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9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크론버거 거리에 위치한 삼성전자 유럽법인 건물. 이곳 회의실에 아침부터 1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독일 각지에서 온 우리나라 현지 법인의 직원이었다. 멀리 벨기에에서 찾아온 이도 있었다. 이날 행사는 우리나라 공정거래위원회가 주최한 ‘국제카르텔 예방교육’ 자리였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경쟁총국의 직원 안드레아스 카이델 등이 강사로 나섰다. 이날 행사는 오전 9시30분에 시작해 오후 4시30분이 넘도록 진행됐다. 이 자리에 참석한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우리나라 유럽 현지 법인 관계자들이 영업에 바빠서 이렇게 많이 참석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font color="#00847C">삼성전자·LG·대한항공… 대기업 줄줄이</font>선진국의 국제 짬짜미(담합) 행위 단속이 우리 기업에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지난 4년 사이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 대한항공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미국에서 수천억원대의 과장금을 얻어맞고 있다. 미국 법무부가 2005년 이후 지난해까지 국제 카르텔 혐의로 물린 과징금 31억420만달러 가운데 우리나라 기업이 낸 액수가 11억8500만달러였다. 미국 법무부가 세 번 칼날을 휘두르면 한 번씩은 우리 기업이 맞았다는 뜻이다.
미국 로펌인 ‘깁슨던’의 자료를 보면, 미국 정부가 국제 카르텔 혐의로 부과한 과징금 순위에서 우리나라 기업 4곳이 역대 최고 8개 기업에 속했다. LG디스플레이는 2006년 일본 샤프 및 대만 CPT사와 가격을 짬짜미한 혐의로 4억달러의 과징금을 지난해 물었다. 스위스 비타민 제조사인 호프만라로슈가 1999년 물었던 5억달러에 이어 미국 경쟁당국이 부과한 과징금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다. 대한항공도 2007년 3억달러를 미국 정부에 냈다. 역대 네 번째로 많은 액수였다. 2000~2006년에 브리티시에어웨이 등 다른 항공사와 함께 화물과 여객 운송료 가격을 담합했기 때문이다. 또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각각 3억달러와 1억8500만달러의 과징금을 지난 2006년과 2007년에 냈다. 각각 여섯 번째, 여덟 번째로 많은 벌금액이었다. 미국 정부는 2005년 한국 삼성과 하이닉스, 독일의 일피네온 등 반도체 회사들이 1999년부터 2002년까지 가격을 짬짜미했다는 혐의로 이와 같은 과징금을 물렸다. 국제 카르텔을 올림픽으로 치자면, 우리나라는 ‘유수한’ 산업대국을 제치고 가뿐하게 종합 1위를 차지했다.
기업체 직원들은 미국에서 감방살이까지 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얘기를 들어보면, D램 반도체 담합 혐의로 하이닉스의 임원급 직원 4명이 5~8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삼성전자 직원 6명도 7~14개월을 감방에서 보냈다.
짬짜미의 대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미국에서 답합 혐의로 벌금을 내게 되면 유럽연합 등 다른 경제권에서도 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제일제당이 그런 예다. 2001년 8월 미국 정부는 제일제당이 경쟁기업인 대상재팬과 담합한 사실이 있다며 300만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자 이듬해 12월 유럽연합 경쟁당국은 1220만유로를, 2005년 8월 캐나다가 17만5천캐나다달러를 부과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대한항공과 LG디스플레이 등도 제일제당의 선례를 따를 확률이 적지 않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경쟁총국 누리집(ec.europa.eu/competition)을 보면, 항공사·반도체·액정표시장치(LCD) 업계의 짬짜미를 조사한다는 내용이 있다. 경쟁총국은 조사 대상 기업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유럽연합이 이들 기업을 조준하고 있다는 것이 업계 안팎의 일반적 의견이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이의 성명’을 발표한 바 있어 하이닉스는 이에 대한 답변을 제출한 상태”라고 말했다.
심영섭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번 국제 담합 행위가 드러나면 막대한 과징금과 인신구속형, 민사 집단 소송이 뒤따르고 이미지가 실추되는 등 무형 자산의 상실로까지 이어져 기업이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고 말했다.
중국 쪽도 심상찮다. 중국은 2007년 8월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를 통해 ‘반독점법’을 통과시키고 2008년 8월부터 시행할 것을 확정했다. 이 법 2조는 “중화인민공화국 영역 내의 시장경쟁을 배제하거나 제한하는 영향을 미치는 중화인민공화국 영역 외의 행위에 대해 이 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반독점법의 역외 적용 조항이다. 아직까지 중국 쪽에서 이 조항을 근거로 우리 기업에 과징금을 물린 예는 없다. 그러나 우리 기업체와 정부 모두 중국 쪽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유럽 프랑크푸르트에 이어 베이징(5월)과 상하이(7월)에 국제 카르텔 예방교육 일정을 잡은 이유다. 미국 설명회 일정은 10월 이후로 잡혔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짬짜미로 덜미가 많이 잡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이 국제 담합 업체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우리나라 기업들이 이 추세와 대응 방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관계자는 “미국은 무역 제재 수단으로 반덤핑 규제 등 과거의 수단 대신 담합 업체에 대한 제재를 늘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로펌인 깁슨던의 자료를 보면, 2005년 3억3800만달러 수준이던 과징금은 해마다 늘어서 지난해 10억달러까지 치솟았다. 담함을 금지하는 경쟁법이 국가의 틀을 벗어나 국제적으로 폭넓게 적용되는 추세다. 심영섭 연구위원은 “사업자단체 활동, 경조사 모임, 개인적 인맥 등과 연결된 동양적 기업 문화와 영업 관행에 익숙해진 우리 기업은 외국 경쟁당국의 잣대에 쉽게 걸릴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기업들의 인식 수준이 낮았다”고 말했다.
<font color="#638F03">‘자백’ 활용하는 노하우 부족해</font>경쟁당국의 조사를 받을 때 우리나라 기업의 대응이 미숙하다는 평가도 있다. 예를 들어 경쟁당국에서 담합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을 때 대상 기업이 먼저 담합 내용을 신고하면 벌금액을 줄일 수 있다. 혹은 조사 대상이 아닌 다른 담합 내용을 ‘자백’하는 식으로 제재를 덜기도 한다. 법무법인 화우의 김재영 변호사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자진신고 기업에 징계 수위를 낮춰주는 리니언시 제도 등을 활용하는 노하우가 부족해 제재를 적정한 수준 이상으로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는 담합 행위에 대한 의식 수준이 낮고, 경쟁당국의 조사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져 해외에서 자주 덜미를 잡힌다”고 말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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