 행정의 냉엄함을 물리치는 절대군주의 은사(사면)는 체제 유지를 위한 수탈 속에서도 백성의 감동을 자아냈다. 삼권분립의 원칙이 엄격하게 정립된 현대 법치주의 아래에서도 ‘절대자의 은혜’에 대한 향수는 남아 있는 셈인가. 미국을 위시한 대부분의 대통령제 국가는 사면제를 국가원수인 대통령의 특권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온정은 누구의 아픔을 달래주고 있을까?

 

사면 속도… 경제인>정치인>공직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단행한 2003년 4월30일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부터 지난해 12월31일 이명박 대통령이 단행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나 홀로 사면’까지 사면 대상자 명단에 오른 이들을 찾아 분석해봤다. 법원 판결문 등록 시스템 등을 이용해 경제인·정치인·고위공직자 및 기관장 등 주요 사면 대상자 160여 명의 사면 경과 기간을 분석해본 결과, 이들은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지 평균 732일 만에 사면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다.

이 가운데 경제인은 평균 575일(50명), 정치인은 695일(57명), 고위공직자 및 기관장들은 883일(57명) 만에 사면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 사회에서 힘깨나 쓴다는 집단 가운데서도 경제인의 사면이 가장 빨랐던 셈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인권법)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한국 사회에서 경제인의 금권이 가장 큰 권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력에 따른 사면의 양극화 현상은 같은 집단 안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138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72일), 최태원 SK그룹 회장(77일), 김윤규 현대건설 대표(56일) 등 거대 기업집단의 총수와 임원은 2008년 광복절 사면에서 ‘판결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함께 사면을 받은 나승렬 거평그룹 회장(1497일), 김영진 진도그룹 회장(1556일), 이재관 새한그룹 부회장(1913일) 등은 평균치를 크게 웃돈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권력과의 ‘사전 교감’이 의심되는 대목도 나타났다. 부영건설의 이중근 회장은 2008년 8월4일 재판이 진행 중이던 상고심을 갑자기 취하해 항소심이 선고한 형을 확정받고, 열흘 만인 광복절에 사면을 받았다.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동씨 역시 2005년 7월25일 상고심을 취하한 뒤 20일 만에 사면을 받았다. 지난 8월15일 광복절을 기념해 사면을 받은 노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도 사면을 일주일여 앞두고 밀렸던 추징금을 완납했다. ‘사전 언질’을 의심케 하는 행보들이다.

경제인 사면의 대의명분은 ‘경제 살리기’였다. 경제인이 특별사면된 2002년 연말, 2005년 부처님 오신 날, 2006년 광복절, 2007년 신년, 2008년 신년, 2008년 광복절 사면에서, 정부는 매번 △투자 활성화 △일자리 창출 △경제 살리기 △경제 기여 기회 부여 등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 5단체가 강력한 로비력을 자랑했다. 지난 수년 동안 이들은 경제인 사면을 정부에 건의했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곧바로 사면 혜택을 받았다. 경제 5단체가 2008년 8월 사면을 요청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등은 그해 광복절에 사면을 받았다. 또 2007년 7월 사면을 요청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정몽원 한라건설 회장, 장흥순 전 터보테크 대표 등도 2008년 1월1일자로 사면을 받았다. 실물경제 흐름을 쥐락펴락하는 경제 5단체는 경제인들의 든든한 뒷심 역할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도 노무현 정부는 문규현 신부 등 공안사건 관련자를 사면에 포함시켜 균형추를 맞추려 애썼다.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운동을 벌이는 문정현(오른쪽)·문규현 신부. 한겨레 박종식 기자

그래도 노무현 정부는 문규현 신부 등 공안사건 관련자를 사면에 포함시켜 균형추를 맞추려 애썼다.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운동을 벌이는 문정현(오른쪽)·문규현 신부. 한겨레 박종식 기자

 

경제 살리기와 무관하단 실증적 분석 나와

‘경제 살리기’ 명분의 힘이 세지면서 경제인을 먼저 사면하고, 이를 빌미로 한두 해 뒤 같은 사건에 얽힌 정치인·고위공직자를 사면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참여정부는 대선자금 비리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학수 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 강유식 LG그룹 부회장, 김동진 현대자동차 부회장 등을 2005년 부처님 오신 날에 먼저 사면하고, 이어서 2005년 광복절에 같은 사건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정대철 민주당 고문, 김영일 한나라당 선거대책본부장 등 정치인들을 대거 사면했다. 또 한보그룹 비리 사건에 관여했던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 역시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2002년 12월31일 사면을 받은 지 반년 만인 2003년 광복절에 사면됐다.

