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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미상의 사내 “검찰청으로 나오라”


노무현 추모 다큐 만든 이창희씨 사연… 검사 방 아닌 민원실 앞에서 “대통령 명예훼손 했다” 질책
등록 2010-07-23 19:55 수정 2020-05-03 04:26

어느 날 당신이 “검찰청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생각해보자. 전화를 건 사람은, 당신이 허위사실을 유포해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한다. 당신이 황급히 달려간 검찰청에서 조사를 받은 장소는 검사 방이 아니라 민원실 앞이다. 당신을 조사한 사람은 신분도 알려주지 않은 채로 당신을 협박한다.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더구나 그날 이후 당신은 검찰은커녕 사정기관 어디에서도 조사받으러 오라는 통보를 받지 않는다. 당신이라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겠는가?
“내가 누군지는 알 거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다큐를 만든 이창희씨. 신분을 밝히지 않은 사내에게 “검찰청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다큐를 만든 이창희씨. 신분을 밝히지 않은 사내에게 “검찰청으로 나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탐정소설이나 미스터리 영화 줄거리가 아니다. 출판업을 하는 이창희(51)씨가 지난해 7월께 실제 겪은 일이다. 언론단체인 ‘참언론을 위한 모임’ 대표인 이씨는 지난해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서울 대한문 앞에 차려진 시민분향소 운영에 참여했다. 시민분향소를 운영하면서 이씨와 몇몇 자원봉사자들은 노 전 대통령이 몸을 던져 시민에게 남긴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리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했다. 자료 수집, 대본 작성, 편집 등을 여러 명이 분담했고, 이씨는 제작을 총괄했다. 보름 동안 합숙까지 하면서 나온 48분짜리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노무현의 미완성 공화국’. 다큐멘터리 내용은 크게 △노 전 대통령이 학력 차별, 지역감정과 싸우며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쇠고기 촛불 이후 돌파구를 ‘노무현’한테서 찾으려 했던 이명박 정부의 책임이라는 주장 △민주주의 발전은 대통령 한 사람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노력으로 이뤄진다는 호소, 세 가지다. 이씨는 이 다큐멘터리를 노 전 대통령 쪽에 전달했고, 7월16일 노 전 대통령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 게시판에 게재됐다. 애초 제목을 ‘누가 왜 노무현을 죽였는가’로 정했을 만큼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적지 않았고 ‘간접살인’이란 강한 표현도 넣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씨는 이 다큐멘터리가 문제가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일주일쯤 지난 뒤 이씨의 휴대전화로 “당신이 ‘노무현의 미완성 공화국’ 다큐멘터리를 만든 사람 맞느냐. 서울중앙지검으로 나와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이씨가 경찰의 불법 연행에 항의해 경찰을 고소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2009년 5월2일 쇠고기 촛불 1주년 기념행사가 열린 서울시청 앞에서 시민악대의 공연을 보던 시민 100여 명을 경찰이 마구잡이로 연행할 때 함께 끌려가 서울 강서경찰서에 사흘 동안 구금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경찰을 직권남용 등으로 고소했는데, 전화기 너머의 사내가 이런 사실까지 알고 있다니 놀랍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서울중앙지검의 누구냐”는 이씨의 질문에 상대는 “그런 건 알 거 없다. 와서 내선번호 ××××번으로 전화하라”고만 했다. 이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에까지 화가 미칠까 걱정돼 당장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으로 달려갔다. 알려준 내선번호로 1층 안내데스크에서 전화를 걸었더니 곧 양복 차림의 남성이 나타났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키는 170cm가 조금 못 되지만 다부진 체격이었다.

“방송국이 고소하게 하는 건 일도 아니다”
그가 만든 다큐 ‘노무현의 미완성 공화국’.

그가 만든 다큐 ‘노무현의 미완성 공화국’.

이 남성은 이씨를 검찰청 민원실 앞 커피자판기 쪽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노무현의 미완성 공화국’ 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왜 ‘간접살인’이란 용어를 썼느냐. 현직 대통령에 관련된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에 해당된다”고 했다. 이씨가 “그건 범죄 구성 요건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따지자, 이 남성은 “다큐멘터리에서 방송국 저작물을 무단으로 이용한 건 저작권법 위반”이라고 말을 돌렸다. “저작권법 문제를 왜 공안기관이 하느냐. 더구나 저작권법은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 하는데, 나를 고소한 방송국이 없다”고 이씨가 재차 따졌다. 그러자 이 남성은 “방송국이 당신을 고소하게 하는 건 일도 아니다. 형사소송뿐만 아니라 민사소송도 제기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남성은 15분가량 지나 순순히 이씨를 보내줬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씨도 경황이 없던 탓에 미처 그의 신분을 더 캐묻거나 내선번호를 기록해두진 못했다. 하지만 분명 그는 서울중앙지검 내선번호로 연락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검찰 관계자였다면 민원실 앞에서 이씨에게 질문을 했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는다. 내사 단계든, 정식 조사 단계든 검찰이 사람을 불러놓고 조사실로 데려가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검찰 관계자가 아니었다면 국정원 직원이나 국무총리실 소속 공직윤리지원관실 근무자 등이 검찰의 협조를 얻어 이씨를 불렀던 것일까? 이 경우엔 수사 권한이 없는 기관이 이씨를 조사한 것 자체가 문제될 수 있다. 경찰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 역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최강욱 변호사는 “경찰이든 검찰이든 사람을 불러 조사를 하려면 먼저 자신의 소속과 신분을 밝히는 게 경찰관 직무집행법과 형사소송법의 기본 원칙”이라며 “누가 나를 왜 조사하는지를 아는 건 헌법정신이 보장하는 국민의 권익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변이 피의자의 권리보호를 위해 펴낸 책인 는 수사기관이 부를 경우 어느 검사실인지, 왜 조사를 받아야 하는지, 어떤 사건과 관련된 것인지, 피내사자 또는 피의자 신분으로 부르는 것인지를 먼저 구체적으로 물어보라고 조언한다.

그는 누구인가, 수배라도 해야 하나

어쨌거나 이씨는 노 전 대통령 추모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했기 때문에 국가기관으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는 의혹을 품고 있다. “당시 다큐멘터리를 CD에 담아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포할 계획이었는데, 권력기관이 이를 막으려 그랬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노 전 대통령 추모 열기도 높았고, 봉하마을에 가는 사람도 많았잖아요. 그땐 어떻게든 돈을 구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고 CD를 배포할 생각만 했지, 미처 표현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당했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이번에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불법 사찰을 당한 김종익씨 사건을 보니 아차 싶더라고요. ‘공권력은 방송국을 시켜서 너를 고소할 수 있으니, 알아서 몸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듣고도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여기고 오히려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드는 사회적 구조가 정말 문제 아닙니까.” 이씨는 자신이 당한 일을 곱씹으며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지난여름 이씨를 검찰로 불러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을 거론하며 노 전 대통령 추모 다큐멘터리를 문제 삼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씨는 그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몽타주를 뿌려 대국민 ‘공개수배’로 ‘색출’이라도 해야 국민이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협박당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걸 막을 수 있을까?

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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