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7월16일 이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날 이 땅 ‘국민의 종’들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흔적조차 없이 잊는 집단 기억상실에라도 걸린 것일까. ‘국민의 종’이 제대로 일하는지 감시하겠다며 국무총리실에 공직윤리지원관실을 만든 그날, 감시의 대상이 종이 아니라 국민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박영준 라인’이 ‘박영준 사조직’ 조사국민은행 인력용역업체 ㅋ사 전 대표 김종익씨를 상대로 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초법적인 사찰이 드러난 지 열흘이 더 넘었지만, 이 사건의 ‘배후’를 둘러싼 의혹은 풀릴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점점 더 몸집이 커지고 있다. 김씨는 국민은행 명예퇴직 뒤 만든 회사를 3년 동안 잘 이끌어왔지만, 하루아침에 대표직과 지분 전부를 내놔야 했다. 혹시라도 가족과 회사 직원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몇 달 동안 일본에서 ‘유배’ 생활도 참아야 했다. 그동안 회사 직원들은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불법적인 압수수색과 소환조사에 시달렸다. 그는 이광재 강원지사와 동향이라는 ‘죄’, 4대강 사업과 수도·의료 민영화 등을 비판한 ‘쥐코 동영상’을 하루 스무남은 명이나 볼까 한 개인 블로그에 갈무리한 ‘죄’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찰 관련자들은 모조리 입을 다물거나 책임을 회피한 채 김씨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사찰 의혹이 처음 제기된 지난 6월21일 오후 국회 정무위원회에선 관련자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뻔뻔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은 신건 민주당 의원이 사찰 의혹과 관련한 질의를 하기 직전 ‘실종’됐다. 정부 직제상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책임지는 권태신 국무총리실장은 사찰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국회 (질의) 대비 과정에서 와서 보고를 해서 받았다. 그 전엔 모르고요”라고 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사조직’으로 이용한 의혹을 받는 박영준 국무차장은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을 찾아오라는 이사철 정무위원장 등의 닦달에 “배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이인규 지원관은 이날 멀쩡한 모습으로 국회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문화방송 <pd> 카메라에 잡혔다.
하루빨리 진상을 조사하고 책임자를 문책해야 할 청와대와 총리실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시간만 보냈다. 하지만 ‘제보자 색출’과 ‘이인규 감싸기’엔 기민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6월27일께부터 공직윤리지원관실 근무자를 불러 조사를 벌이고 있다. 민정수석실은 김종익씨가 검찰의 기소유예 처분에 불복해 헌법소원을 낸 사실을 알고 지난 2월 김씨한테 전화까지 해놓고도 무슨 이유에선가 사건을 덮었다. 그런 조직이 제대로 진상 파악을 할 수 있을까.
실제 공직윤리지원관실 근무자를 상대로 한 조사 내용은 불법적인 사찰이 이뤄진 이유 등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 어떻게 이런 일이 언론에 보도됐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한다. 또 이 보도한 박영준 차장 사조직 의혹(817호 줌인 ‘박영준 사조직의 민간인 사찰 의혹’ 참조)과 관련해선 공직윤리지원관실 내부자가 발설했을 것이라는 전제로 조사를 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이 조사를 주도하는 사람 역시 ‘박영준 라인’인 장석명 민정수석비서관실 공직기강팀장이다. 서울시 공무원 출신으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거쳐 박 차장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했는데, 현재 공석인 공직기강비서관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게 제기되는 인사다. 조사를 장 팀장이 맡아서였을까. 청와대는 7월2일 현재까지 ‘의혹의 핵’ 가운데 한 사람인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은 조사하지도 않았다.
정 총리가 두 번 지시하고서야 조사 나서
석연찮은 태도는 총리실도 마찬가지다. 총리실은 거의 매일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이 고혈압이 심해 병원에 입원했다. 우리도 연락이 안 된다”고 둘러댔다. 정운찬 총리는 6월22일 진상을 조사하라고 처음 지시했지만, 총리실엔 조사 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사실상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책임을 떠넘긴 꼴이었다. 6월30일 정 총리가 다시 한번 “총리실이 주도해 조사하라”고 지시하고 나서도 이틀이 지난 7월2일에야 총리실은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을 처음 불러들였다. 불법 사찰 당사자인 김충곤 팀장, 원충연 사무관의 대기발령도 이날 났다.