문제는 기업 총수에 대한 사면이 ‘경제 살리기’와는 무관하다는 실증적 분석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검찰청이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의뢰한 비공개 연구보고서 ‘경영범죄와 기업성과’는 2004년에 1심 재판이 끝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관련 경영범죄 사건 128건을 분석한 뒤 “경영성 악화의 1차 원인은 총수 등의 범죄 때문이지 (이후 진행된) 수사나 재판과는 별 영향이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특히 이 보고서는 검찰 수사나 재판이 진행되는 시기에 해당 기업들의 수익률이 다른 기업에 비춰 떨어지지만, 재판이 끝난 뒤에는 일반 기업 수준으로 빠르게 회복된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확인했다. 경제개혁연대 김상조 소장은 “경제인들이 사면을 받으면 경제 살리기 효과를 낸다는 것은 착시 효과에 불과할 뿐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오히려 정부와 경제인들이 사면과 투자·고용을 맞바꾸는 거래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쨌든 사면은 헌법이 국가원수에게 인정하는 고유의 권한이다. 어떤 ‘결단’을 통해 사면에 이르게 됐느냐는 관전평만이 남을 뿐이다.

2003년 이후 주요 경제인 사면 분석

2003년 이후 주요 경제인 사면 분석

2003년 이후 주요 정치인 사면 분석

2003년 이후 주요 정치인 사면 분석

2003년 이후 주요 공직자 사면 분석

2003년 이후 주요 공직자 사면 분석

이같은 관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사면에 대한 시각 차이는 도드라져 보인다. 먼저 경제인의 사면 속도는 현 정부 들어 제대로 탄력을 받았다. 지난해 말까지 있었던 세 차례 사면에서 경제인은 486일, 정치인은 896일, 고위공직자 및 기관장들은 1089일 만에 사면을 받았다. 이는 참여정부 시기(경제인 606일, 정치인 547일, 고위공직자 633일)에 비교적 고른 사면 속도를 보인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비리 사범에 대한 사면은 없다”라고 공약했지만, ‘경제 대통령’의 ‘경제인 챙기기’ 앞에서 공약은 공약(空約)이 됐다. 참여연대는 “이제 경제인의 특별사면은 ‘특별한’ 사면이 아니라 연례행사가 되었다”며 “대기업 총수들을 사회적 특권층으로 대우함에 따라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가치가 훼손됐고, 법질서에 대한 국민적 냉소감만 깊어졌다”고 논평했다.

기간뿐만 아니었다. 지난해 말 단행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사면은 ‘KAL기 폭파 사건’ 김현희씨가 1990년 4월 헌정 사상 처음으로 단독 사면을 받은 뒤, 19년 만의 ‘나 홀로 사면’이었다. 이 대통령은 뒤이은 2010년 광복절 사면에서 이학수 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을 사면했다. 이로써 2000년 법학교수들이 이 회장과 이 전 구조조정본부장을 고발하면서 시작된 삼성의 ‘경영권 불법 승계’ 사건은 완벽한 면죄부를 받게 됐다.

노건평씨는 이번 8·15 사면 직전에 추징금을 완납해 ‘사전 언질’을 받았단 의혹을 받는다. 2008년 구속수감되기 위해 차에 오르는 노씨. 한겨레 이종근 기자

노건평씨는 이번 8·15 사면 직전에 추징금을 완납해 ‘사전 언질’을 받았단 의혹을 받는다. 2008년 구속수감되기 위해 차에 오르는 노씨. 한겨레 이종근 기자

 

노 전 대통령은 좌우 균형 맞추려 노력

이에 비해 노 전 대통령은 사면 대상에서 좌우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참여정부는 2003년 정부 출범을 기념하며 “갈등과 반목을 관용과 화해로 씻어내자”는 의미로 문규현 신부, 문성현 금속연맹 위원장, 작가 황대권씨 등 공안·노동사건 관련자 1424명을 사면했다. 그 뒤로도 남북 화해·협력 기조를 반영해 2005년 광복절에는 한총련 관계자 204명을 사면하는가 하면, 2006년 광복절에는 전북 부안 핵방폐장 건설 반대 운동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55명을 사면했다. 사회와 시대적 갈등으로 빚어진 상처를 씻기 위한 조처로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반면 현 정부 들어 사면된 공안·노동 사건 관련자는 양병민 전국금융산업노조 위원장 등 9명에 불과했다.

절대군주의 배를 불리기 위해 억압과 수탈에 시달렸던 민중이 오히려 절대군주의 은사를 기다렸다는 중세의 역사가 잔혹극이었다면, 사회 통합을 빌미로 유지되는 사면이 권력에 따라 배분되는 지금의 모습은 희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노현웅 기자 한겨레 법조팀 golok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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