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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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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지 못한 유골, 남북경쟁의 엉뚱한 희생물

징용·징병자 유골 반환을 위한 한-일 협상 전말 담은 외교문서 발굴…
유골을 하찮은 도구 취급한 한국 외교 당국자의 치졸함 보여줘
등록 2010-02-25 18:30 수정 2020-05-03 04:26
2010년은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지 100년, 해방을 맞은 지 65년이 되는 해다. 이제 그 시절의 고통을 기억하는 노인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남은 이들은 80~90줄에 접어들었다. 그들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일제 강점기의 기억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저질렀던 잘못과 실수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은 92돌을 맞는 3·1절을 앞두고 아직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땅에 머물러야 하는 유골들의 사연과 생의 마지막 끊을 놓지 않고 있는 노인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봤다. 이제는 우리가 응답할 차례다. 편집자

2005년 6월16일.

가로·세로 10㎝, 높이 15㎝의 작은 상자 하나가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했다. 군청색 보자기에 단단히 싸인 상자는 일본 후생노동성 직원을 통해 한국 보건복지가족부 직원의 손에 건네졌다. 간단한 서류 작업을 마무리한 뒤 후생성 직원은 서둘러 귀국했기 때문에 노경자(74)씨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노경자씨는 2005년 6월 오빠의 유골을 충남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에 모셨다. 유골 운송비 등 비용 일체는 일본 정부가 부담했다.

노경자씨는 2005년 6월 오빠의 유골을 충남 천안 국립 ‘망향의 동산’에 모셨다. 유골 운송비 등 비용 일체는 일본 정부가 부담했다.

상자 속에 담긴 것은 노씨의 큰오빠 노용우(1922~45)씨의 유골이었다. 노용우씨는 지금의 서울 법대의 전신인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43년 10월 육군특별조종견습사관(특조) 1기로 선발돼 전투기 조종사가 됐다. 그는 1945년 5월29일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해 내습한 미군 B29기를 들이받아 격추시킨 뒤 목숨을 잃었다. 노씨는 “오빠의 유골이 일본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방송사 PD에게 우연히 전해듣고 유골을 돌려받게 됐다”며 “그동안 오빠의 유골이 어떻게 보관돼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노용우씨가 조선을 떠난 것이 1943년 무렵이니, 실로 60여 년 만의 귀환이었다. 한-일 정부는 언론의 취재 접근을 극도로 꺼렸다고 한다.

1965년 한-일 협정 체결 이듬해 협상 시작

노용우씨의 유골이 보관돼 있던 곳은 일본 도쿄 메구로구의 사찰 유텐지(祐天寺)였다. 2007년 여름 이곳을 방문했을 때 들었던 의문이 있다. 일본의 태평양전쟁에 동원돼 숨진 조선인 군인·군속들의 유골은 왜 이곳에 있을까? 왜 그들은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은 이 의문을 풀기 위한 추적에 돌입했다. 한 달여간의 추적 끝에 1960~70년대 한국과 일본 사이 유골 반환 협상의 전말을 담고 있는 ‘재일본 한국인 유골봉환’(1966~67)이라는 A4용지 200여 장 분량의 외교문서를 발굴할 수 있었다. 문서는 흥미로운 진실을 담고 있었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동포의 유골을 하찮은 도구쯤으로 취급했던 한국 외교 당국자들의 치졸함이 그대로 녹아 있다.

한-일 정부 사이에 유골 반환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한-일 협정이 체결된 이듬해인 1966년부터다. 전쟁이 끝난 뒤 육군 쪽 유골은 후쿠오카현에, 해군 쪽 유골은 히로시마현에 집결됐고 이들 유골은 1958년 11월 후생성으로 이관돼 별관 창고에 보관돼 있었다. 1960년대 중반 한국과 일본의 신문들을 보면 “해방 이후 20년이 지났는데 아직 돌아오지 못한” 유골 문제를 빨리 해결하라는 촉구성 기사를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유골 반환을 둘러싼 한-일 간 쟁점은 유골을 누구에게 반환하는가였다. 이는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유골의 주인은 모두 ‘조선인’으로 숨졌지만, 그들의 조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굴된 자료에서 일본 쪽이 최종적으로 밝힌 유골의 수는 모두 2311위로, 이 가운데 북한 출신자의 유골이 469위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봐 남한 출신자가 절대다수인 1862위인 것으로 추정된다(정확한 수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름).

1941년 소위로 임관한 모습과 경성법학전문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모습의 노용우씨(오른쪽 위). 유골 반환 협상의 전말을 담은 ‘재일본 한국인 유골 봉환’ 외교문서(오른쪽 아래).

1941년 소위로 임관한 모습과 경성법학전문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모습의 노용우씨(오른쪽 위). 유골 반환 협상의 전말을 담은 ‘재일본 한국인 유골 봉환’ 외교문서(오른쪽 아래).

“조총련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그 무렵 남북은 전세계를 휘몰아친 냉전의 최정점에 서 있었다. 선취점을 얻은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1959년 시작된 재일동포 북송사업으로 남북 체제 경쟁에서 한발 앞서나가는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한국의 외교 당국자들은 산 사람들은 빼앗겼으니 죽은 사람들이라도 ‘독점’함으로써 북한에 반격을 가하고 싶었을 것이다.