책임지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할 청와대와 총리실이 미적대는 동안 의혹은 점점 불어났다. 우선 누가 어떤 기준으로 공직윤리지원관실 근무자를 발탁했고, 어떤 일을 했느냐다. 이곳이 박영준 차장의 사조직이라는 의혹을 벗으려면, 가장 기초적으로 이 질문이 해결돼야 한다. 김종익씨 불법 사찰의 애초 제보자가 누구였는지, 이광재 강원지사나 노사모와의 관련성은 왜 조사했는지, 왜 그토록 김씨의 대표직 사임과 지분 이전에 집착했는지, ㅋ사 불법 압수수색과 직원 소환조사는 누구의 지시로 이뤄졌는지, 왜 정상적인 하명 체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서울 동작경찰서에 사건을 이첩했는지, 검찰에 김씨 기소를 얼마나 압박했는지, 최종 보고는 어느 선까지 올라갔는지, 민정수석실은 어떻게 알았고 왜 조사하려 하다가 덮었는지…. 이 의문들을 풀어야 김씨가 당한 고통의 절반이라도 덜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시각에서 김종익씨에 대한 수사 기록과 경찰 및 ㅋ사 직원의 발언을 비교해보면 ‘보이지 않는 손’의 압박이 엄청났다는 흔적이 포착된다. 2009년 2월16일 김씨를 무혐의 처리하는 것으로 내사종결 보고서를 올린 동작경찰서는 보름여 뒤인 3월5일 ㅋ사 직원 4명을 상대로 동시에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보통 한 사건의 수사는 수사관 1명이 전담하는데, 이날 조사는 같은 시각에 이뤄졌기에 수사관 4명이 투입됐다. 내사가 종결됐다는 얘기를 듣고 동작경찰서에 자신의 조사 기록 열람을 신청한 김종익씨는 신청 결과를 확인하려 경찰서에 전화했다가 재조사가 시작됐고 담당 수사관도 교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씨 조사는 참고인 4명의 조사를 벌인 다음날인 3월6일 이뤄졌고, 검찰 송치는 3월10일이었다.
이와 관련한 신동석 동작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장의 설명은 이렇다. “원래 김씨를 내사했던 수사관은 개인 사정으로 가사휴직이 예정돼 있었다. 휴직하기 전에 사건을 끝내고 가는 게 좋으니까 내사종결 보고서에 결재를 했다. 그런데 우리 팀 티오를 확보하려고 이 수사관을 휴직 직전 일선 파출소로 발령냈을 때, 하필이면 불러도 출석하지 않던 참고인들이 갑자기 나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다시 기록을 보니, 보강 수사를 해야겠더라. 바로 수사과장한테 가서 보고했다. 보강 수사 지시를 한 사람이 수사과장이었는지 서장이었는지는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 눈앞에서 바로 펜을 들고 글씨를 썼던 건 기억난다.”
앞뒤 안 맞는 경찰의 해명
신 팀장 말대로라면, 1차 조사 땐 참고인에게 출석을 요구한 뒤 불응하자 참고인 조사도 제대로 끝내지 않은 채 결론을 내렸다는 뜻이 된다. 또한 내사종결 보고서에 결재를 한 신 팀장과 수사과장, 경찰서장은 모두 ‘부실 조사’ 결과를 수용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참고인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 재조사를 하게 됐고, 나흘 만에 사건을 송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기록상 이 참고인들은 1차 조사 때 경찰서에 출석해 자필 진술서를 제출했다. 불러도 안 나온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자필 진술서에 바탕해 더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진술조서를 작성하는 절차를 밟지 않은 건, 이들이 제출한 진술서 내용만으로 사실 파악이 충분했다는 풀이가 가능한 대목이다.
그런데도 갑작스레 재조사가 시작된 배경은 무엇일까? 총리실의 자료 이첩에서 내사종결 보고서 제출까지 석달이 걸린 1차 조사와 달리, 조사 기간 닷새 만에 무혐의에서 기소 쪽으로 결론을 바꿔 급하게 검찰에 송치한 것은 동작경찰서에 모종의 압박이 가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ㅋ사 직원인 참고인들이 자발적으로 출석한 건 ㅋ사가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국민은행이나 ㅋ사에 ‘윗선’의 압력이 가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의문을 풀려고 은 사찰 당시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을 만난 남경우 국민은행 인사담당 부행장, 당시 국민은행 노무팀장이었던 원아무개씨, ㅋ사 직원 등을 접촉하려 했으나 모두 답변을 피했다. 특히 재경부 관료 출신으로 참여정부 때 금융정보분석원에서도 일했던 남경우 부행장은 총리실의 김씨 사찰이 불법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전화 통화 자체도 피했다. 남 부행장은 곧 있을 KB금융지주 사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된다.
한나라당 쇄신파도 진상 규명 요구
민주당은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청와대가 불법 사찰을 사전에 알았는지 △영포회의 권력남용 사건이 더 있는지 △영포회가 공직사회에서 실제로 이 대통령의 ‘친위대’ 구실을 했는지 △영포회의 규모는 얼마나 되고 배후는 누구인지를 규명키로 했다. 또 국정조사나 특검, 청문회 등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겠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 안에서도 남경필·김성식 의원 등 쇄신파를 중심으로 “사조직이 국정을 농단했다면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참여연대는 7월6일께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 등을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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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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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한겨레 그림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