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송송책방)는 쇼핑 중독이 아니다. 오히려 물욕이 없는 편이다. 꾸준한 관심과 에너지가 필요한 수집 취미나 팬질은 엄두도 못 낸다. 사 모으는 건 책이 전부다. 옷을 잘 입는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라기보다는 취향대로) 입어도 늘 “오늘 마감날이야?”란 소릴 듣는다. 그런데도 통장 잔고는 바닥. 카드 청구서에 적힌 금액은 월급에 육박한다. 무분별하고 계통 없는 소비의 결과다. 소비로 인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매달 카드값만 무섭게 불어난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보자는 취지로 1년간 쇼핑 안 하기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가난뱅이야, 그만 사!.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무분별한 소비의 예를 몇 가지 들면 이런 거다. 2009년 10월, 자전거를 샀다. 황정음식으로 말하면 ‘어이없이’ 사버렸다. 어느 날, 자전거 관련 책을 기획하면 좋겠다 생각하고 어떤 책들이 나와 있나 검색을 시작했다. 자전거 출퇴근족 카페에 들어가 눈팅을 하다가 자전거 소개와 사진을 올리는 메뉴에 들어갔다. 여기서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프로세스는 이런 식이다. 자전거 이미지들을 죽 감상한다. → 자전거로 출퇴근하면 살도 빠지고 건강해지겠네, 생각한다. → 가격비교 사이트에 들어가 어떤 자전거가 좋을지 검색하고 동료들에게 메신저로 링크까지 보내가며 토론을 시작한다. (이미 이 시점에선 살까 말까가 아니라, 무엇을 살까 고민하고 있다.) → 20만원대 미니벨로, 이 정도면 소박하죠. → 점찍은 물건을 좋은 조건에 파는 판매자를 찾는다(배송은 무료인지, 조립은 해주는지, 무이자 할부 되는지… 아직까진 나름 합리적인 소비자 모드). → 그런데 가장 싼 곳에선 내가 원하는 색상이 없다. 눈에 불이 들어온다. 원하는 색상이라면 1만~2만원쯤 비싸도 상관없어진다. → 나는 충동적인 B형, 카드를 꺼낸다. → 지른다. → 카드 결제 SMS가 온다. → 잠시 죄책감이 든다. → 곧 잊는다.
겨울이 코앞인 늦가을이었지만, 지를 때 심정으론 눈이 와도 탈 것 같았다. 눈 내릴 때를 대비해 고글을 검색하다 그건 좀 과하다 싶어 그만두었다. 그렇게 산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했다. 50분 걸렸다. 힘이 쪽 빠져 오전을 좀비처럼 보냈다. “최고의 고자 안장”이란 리뷰대로 엉덩이가 아팠지만 처음이라 그러려니 했다. (사람에도 물건에도 처음엔 관대하다.) 마침 그날 저녁에 술 약속이 생겼다. 자전거는 회의실에 짱박아두었다. 그러고 두 달간 방치. 그사이 자물쇠 번호를 잊어버렸다. 곡절 끝에 자물쇠를 풀었지만,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자전거를 탄 것은 단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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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말, 와이브로 2년 약정을 했다. 넷북을 준다고 해서였다. 어차피 인터넷도 써야 하니까, 라며 동네 마트에서 계약했다. 고층은 와이브로 음영지역이라 안 될 수도 있다고 했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넘겼다. 우리 집은 19층, 안테나 한 개 뜬다. 중개기 설치해준다고 하는데, 지금껏 전화도 안 해봤다. 넷북은 스티커 붙여 예쁘게 꾸며놓고, 고양이가 밟을까봐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다.
모 인터넷 서점 플래티넘 회원이다. 3개월간 순수 구입액이 30만원이 넘는 사람에게 부여하는 등급이다. 플래티넘이 되면, 추가 3%의 마일리지와 4천원 영화 할인권, 월 100건의 무료 문자를 획득한다. 한 단계 아래는 골드다. 구입액이 약간 모자라 골드로 떨어지면 초조해진다. 이것저것 책을 골라 결제하면 가끔 이런 메시지가 뜬다. “이전에 구입한 책입니다.”
가끔 뭔가에 꽂히면 과감히 지른다. 그리고 처박아둔다. 난 대체 뭘 사려 했던 걸까?
