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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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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 폐지, 인류 발전 단계 중 하나

제네바서 열린 사형반대 세계총회 참석 도중 접한 ‘사형제 합헌’ 소식…
위로 건네는 외국인들 보며 또다시 힘을 내다
등록 2010-03-10 11:17 수정 2020-05-03 04:26

지난 2월25일 오후 2시, 사형제의 위헌 여부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을 시각, 내가 머물던 스위스 제네바는 새벽 6시였다. 거의 1년을 기다려온 결정이지만 마지막 8분은 무척 길게만 느껴졌다. 새벽 6시8분 ‘합헌’이라는 짧은 문자메시지 하나가 도착하자마자 같은 내용의 문자 수십 개가 잇따라 전해졌다. 머릿속에는 ‘아, 그 많은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나’ 걱정과 허탈함이 가득했다.

2월26일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회의장에서 4차 사형반대 세계총회가 끝난 뒤 참석자들이 사형제 폐지를 촉구하는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로베르 바댕테르 전 프랑스 법무장관,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란의 시린 에바디 변호사, 레미 파가니 제네바 시장. EPA/연합

2월26일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회의장에서 4차 사형반대 세계총회가 끝난 뒤 참석자들이 사형제 폐지를 촉구하는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로베르 바댕테르 전 프랑스 법무장관,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란의 시린 에바디 변호사, 레미 파가니 제네바 시장. EPA/연합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사형반대 세계총회’(WCADP)는 올해로 4회째를 맞았다. 사형 폐지를 위해 노력하는 유엔과 각국 정부, 시민단체가 모여 각자의 상황과 경험을 공유하고 전략을 마련하는 자리로, 총 1900명이 참석했다. 주최는 프랑스사형폐지연합이라는 단체가 했지만 스위스 연방정부가 전적으로 후원하는 행사였고, 많은 정부 관계자가 참여했다.

“합헌 결정, 사람들에게 뭐라 설명을…”

특히 유럽 정부들은 사형 폐지 의지를 적극적으로 펼치며 오히려 시민단체들의 도움을 호소했다. 스페인 총리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프랑스의 전 법무부 장관이자 현 상원의원인 로베르 바댕테르,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의 외교부 장관, 스위스 연방 외무장관 등 유럽의 고위 관료를 중심으로 각국 정부는 자신들의 사형 폐지 노력을 약속했다.

1977년 사형폐지국은 16개국이었으나 2010년 현재는 95개국으로 늘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는 국가는 25개국에 불과하다. 유엔이 사형 집행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결정한 지 2년째, 집행 수도 천천히 줄어들고 있다. 성질 급한 이탈리아 정부는 올해 유엔총회에서 ‘모라토리엄으로 가기 위한 지침’을 제안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형 집행을 계속하는 국가들에 어떻게 이를 멈출 수 있는지를 제시하자는 제안이다. 스페인 정부는 2015년까지 유엔이 ‘사형집행 없는 세상‘(World without Execution) 의제를 도입할 것을 올해 총회부터 촉구하겠다고 발표했다. 유엔이 ‘사형집행 유예’를 촉구하는 데서 더 나아가 전세계적으로 사형제를 폐지하기 위해 힘쓰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적극 나서는 게 주로 유럽 정부들이다 보니, 사형 폐지가 유럽만의 가치이지 않느냐고 비꼬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폐지국 95개국 중 유럽 국가는 4분의 1에 불과하다. 이는 종교나 지역, 국가의 경제 상황 등과 관계없이 사형제 폐지가 인류 발전 단계 중 하나임을 보여준다.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인류가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전세계 사형 집행의 77%를 차지하는 아시아가 풀어야 할 숙제다. 숙제의 첫 번째 단추로 국제사회가 한국을 지목한 상황에서, 이번 헌재의 결정은 총회에 참석한 모든 참가자에게 안타깝고 실망스러운 소식이었다.

2월24일 회의 때 한국의 헌법재판소 결정을 하루 앞두고 있다는 상황 보고를 하자, 스위스의 한 참가자는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새벽에 발표가 나면 바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달라는 영국 참가자, 다음날 샴페인을 가져오겠다던 네덜란드 참가자는 이튿날 회의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한참 찾아다녔고, 구석에 있던 우리의 표정을 보았는지 발걸음을 돌렸다. 풀이 죽은 우리 어깨를 툭툭 치는 사람들, “유감이에요”라며 위로하는 사람들, 손을 잡으며 격려하는 사람들…, 한국 참가자들은 25일 하루 종일 위로 인사를 받느라 바빴다.

사형 77%가 아시아… 세계의 관심은 한국으로

이번 결정으로 사형 반대를 원하는 세계 시민들은 한국의 상황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참석한 각국 정부 관계자들도 이 의제를 한국 정부와의 대화에 포함시키겠다고 알려왔다.

국제사회는 확신하고 있다. 사형 폐지로의 한 걸음이 인류를 위한 한 걸음이라는 것을. 100여 년 전 노예제도를 폐지한 그 용기와 결단을 한국 정부가 할 수 없다면 한국 시민이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김희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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