1966년 4월27일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이후락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보낸 ‘재일 전몰 한국인 유골 처리 문제에 관한 중간보고’를 보면, 유골 협상을 둘러싼 한-일 정부의 입장이 잘 정리돼 있다. 일본 정부는 남한 출신자들의 유골은 한국 정부에 일괄 인도할 수 있지만, 북한이 연고지인 사람들의 유골까지 건네는 것은 힘들다는 입장이었다. 조총련과 일본 사회당 등의 반발이 예상되는데다, 가족의 동의 없이 유골을 넘긴다는 것은 일본 민법의 규정상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견줘 한국 정부는 모든 유골을 한국 정부가 인도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유가족 또는 연고자가 없는 유골(북한 출신자들의 유골)은 동경 내의 적절한 장소에 매장”(1966년 2월15일 외교부 동북아주과 작성 ‘2차 대전시에 희생된 한국인 유골 문제의 처리방안 건의’)해 유골 문제를 일단락짓자는 태도를 고수했다. 남한 출신자들의 유골만 모셔올 경우 나중에 북한이 남은 유골을 모셔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골이 남북한의 체제 대결 도구였다는 증거는 문서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김동조 주일대사가 같은 해 4월18일 외무부에 전달한 보고서가 눈에 띈다. ‘일본에 있는 한국인 유골’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보면, “주오사카 총영사로부터 보고에 의하면 오카야마현 오카야마시에 있는 진성사(眞城寺) 납골당에 한국인 유골 70주가 안치되어 있다고 하며 조총련계에서 동 유골의 인수 위하여 책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며 “당 대사관은 전기 유골이 조총련 계열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계속 활동하도록 하고 있다”고 적었다.

북한 출신자 유골까지 인수 고집하다 좌절

고심하던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연고자가 없다면 친목회, 종친회 등을 어느 정도 내세울 수 있는지”를 물었다. 한국 정부의 뜻을 들어주면서 일본 법규에 어긋나지 않도록 모양새를 만들어보자는 속내였다. 한국 정부는 ‘이북5도청장과 같은 출신지별 명예지사, 출신지별 친목단체, 종친회, 동창 등 특수관계자’ 등을 제시했지만, 깐깐한 일본 정부의 성에 찰 리가 없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의 지리한 협상이 다소 귀찮았던 모양이다. 1967년 1월18일로 해를 넘긴 뒤 작성된 ‘전몰 한인 유골 인수 문제’를 보면, “(이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추궁이 있을 경우) 보다 가까운 연고자가 발견될 경우에는 그에게 인도될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코멘트로 이를 막도록 함. 단, 아측으로서는 실제로 북한 지역의 연고자에게 인도하는 일은 없을 것임”이라는 어느 기준으로 봐도 치졸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협상 전술을 적어두고 있다.

반환된 조선인 유골 수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반환된 조선인 유골 수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966년 시작된 유골 협상이 최종 결론에 도달한 것은 3년 뒤인 1969년 제3차 한-일 각료회의에서였다. 한국 정부의 완벽한 판정패였다. 그해 8월26~28일까지 도쿄에서 진행된 각료회의에서 유골 문제가 논의된 것은 최규하 외무부 장관과 아이치 기이치 일본 외무대신 등 양국 외무관료 14명이 참여한 8월26일 오후 3시30분 회의였다.

회의에서 실무대표로 참석한 한국의 김정태 아주국장은 “한국인 유골을 일괄 인도해달라”고 주장했지만, 일본의 소노베 도조 아시아 국장은 “유족이 발견되는 대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처리하자”고 맞선다. 결국 한국 정부는 “신원 관계가 확실한 자에 대해 우선 개별적으로 인도하는 방향으로 노력해달라”며 물러서고 만다. 일괄 인수를 추진해왔던 한국 정부의 주장이 깨지고, 유족이 확인되는 경우에만 유골을 돌려주겠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이 관철된 것이다.

그 당연한 결과로 유골 반환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1970년 1위, 1971년 3월 1위, 11월 246위의 유족이 확인돼 고국의 품에 안겼다. 그러던 중 1971년 6월 조선인 군인·군속의 유골은 후생성 별관 창고에서 도쿄 메구로구의 사찰 유텐지로 옮겨졌다. 유골의 조기 귀향이 사실상 물 건너갔기 때문에 영구적인 추도시설로 옮긴 것이다.

초조해진 한국 정부는 1974년 2월7일치 7면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전몰 한국인 유골 명단’이라는 공고문을 낸다. 희생자들의 이름이 창씨명으로 돼 있는데다, 전쟁을 거치면서 주소 이전이 많아 후손 확인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같은 해 12월 911위의 유족이 추가 확인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찔끔찔끔 돌아온 유골의 마지막 주인공이 노용우씨다. 은 1970년대 한국 외무부가 작성한 유골관계 문서철 ‘태평양전쟁 한국인 전몰자 유골 명부’에서 그의 창씨명을 관리번호 ‘1036번’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유텐지에 아직 1135위 남아 있어

이후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졌던 유골 문제가 다시 부각된 것은 2004년 12월17일 노무현 대통령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에게 “전시 중 민간 징용자 유골 수습에 대한 협력”을 요청한 뒤다. 이후 한국에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본격적인 유골 협상이 진행됐다. 진상규명위 출범 뒤 세 차례에 걸쳐 유골 204위가 추가로 반환됐다.

그러나 아직도 유텐지에는 조선인 군인·군속 유골이 1135위(북한 출신 431위)나 남아 있다. 올해는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구천을 헤매고 있는 유골 1천 위의 비극은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글·사진 길윤형 기자 한겨레 일제강점 100년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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