중학교 마니또 선물, 비닐 안 뜯은 만화책…‘1년간 쇼핑 안 하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뒤, ‘재고 조사’를 하라는 명을 받고 집 안을 뒤졌다. 오래된 오디오와 MP3 플레이어용 스피커, 아이팟 비디오, 아이팟 셔플, 필름 카메라 세 대, 디지털카메라 한 대, 노트북 하나, 넷북 하나…. 음악도 안 듣고 사진도 안 찍으면서 뭐가 이리 많으냐. 장롱 서랍 한가득 청바지 열일곱 벌이 들어 있다. 그중 입는 건 단 두 벌. 겨울 외투가 열 벌. 서너 벌 빼곤 전혀 안 입는 것들이다. 장식장 안엔 대학 때 쓰던 노트와 유인물이 가득하다. 그 위에 얹힌 상자 세 개에는 중학교 때 교환한 마니또 선물, 편지, 고등학생 때 쓴 교환일기 같은 게 들었다. 20년 넘게 끌고 다녔지만 열어본 건 몇 번 안 된다. 책장엔 10년 된 잡지 더미부터 비닐도 안 뜯은 만화책, 언제, 왜 샀는지 모를 책들이 빽빽하다. 3분의 2는 안 읽은 책들이다. 냉동실엔 봉다리 봉다리 내용을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이 얼어 있다. 모두 언젠간 입고, 보고, 먹지 않을까 싶어 쟁여둔 것들인데 그것들이 필요한 ‘언젠가’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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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세운 소비 안 하기 계획은 이랬다.
1. 비덩주의: 덩어리 물건은 안 산다.
2. 즉각적 만족을 주지 않기: 사고 싶다면 일주일간 유예하기. 일주일 뒤에도 갖고 싶다면 심각하게 고려.
3. 외식 안 하기: 점심 식사, 회식 등을 제외하곤 집에서 해먹는다. 장 보는 비용에 제한을 두지는 않지만, 절대 남기지 말기. 특히 커피 안 사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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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하철 출퇴근: 집과 회사 거리가 가까워서 자가용이 더 싸게 먹힌다고 주장하며 자동차 출퇴근을 해왔다. 경제성보다는 자동차 의존도를 낮춰보려는 의도.
성과는 이렇다.
1. 덩어리 물건은 사지 않았다. 지난해 말에 가입하고, 올해 받은 아이폰을 제외하면 새 물건은 별로 사지 않았다. (2월 들어 해이해져서 책과 화장품을 조금 샀다.)
2. 좋아하는 브랜드가 80% 세일한다고 해서 매장에 들어갔다.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빨려 들어갔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80%면 거저나 다름없는데, 이런 건 사도 되지 않을까 토론을 했다. 통화를 하는데 자꾸 삑삑 소리가 났다. 세일 상품을 보니 흐뭇해 너무 웃어서 볼살이 전화기 터치패드를 누른 거였다. 그래도 ‘일주일 고심’ 계획을 지키자 마음먹고 기다렸다. 그사이 세일이 끝났다. 아쉬움과 안도가 교차했다.
3. 외식은 여전히 많이 하고 있다. 커피는 줄였지만 아주 끊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1월엔 커피 사 먹으면 안 된다고 얻어 마셨는데, 커피 끊으려다 인간관계 끊길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나는 관대하다.) 대신 장 보는 건 많이 줄었다. 시금치 한 단을 사는 대신, 그램으로 달아 400원어치를 사는 식으로, 한 번 먹을 만큼만 산다.
4. 지하철 출퇴근의 가장 큰 적은 늦잠이다. 아침에 차를 가져오면, 퇴근할 때는 지하철을 타는 걸로 절충하고 있다. 다음날 또 늦잠을 자면 차를 가져올걸, 후회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지하철을 탄다.
‘플래티넘 회원’ 유혹을 이기고
얼마 전, 메일함을 열어보니 알라딘에서 ‘플래티넘 회원’ 기간이 일주일 남았다는 전자우편이 와 있었다. 지난 3개월간 순수 구입액이 2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다시 플래티넘이 되려면 28만원어치 구매를 해야 한다. 보관함에 담아둔 책만 100만원어치 될 테니, 사자면 순식간이지만 평민으로 살기로 했다.
놀라운 것은 물건을 사지 않아도 살아진다는 것이다. 옷을 안 사니 옷장을 뒤져 비교적 쓸 만한 옷을 찾아낸다. “아, 이런 것도 있었지!” 생활의 재발견이다. 책을 안 사니 오래전 사둔 책을 읽는다. 자전거는 아직 세워두고 있다. 아마도 내가 사고 싶었던 건 자전거가 아니라 날씬한 몸이었던 모양이다.
두 달간 쇼핑 안 했기로 재정 상태가 엄청 좋아지진 않았다. 하지만 버는 것보다 덜 쓰면 저축은 늘어날 것이다. 진리는 심플하다. 1월부터 가계부를 쓰고 알량한 자산을 파악하고 나니 현실이 보인다. “이 가난뱅이야, 그만 사!” 엄청난 성과는 없지만 소소한 성취로도 만족이다. 멀리 가야 하니까 슬슬 가련다.
김송은 출판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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